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김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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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9 20:46
저자 : 수진 김선균
시집명 :
출판(발표)연도 : ㆍ
출판사 : 문학광장
나팔꽃
수진 김선균
도시의 후미진 꼭대기 장독대 옆
시커멓게 멍든 사과궤짝에 흙을 담고
몇 알의 까만 씨를 심은 아버지
하늘 가까이서 받아 놓은 빗물을
열 살 먹은 아들의 두 손으로 주게 했다.
진통을 뚫고 나온 파란 떡잎
가는 떨림으로 노랗게 떨어지고
팔 굽힌 가는 줄기를 힘겹게 펴던 날
여리고 파리한 잎을 슬며시 내민다.
아침나절 아버지는 손을 비벼서
하늘길을 꼬아 몇 줄기 걸고는
엷은 미소를 지으셨다.
하루 해는 구멍 난 담장에 걸치고
푸른 잎을 등에 업은 줄기들
하늘길을 한 바퀴나 타고 올라
처마 밑 제비 식구의 저녁상을 탐낸다.
초여름의 하늘이 높던 날
별로 영양가 없을 빗물만 먹고도
온 우주를 품은 보랏빛으로
기적 같은 나팔꽃이 피어올랐다.
아버지와 난 고개를 들어
고마운 웃음을 지었다.
실바람 타고 제비네 강남 길 떠나던 날
제 몸을 담장에 늘어뜨린 나팔꽃은
까만 씨를 열두 광주리에 남기고
제자리를 사랑하는 이웃 분꽃에게 넘겨주었다.
하늘길을 힘차게 타고 오르던 나팔꽃이
그립다. 석양 걸친 하늘길 따라가신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다.
수진 김선균
도시의 후미진 꼭대기 장독대 옆
시커멓게 멍든 사과궤짝에 흙을 담고
몇 알의 까만 씨를 심은 아버지
하늘 가까이서 받아 놓은 빗물을
열 살 먹은 아들의 두 손으로 주게 했다.
진통을 뚫고 나온 파란 떡잎
가는 떨림으로 노랗게 떨어지고
팔 굽힌 가는 줄기를 힘겹게 펴던 날
여리고 파리한 잎을 슬며시 내민다.
아침나절 아버지는 손을 비벼서
하늘길을 꼬아 몇 줄기 걸고는
엷은 미소를 지으셨다.
하루 해는 구멍 난 담장에 걸치고
푸른 잎을 등에 업은 줄기들
하늘길을 한 바퀴나 타고 올라
처마 밑 제비 식구의 저녁상을 탐낸다.
초여름의 하늘이 높던 날
별로 영양가 없을 빗물만 먹고도
온 우주를 품은 보랏빛으로
기적 같은 나팔꽃이 피어올랐다.
아버지와 난 고개를 들어
고마운 웃음을 지었다.
실바람 타고 제비네 강남 길 떠나던 날
제 몸을 담장에 늘어뜨린 나팔꽃은
까만 씨를 열두 광주리에 남기고
제자리를 사랑하는 이웃 분꽃에게 넘겨주었다.
하늘길을 힘차게 타고 오르던 나팔꽃이
그립다. 석양 걸친 하늘길 따라가신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