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시대

홈 > 시 백과 > 시인의 시
시인의 시
 
* 특정 종교나 정치.사상, 이념에 치우친 작품과 다수 회원이 삭제를 요청하는 글은 양해없이 삭제되거나 개인게시판으로 옮겨집니다.
* 저자난에는 이름만 사용해야 하며, 별명이나 아호 등을 사용해 등록자 이름과 저자(시인)의 이름이 달라지면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 모두를 위하여 한 번에 많은 작품을 연속해서 올리는 것은 지양하시길 부탁드립니다.
* 목록의 등록자 이름에 마우스를 놓고 클릭하시면 해당 등록자가 올린 작품을 한번에 조회할 수 있습니다. 
* 검색시에는 리스트 하단 <다음검색>버튼으로 나머지 검색 결과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수의시대

정진용 0 401
저자 : 정진용     시집명 : 계간웹북
출판(발표)연도 : 2012     출판사 : 시산문
수의시대
- 1984.03.19~1986.09.25 / 정진용



1. 프롤로그, 안부
 
가위눌린 하늘, 오라진 산하
오늘도 안녕하신지 안개 바다 밀물지면
GOP 둥둥 떠다닐 내 젊음도 안녕하셨는지
 
이 땅에 태어나
이념 시앗싸움에서 초목의 거름이 된 사람들
푸릇푸릇 아씨 허리 굳건히 지키고 있겠지
 
이 땅에 사는 숱한 사내들이
수없이 생때같은 젊음을 서리서리 풀었어도
우리 아씨 하늘엔 바얌 풍 노래 한결같겠지
 
이 땅의 못난 애비가 내일 믿고 수자리 살았듯
이 땅의 가난한 집 아들도 내일 믿으며
밤마다 철책 어둠 표백하고 있겠지
 
꿈도 꾸겠지, 고구려 같은 사내와
백제 닮은 아가씨가 맞절하는 꿈을 꾸리
그날의 초례청 훔치는 걸레 꿈도 꾸리
 
이 땅의 청동 합환 날까지
이 땅에 살아갈 사내들이 누 떼처럼 몰려가
바람을 부릴 젊음의 유예지, 오늘도 안녕하신지
 

2. 입대

삼월 쌀쌀한 아침에
부모님께 하직 인사 아뢴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라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
 

3. 군용열차

빡빡 밀어 버린 긴 머리
찬바람 속 행진곡에 날리고
호송병 호각소리 날카로운 수자리 열차에 앉아
어머니 눈빛 안타까운 원주에서
봉양, 충주, 증평, 청주, 대전, 논산까지
낯익은 듯 낯선 모습 눈 가득 담고
연무대 노을 속에 청춘의 한 자락을 내려놓는다
 
내 젊음이여 안녕, 굳이
기억하는 사람 없어도 내내 안녕

 
4. 황산벌에서
 
몸 가리는 수의(壽衣),
마음 죄는 수의(囚衣)로 갈아입고
입고 왔던 옷가지 집으로 보낸다
 
조교의 악다구니 따라 포복 앞으로
낮은 포복 앞으로,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황톳길 굴러
길과 도랑에 떨어지는 수류탄 피해
육군훈련소 26연대 침상에 선다
 
숫자 13472312 되어 황산벌 황토
온몸에 바른다 백제의
오천 결사가 그랬듯 살아,
이 땅에 살아
 
 
5. 이동
 
5-1. 북, 동, 북
 
그저 그렇고 그런 집의 그저 그런 아들
이 나라 이등병 되어 군용열차에 오른다
 
밤을 타고 북상하는 열차
대전, 천안, 수원, 용산에 설 때마다
뭐가 잘나도 잘난 사람들 게워 놓고
 
성북역에서 갈아탄 경춘선 열차
성북역 승강장의 고장 난 시계처럼
뭐가 빠져도 빠지는 사람들 싣고 동쪽으로 내닫는다
 
오늘에 속을지라도 내일을 믿는
이등병, 샘밭 보충대에 어버이날 전보 맡기고
군용 트럭에 오른다 소양강 군용선으로 갈아탄다
 
다시 북으로 치닫는 60트럭에 앉아
굽이굽이 산 뒤로 사라지는 길 바라본다
예가 양구다
 
내 젊음을 꽃처럼 바칠
양구다 입이 두 개 있어도 말 못할
양구 땅이다

 
5-2. 백두산 부대
 
안전 교육관에서 들었다
 
총기 자살한 병사의 흐트러진 뇌수,
지뢰 파편이 점점이 까맣게 박힌 가슴,
맞아 죽어 시커멓게 부르튼 입술이
무림 고수처럼 펼치는 전음입밀(傳音入密),
 
박제로 남지 마라
살아 돌아가라
 
 
5-3. 천봉 연대
 
수많은 체질에도 쑥쑥 빠진 신병들
대기병 내무반에 머문다 부르면
부르는 대로 달려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사역을 한다 한가할 때면
딴엔 잘났던 기억이나 뒤숭숭 미래를 나눈다

 
5-4. 도솔산 대대
 
어젠 모래 바람 불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산화(散花)처럼 진눈깨비 날린다
이 오지에 뿌릴 시간이
저 민통선 북방 마을, 해안(亥安)처럼 갑갑한데
진달래나무 연둣빛 애잎이 오늘은,
어버이날이라고 웃는다
 
그래, 이 땅을 밟고 간 잡초
이 땅의 질경이 따르리라
 
 
5-5. 대우산 선점 중대
 
오리 산길을 오리걸음으로 걸어
더플 백 메고 할딱할딱 달리고 달려
몽둥이세례 곁들여 신고식 치르고, 선임이 권하는
위로 한 개비 휴 우 우 긴 숨 섞어 뱉노라면
가슴은 DMZ
 
 
6. 진달래
 
온몸으로 박박 기던 황산벌에서도
살아 흐드러질 날 있다, 던
 
바람 찬 강촌역 벼랑에서도
봄 맞아 옷고름 풀었다, 던 진달래
늘 그대를 생각하마
 
곧 귀향할 사람들이 쫓아다니는
둥글둥글 축구공처럼 구르며

 
7. 회식
 
“국, 국, 국”
철책 투입 신고 마친 뒤
사단장 막걸리에 불콰한 병사가 선창한다
모두 벌떡 일어나 개떼처럼 소리 지른다
 
  “국 쏟고 보지 데고 씹 대주고 뺨 맞고 요사이 긴자꾸가 따로 있더냐 씹에도 문수가 있나 좆 대가리 사이즈가 있나 좆, 좆, 좆 부러진 데 철사 줄 매고 씹, 씹, 씹 찢어진 데 반창고 붙여라······”
 
소리 질러도
고래고래 소리 질러도
철판도 뚫을 봄날 좆심은 팔팔한데
 
삭이지 못한 군기 웩웩 토하며
찔끔, 쳐다보는 도솔산 하늘로
한 잎 푸른 날이 흩어진다
 
 
8. GOP
 
8-1. 철책에서
 
이 땅의 흙이 된 피붙이
칡뿌리, 피죽으로 연명했을지언정
죽창 들고 나섰던 반골 없었고
 
이 땅에 사는 일가붙이
옳거나 그르거나 나랏말씀이면
다 따른다, 는 신원 회보 이르러
GOP에 오른다
 
앞엔 김일성 고지, 모택동 고지, 스탈린 고지
뒤엔 피의 능선, 왼쪽 저 멀리 단장의 능선,
오른쪽 저 너머 가칠봉······
 
산 산 산 산······
 
사방팔방이 산인 이 곳에서
사는 만치 산을 닮으리라
 
 
8-2. 초병의 고백
 
EENT-30 지난 초소에서
투광등(投光燈) 그늘의 풀벌레 소리,
대남 방송 엿보는 나는 관음증 환자
 
쇠심줄처럼 검질긴
졸음 쫓으려 음란 상상을 해도
초소 벽에 종지뼈 찧는 나는,
 
마냥 탄통에 앉아 졸다가도
그 낌새 알아챈 고참한테 욕을 먹어야
잠을 깨고, 얻어터져야 졸지 않는
마조히스트
 
좆으로 밤송일 까도 시간은 간다고
처녀 가슴 같던 탱탱 어둠도 씹쭈구리해져
탈 없이 BMNT-30 넘긴 철책이 고마운 나는
저절로 낙천주의자

 
8-3. 이이제이(夷以制夷)
 
집합, 새벽부터 밀사처럼
전달이 돈다 중대 본부 사각(死角)에 숨은
사격장에 짬밥 순으로 늘어선다 고참의 지랄 좇아
자갈밭에 대가리 박는다 몽둥이가
궁둥이를 파고들고 눈에선 파르르 불꽃 돋는다
 
구타하지 마라, 마라, 말은 많지만
소초장은 병장한테 눈짓하고 병장은
상병한테 눈깔 부라려 사흘돌이로 맞아야
맘 편한 시절, 이이제이 굳건한 곳에서
너나없이 그 법을 지킨다
 

8-4. 보급로
 
부식 추진 나갈 사람,
소대장 물음에 졸병들만
관등 성명 우렁차게 손 든다
 
두어 시간 잤을까, 툭툭
어깨 치는 상황병 손짓에 용수철 튀듯
일어나 보급소로 향한다
 
보급로 온몸에 장마 자국 깊고
 
부식 짊어지고 되오르는
땡볕 가풀막, 길 닦을 생각으로
숨찬 이등병 발걸음 더욱 무겁다

 
8-5. 박제
 
빠삐용 가슴의 문신 짙은 자유를 봤는지
운 나쁜 제비나비를 비닐로 싸서
책갈피 속에 넣고 꾹꾹 다림질하던 사람,
애꿎은 절명을 추억이라고 가져갔는데
지금쯤 빛 고운 박제 보며 이 곳 생각할까,
때늦게라도 나비의 명복을 빌까

 
8-6. 대공 초소
 
주간 근무 말뚝 박고
진중문고 띄엄띄엄 읽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짬은 있듯
가끔씩 밀물지는 안개바다에
은사처럼 마음 풀어놓으며

 
9. 사건 사고
 
9-1. 그날
 
기상, 비상, 전원 진지 투입······
숨찬 비상령 따라 버석버석 눈 비비며
전원 초소로 튀어 든다 뭔 일일까
 
며칠 뒤 북녘 방송에서 그 날을 보여준다
  “저는 22사단에서 근무했던 조준희······ 고참으로부터 모진 학대와 구타 가혹행위를······ 월북하기로 굳게 마음을······ 야간 근무를 마친 소대원이 취침에 들어갔을 때······ 내무반 침상 좌우에 수류탄을······ 대공 초소의 근무자가 응사하는 걸 구르면서······ 3중 통문 자물쇠를 총으로······ 예상 도주로를 따라······”
 
그날, 열다섯 병사가 삼도천을 건넜다
 
 
9-2. 거참
 
차가 장맛비 빽빽한 GP로 들어간다
 
발 빠른 인터폰의 설명,
GP에서 추락사 발생
 
이튿날 소초장이 알려주는
간밤의 일
 
  “한 일병이 비 맞고 화장실 가기 귀찮아서 막사 문 앞에 오줌을 지리다가 상병한테 걸려 몇 대 맞곤 죽었다” 한다
 
 
9-3. 오발
 
제대 일주일 남은 병장이
신병 앞에서 M60기관총을 들고
이렇게 하는 거야 으쓱, 방아쇠를 당겼는데
글쎄, 눈 없는 총알이 신병의 두 다리를 관통했지 뭐야
말년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을 그만 깜박했지 뭐야
 
 
9-4. 충성
 
철책 너머 똑똑히 봐야 한다고
사월 봄날에 불을 놓았는데, 요즘 4·19처럼
불이 붙질 않아 성질 급한 하사관이 솜방망이 들고
여기저기 불붙이러 돌아다니다가 하뿔싸,
지뢰를 밟았단다 사지 뭉텅 잘려 나갔단다
마음 함께 잘린 충성이 버캐 낀 입술로
죽여 달라, 고 했단다
 
지가 무슨 충성한다고······ 병원 다녀온
주임상사 중얼거릴 때 다들 눈만 껌뻑댔다
 
 
10. 파도타기
 
청천벽력 같은 그날부터
딱 사흘만 버티라는 철책에서
아무 일 없이 떠난다 일흔두 시간 안에
펄펄 내려앉을 꽃자리 등지고 밤을 걸어
남으로 간다 시큰시큰 무릎 힘내라
민가 불빛 점점 밝아진다 민가 개 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그동안 세상과 나의 거리는
완전군장 걸음으로 네 시간······ 몇 달 동안
아가씨의 샴푸 냄새 한번 못 맡았는데
 
 
11. 휴가
 
11-1. 위로 휴가
 
철책 근무 고생했다고
바깥바람이나 쐬고 오라기에
집에서 하룻밤 묵고 여기저기 떠돌다
귀대 날짜보다 하루 일찍 돌아왔더니
다들 나 보고 미쳤다고 하던
 
 
11-2. 정기 휴가
 
남들은 갈 곳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다는데 내겐
늘 한겨울 어귀 같았던

 
11-3. 포상 휴가
 
예광탄이 지른 산불 끄러 가서
더덕에 홀려, 소양호 낙조에 홀려
홀로 놀다가 그도 시들해
산을 내려오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불이 있어
툭툭 생솔 가지 휘두를 때
마침 잔불 있을까 둘러보던
중대장 눈에 띄어 다녀온,
못내 부끄러운
 

12. 일탈
 
12-1. 더덕
 
짬날 때마다 수풀 앙가슴에 음전한
너를 찾아 야무진 네 주름옷 바득바득 벗겼다
한입 베어 문 알몸은 생인손처럼 아렸다

 
12-2. 열목어
 
철책의 하루치 땀을 냇물에 풀어놓다가
애먼 열목어 잡았다 사람 뜸한 산골에 살아
도망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매운탕 되는
천성이 짠하다 구름 같은 날 믿으며
철책에 뿌리는 올망졸망 집안 아들의 청솔 시간처럼
 
 
12-3. 음복
 
대항군 되어
서리 무성한 억새밭에서 잠자고
 
새벽 농가 찾아가
어둠 사르는 아주머니께
전투식량 먹을 수 있게 뜨거운 물 좀 주십사, 여쭈니
좀만 기다려라, 불이나 쬐라 하신다
 
아궁이 앞에 앉아
간밤의 한둔 새우등 펴며
가마솥 쇠죽이 풀어놓는 김을 따라
시골집 생각을 솔솔 감는데
 
달그락 소리 부산하던 아줌마
지난밤 제사를 모셨다며 어한이나 하라
음복을 권하신다 냉큼 받아 들이켜니
후끈 빈속 데치는 그 맛,
 
다시없을 어머니뻘 마음 한 사발
 
 
13. 생활
 
13-1. 이병
 
보통 사람이다 보니
가만히 있는 게 불안해서
내무반 바닥을 쓰는데
느닷없이 귀청 때리는 육두문자,
“야, 새꺄 니가 청소할 군번이냐” 
그 생욕을 멍하니 받던

 
13-2. 일병
 
식기 몇 개 후딱 닦아
한겨울 개울물에 헹구고
쩡쩡 깨질 것 같은 손
뜨거운 물에 담그며
철사장 단련하듯 보낸
 
 
13-3. 상병
 
침상에 누워
여유 한 개비 태우며
예까지 온 길 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아득했는지
 
 
13-4. 군대에서 한 것
 
무, 참 많이도 먹었다 때마다
꼬박꼬박 끼어들던 생채나 깍두기, 된장 무국
평생 먹을 것의 반은 군대서 먹었다 어묵이며
동태 또한 그렇다 욕도 지랄같이 처먹고
그렇게 퍼부었다 맞고 때린 것도, 걷는 것도
막일도 그렇게 징글맞게 해댔다
 
 
14. 훈련
 
14-1. 연대 훈련
 
몇 번인지도 모를
고지 공격을 마친다 철모에 구겨 앉는다
판초 우의 뒤집어쓴다 국군 아닌 패잔병처럼 잠잔다
돌아선 애인보다 싸늘한 된장국에 서걱서걱 언 밥 말아 먹고
또 고지를 공격한다 바둑판의 사석처럼

 
14-2. 혹한기 훈련
 
한겨울 거점에 텐트를 친다 교통호를
정리한다 고참들 줄줄이 널브러진
내무반에서 눈치 보는 것보다야 눈 맞은
강아지처럼 뛰는 게 낫다, 생각하면서
반합의 얼어 터진 밥을 먹는다

 
14-3. 수영 훈련
 
이중 철책 작업 후
피서 같은 도하 훈련 틈틈이
가요 ‘대한민국’에 맞춰
군무를 춘다 ‘대한민국’답게

 
14-4. 공지 합동훈련
 
  정찰기가 연막탄을 떨어뜨린다 폭격기가 날아와 폭탄을 쏟아 붓는다 대포가 포탄을 날린다 코브라 헬기가 로켓포를 갈겨댄다 전차가 달려가면서 포를 쏴 댄다 마지막으로 우리 보병이 따콩따콩 딱총을 쏘면서 고지로 돌격한다
 
멀리
단상의 별들이 흐뭇하게 빛난다

 
14-5. 행군
 
  겨울 초저녁 팔랑리 주둔지를 떠난다 산비탈로 접어든다 대암산이 질리도록 풀어놓는 산굽이 감돈다 판소리처럼 지루하게 풀어지는 산굽이 굽이굽이 돌아 걷는다 10분 휴식 시간마다 발바닥을 식힌다 출발 소리에 퉁퉁 부은 발을 얼어붙은 군화 속에 구겨 넣는다 비몽사몽 결에 가오작리 아스팔트길 걷는다 몰려오는 잠을 쫓으려 인생을 정리한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음탕한 소설을 쓴다 그래도 거머리처럼 질긴 졸음에 길 안쪽으로 쫓긴다 맞은편에서 잠에 쫓겨 온 졸음과 부딪힌다 번쩍, 불빛에 걸으면서 잘 수도 있다는 걸 몸으로 깨친다 타박타박 원당리 길을 걷는다 시시한 인생을 또 정리한다 임당리 길 걸으며 발바닥 물집 잊으려 시원찮은 앞날을 생각한다
 
  행군 때마다 인생을 몇 십 번 정리했다 앞날 계획을 그렇게 뜯어고치고 기웠다 몇 트럭의 여자를 겁탈했다 그래도 나아질 것 없는 보병의 행군이다 그래도 걷는다 뾰족한 수 없이 마냥 걷는다 타달타달 걷는다
 
 
15. 작업
 
15-1. 철책에서
 
불모지 작업을 한다 교통호
풀을 베고 배수로를 친다 계단 말뚝 박고
홍수 뒤의 보급로 닦는다 마음 하나
못 닦으면서 허수아비도 손본다
 
 
15-2. FEBA에서
 
누구 말마따나
소총은 녹슬더라도 야전삽은 빛나도록 작업했다
 
 
15-3. 모내기
 
해안 만대리에서
아픈 허리 참으며 모를 심는다
어설픈 내 진주 난봉가를
구성지게 잇던 아줌마, 소주에
국수를 말아 먹던 그녀의 인생처럼
내 손가락도 쓰리다
 
 
15-4. 싸리 작업
 
싸리 자르러 거점에 오른다 낫이야 있지만
가슴처럼 날이 무디다 그냥 맨손으로
싸리를 꺾는다 몇몇은 야전삽으로 싸리의
발목을 끊지만 거의가 맨손으로 억센 몫을 채운다
 
자매결연 학교 학생은 볼 수 있을까
학교 복도에 걸려 있는 군부대 관계자의 사진 속에서
사병의 부르튼 손금을

 
15-5. 이중 철책 공사
 
  가칠봉에 숙영한다 이중 철책 작업을 한다 들꽃이 끊임없이 놓이는 무명 병사 무덤을 지나 일터로 간다 자재 메고 무릎 시큰한 계단을 오른다 땀과 푸름과 콘크리트를 비벼 철책 기둥을 세운다 웬만큼 비가 내려도 작업을 한다 장마 때문에 일이 지연됐을 땐 대남 방송 말마따나 일요일에도 라면 먹고 일한다 작업 뒤엔 대대 병력에 달랑 하나인 샘에 내려가 한 세숫대야 물로 머리감는다 세수한다 발 씻는다 양말을 빤다 저절로 내핍을 배운다 그 해 칠월 야전 막사에는 쉰내, 발 고린내가 전과자 딱지처럼 머물렀다

 
15-6. 제설 작업

쉬는 날이면 눈이 펑펑 쏟아진다
도솔산, 가칠봉으로 가는 보급로의 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치워야 한다 하루 세 번이나
눈을 치우던 날엔 동상에 걸렸다
두 켤레 밖에 없는 군화 때문에
 
 
16. 대암산
 
  여름에도 선선한 용늪 아래 막사에 머문다 일조점호 끝에 족구 한 게임 한다 아침을 먹는다 오전엔 가끔씩 사격을 한다 점심 먹고 땔나무 하러 간다 화목을 메고 돌아온다 더러는 장작을 팬다 더러는 빨래를 한다 더러는 불알 바짝 잡아당기는 샘물에 목욕을 한다 저녁을 먹는다 티브이를 보다 잠잔다 신선 같은 생활이다 가끔 매복 나가는 날이 주사 맞는 것처럼 싫지만
 
 
17. 집으로
 
이만 했으면 됐습니다 홍수 때 무너진
철책 복구 작업 끝날 때까지
전역을 연기하라는 중대장한테
몸으로 때우던 사병은 집에 갑니다, 인사한다
가칠봉, 대우산, 도솔산, 팔랑리, 원당리 거쳐
사단 휴양소를 나선다
 
내 걸어온 길은
굵은 똥 싸는 양반들이 좋아하는 충성도 아니다
없는 사람 듣기 좋은 신성한 의무도 아니다
이 땅에 살아, 이 땅에 살아보려
아득바득 건너온 살여울일 뿐
 
현역 제대가 자랑스럽지도 않고
군역 미필이 부끄럽지도 않은 시절에
내 젊음의 가운데 토막을 바친 양구여,
2년 6개월 7일 동안 내 맘을 가둔 수의여,
920일 동안 내 몸을 감싼 수의여 안녕
영영 안녕

 
18. 제대
 
돌아와 
전쟁 없는 시절에 돌아와
부모님께 인사 여쭙는다
 
다녀왔습니다
제가 바친 푸름만큼
안녕하셨는지요
 
아버지 말씀하신다
그래, 고생했다
 
 
19. 에필로그, 천하제일경
 
아시는지, 내 뜻 아닌 채로
장기판의 말처럼 내달리던 사병이
한 점 평안과 한 평의 평등 평장을
부동 빗돌로 지키는 그  곳을
 
가 보셨는지, 지, 인, 용, 덕······ 그들의 비문처럼
그 몇을 함께 갖추었다는 장군께서
진시황의 도용(陶俑)처럼 도열한 계급 낮은 비석을
죽어서 더욱 낮추 내려다보는 그 곳을
 
알고 싶으신지, 먼저 죽은 병사는 낮은 자리 좁게 서고
나중에 죽은 장군은 높은 자리 넓게 눕는 곳,
계급이 지엄하여 먼저 죽었다고
앞자리 앉지 못하는 천하제일경 그 곳을
 
가보고 싶으신지, 살아 병사는
죽어서도 병사로서 제 계급 굳건히 지키는 그 곳,
살아 장군은 죽어서도 장군 자리 드높게 누리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0 Comments
제목 저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