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시 모음 -김용화

홈 > 시 백과 > 시인의 시
시인의 시
 
* 특정 종교나 정치.사상, 이념에 치우친 작품과 다수 회원이 삭제를 요청하는 글은 양해없이 삭제되거나 개인게시판으로 옮겨집니다.
* 저자난에는 이름만 사용해야 하며, 별명이나 아호 등을 사용해 등록자 이름과 저자(시인)의 이름이 달라지면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 모두를 위하여 한 번에 많은 작품을 연속해서 올리는 것은 지양하시길 부탁드립니다.
* 목록의 등록자 이름에 마우스를 놓고 클릭하시면 해당 등록자가 올린 작품을 한번에 조회할 수 있습니다. 
* 검색시에는 리스트 하단 <다음검색>버튼으로 나머지 검색 결과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짧은시 모음 -김용화

김용화 0 5004
저자 : 김용화     시집명 : 짧은 시
출판(발표)연도 : 2019     출판사 :
딸에게


너는
지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내에게 날아온 천상의
선녀가
하룻밤 잠자리에 떨어뜨리고 간 한 떨기의 꽃





산다는 것은
목을 내놓는 일이다

목을 씻고
하늘을 우러르는 일이다

저녁에 돌아오며
목을 만져보는 일이다


병아리들의 기도

 
거룩하여라,

물 한 모금
머금고

하늘을
우러르는


꼬마 성자들


장길


빚봉수서고 팔려가는소
자운영 꽃 피는 논둑길 건너갈 때
울 아버지 홧병,
쇠뿔 같은 낮달이 타고 있다
한내 장길


뒷걸음 이별


우리 둘은 이별을 마주 보며 뒤로 걸었다
이별이
이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너
너는 나
한 개 점으로 지워질 때까지


능소화
               

가까이 오지 마셔요
이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마셔요

애오라지 단 한 분,
지아비 손끝에서만
피어나는 꽃이랍니다

제 몸에 대이는 순간
그예 당신은
눈이 멀고 말 것이어요





모래톱 위에 발 벗어 놓고 누구를 찾아갔나
가을 속 여자



고욤꽃 아래서

 
노파와 개가 마주 앉았다

복실아
……

심심하지?
……

그래,
산다는 게 그런 거란다
……

고욤꽃이 지고 있다



그 겨울

 
겨우내 하얀 눈이 쌓이는
고향 집 삼밭
캄캄한 구덩이 속에서는
샛노란 무 싹들이 세상 소식 궁금하다고
기지개를 켜며
새록새록
고개를 밀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첫눈


저 하얀 눈
너의 긴 속눈썹 위에 사뿐 앉았다
사라져 버리던 눈
눈 깜짝할 순간만이라도 난 널
잡아 놓고 싶었었네
내 눈 속에





장다리꽃 화안한 봄날 나울나울 흰나비 한 마리
먼길을 날아서 갑니다
민달팽이 한 마리 더듬이를 세우고 뭉툭한 배를
밀면서 갑니다


경칩(驚蟄)


보리싹에 파릇이 젖물이 돈다
얼음장 들추면
고물고물 알 보자기 속
개구리알들이
결빙의 고요를 깨고 눈을 뜬다


목련         


화들짝-
꽃망울 터트려 놓고
알종아리 파들거리며 하늘 아래 까치발 선
막무가내
4월의
불량소녀들!


자목련


하늘나라로 간 소녀들, 하늘나라는
심심하고 답답해
밤사이 어른들 몰래 놀러 나왔다
담장 위에 벗어 놓고 간
어여쁜, 꽃신


봄밤


보리술 씬냉이국에
그대 목소리 동동 띄워 맑은 귀로
담아내는

청복의




달항아리


그대 떠나고 빈 마을 달이 올랐다

비움으로
가득 찬

백자 달항아리



사잣밥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공기
문밖에서 비 맞고 있다

젊어서 혼자되어
비를 맞더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비를 맞는다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



정적


정조준한 포수의 총부리 위에
노랑나비 한 마리
사뿐-
앉는다



적란운 뜨면


자벌레 한 마리 도르르 몸을 말아 풀밭에 떨어진다
연잎 위에 청개구리 숨 할딱대다 물속으로 뛰어든다
울담 넘던 나팔꽃 덩굴손이 긴 촉수를 세우고 있다


한낮


눈부신 유월의 하늘

대지의 중심 깊숙이
뿌릴 박고
환희의 절정에서 숨죽이는 나무들

탁-

푸른 열매 하나
우주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눈길


어둑새벽 눈길 위엔
시묘 살던 서당 집 훈장 할아버지 짚신 발자국과
석유등 밝히고 새벽예배 간
천안할머니,
조그만 신발 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모과

 
못생긴 모과 하나

방안 가득
눈물 같은 향을 내더니
썩어가며 더욱 깊어지누나

암꽃처럼 피어나는
반점

그대,
누워서도
성한 우리를 걱정하시더니

 

저 하늘 아래에는


저 하늘 아래에는 운동모자 꾹 눌러쓰고
코스모스 꽃길
말없이 걸어가는 소년과

하얀 팔 내놓고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갈래머리
소녀가 있었다

 

노파와 개

 
노파가 죽었다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흰둥이
혼자

주검 곁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와 거위


햇빛 재글거리는 한낮
인적 끊긴
시골길
 
유모차를 미는
할머니
굽은 등을

거위 한 마리
뒤뚱대며
따라가고 있다



불두화 피는 밤

 
워낭 소리 무심히
빈 뜰을
채우는 밤

몽실몽실
달 아래
불두화 벙그는 소리

외양간 소가
귀 열고
가만-

눈 감으시다



너를 기다리며


너를 기다리기
백 년이
걸린다

너를 잊기까지
죽어서
또 백 년이
걸린다

나는 산정에 선
한 그루
나무,

하늘이 푸르다
 
 
산길에서


나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깊은 산 외딴 길섶에
한 송이 이름 없는 작은 꽃으로 피어나리라
혹여, 그대가 한 번쯤
하찮은 실수로
바람처럼 내 곁을 머뭇거리다
지나칠 때
고갤 꺾고 꽃잎 한 장 바람결에 날려 보리라


먼길


한 사날-
진달래꽃 길을 따라 혼자 걸어서
그대 사는 먼 곳 외딴 그 오두막 찾아가 보고 싶네
폭설처럼 꽃 지는 저녁
길 위에 엎어져 영영 잠들어도 좋겠네
꽃신 한 켤레
허리춤에 달랑 차고


시인


전생에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죄로 눈이 멀어
평생 지팡이 하나로 더듬거리며 길 찾는 사람
제 몸도 잊은 채
등불 없이 밤길도 가고 하늘길도 다녀오는
시인아,


시의 길


가슴에 성냥불을 긋고 연기 없이 타오르는 일
꼭두새벽 숫눈길 위에 발자국 한 개 찍는 일
날이 새면 
밝음 속에 지워질
시여, 시인이여
0 Comments
제목 저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