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기린 - 어머니의 죽음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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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기린 - 어머니의 죽음을 기리며

전창옥 0 923
저자 : 전창옥     시집명 : 서편문을 나서다
출판(발표)연도 : 2016     출판사 : 전북대학교출판문화원
꽃기린
      - 어머니의 죽음을 기리며 -

            Ⅰ

빨간 다섯 뿔이 단정한 기린 한 마리
집안을 사뿐히 걸어 다닌다
아마 봄이 한창인 오월이었을 게다
감꽃 하얗게 핀 나무 밑에서 누나는
마지막 수제비를 끓이고 짐꾼 한 명과
들랑날랑 집을 비우고 있었다
팔려가는 것이 싫어 뒷걸음치던 황구
만삭 기동이를 남기고 다섯 식구는
햇볕 가득했던 마당 넓은 집을 떠나
딱지만 한 방 두개에 짐을 부렸다
때다 남은 연탄까지 수레에 싣고
해 넘어 오르던 용머리 고개
곱추 등 수레 위에서 영덕게 발처럼
하늘을 헤엄치던 기다린 목이
무거워 꺾이고 젖혀질 때마다
엄니는 기동이 매어두던 나이론 줄을
네발에 단단히 묶고 거머리마냥 따라갔다

          Ⅱ

석류나무 검푸른 낮은 함석집
봄 가을 여름 장독대에 서성대다
송편 같은 눈송이 날리면
사내아이들 방 윗목에 터를 잡고
가지런히 발 모으고 귀를 귀울였다
어느 여름밤, 함장이 쇳소리로
잠겼던 파란 대문 열리고
탱자 곱게 익던 계절에 이마 고운
자식 하나 들여와 허리 펴던 밤도 보았고
밤톨 머리 떨구고 눈물 흘리며
삼 년 집 떠난다는 아들 녀석  걱정에
밤으로 가슴 앓던 소리도 들었다
흰 눈 쌓여 맑았던 설
달 밝아 서글펐던 추석을 보내며
죽순처럼 커가는 몸 비좁던 방에서
우리는 더벅머리 비틀스와 기타에 묻혀
배고픔을 잊고 산에 올랐다

          Ⅲ

밤하늘 불꽃 흩어지듯 다섯 아이 짝을 찾고
밥그릇 구색 맞추어 고향을 뜰 때
엄니는 우리가 덮던 이불을 빨아 햇볕에 널고
기린 화분 곁에서 종일 라디오를 들었다
새벽바람 안개에 달아나듯 세월이 가며
밥상에는 손주들 숟가락이 하나씩 더 놓이고
우리 머리통이 커져 식솔들 배 굴리며
비행기로 배로 낯선 땅 기웃거릴 때 
기린의 빨간 뿔은 작아지고 목은 길어만 갔다
취기에 잠시 들러 홀로 계시던 쪽방에 앉아
가슴 멍들게 했던 못난 흰소리 깔아대고
주머니 속 구겨진 지폐 몇 장 코앞에 던진 나를
눈 내리는 골목길에 서서 끝내 배웅하시던 엄니
다섯 손가락 하나씩 접고 펴며 자식들 내세울 때
우리는 적금부어 집 늘리고
할부로 차 마련해 서로를 멀리했다
기린에 물주는 것도 잊으며 손주들 짝을 찾고
옛날을 잃어가며 울타리를 높여 갔다
 
            Ⅳ

누가 이를 알았을까
기린이 여름의 초원을 맘껏 달리고 있을 때
엄니는 아무 말씀도 없이 우리를 놓으셨다
아무도 그 누구도 모르게 홀로
사흘을 주무시고 세상을 버리셨다

            Ⅴ

빨간 다섯 뿔이 단정한 기린 한 마리
집안을 사뿐히 걸어 다닌다
목이 길어 눕지 못하고
천적의 일격에 살아남기 위해
평생을 서서 잠자야 하는 슬픔 때문에
엄니는 다듬이 위에 서서 당신을 버리고
사십팔 년을 애오라지 이 꽃을 지켜왔던가
울 수 없어 눈귀가 더 밝다는 들판의 기린은
이십오 년을 말없이 산다 하고
울타리 안의 그는 십년이 더 길다고 하나
다리 접고 꽃 굽어보는 여든셋 저 기린은
붉은 석양에 더더욱 고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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