망원렌즈만 달린 사진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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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렌즈만 달린 사진기가 있다

꿀떡 0 3929
저자 : 정진혁     시집명 : 간잽이
출판(발표)연도 : 2010     출판사 : 세계사
망원렌즈만 달린 사진기가 있다


천수만 부남호 가창오리 떼가
호수 가운데에서 뭍으로 이동하는 붉은 하늘
망원렌즈가 초점을 향해 몸을 회전한다
시커먼 실루엣이 시끄러운 가창오리로 살아난다
가까이 있으면 형체도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끌어다 눈앞에 놓는
렌즈가 눈알을 반짝 거린다
저 멀리 재두루미 깃을 고르고
저어새 두어 마리 물속을 뒤지고
당신은 새의 습성을 지녀
가까이 가면 날아가 버린다
렌즈 속 당신은
여기 바람 을씨년스런 적막의 들판을 모른다
천리쯤에 있을까
조금만 빗나가도 모습을 놓치고 마는
당신은 새의 날개를 가졌다
가까운 마음을 멀리 두고 봐야하는
두터운 유리 속에서
멀고 또 먼 흔들림
당신과 나의 거리는 카메라처럼 차다
렌즈로 끌어 당기는
멀리서만 또렷한 얼굴
멀리서만 들리는 웃음
마음 끌어 당기지 못하는
망원렌즈만 달린 사진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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