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공

홈 > 시 백과 > 시인의 시
시인의 시
 
* 특정 종교나 정치.사상, 이념에 치우친 작품과 다수 회원이 삭제를 요청하는 글은 양해없이 삭제되거나 개인게시판으로 옮겨집니다.
* 저자난에는 이름만 사용해야 하며, 별명이나 아호 등을 사용해 등록자 이름과 저자(시인)의 이름이 달라지면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 모두를 위하여 한 번에 많은 작품을 연속해서 올리는 것은 지양하시길 부탁드립니다.
* 목록의 등록자 이름에 마우스를 놓고 클릭하시면 해당 등록자가 올린 작품을 한번에 조회할 수 있습니다. 
* 검색시에는 리스트 하단 <다음검색>버튼으로 나머지 검색 결과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나무공

hanwori 0 17497
저자 : 기형도     시집명 : 입 속의 검은 잎
출판(발표)연도 : 1989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나무공

                        기형도


가까이 가보니
소년은 작은 나무공을 들고 서있다.
두 명의 취한 노동자들, 큰 소리로 노래부르며 비틀 비틀
이봐,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죽어 있는 것뿐, 이젠 자네 소원대로 되었네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주위의 공기가 약간 흔들린다.
훨씬 독한 술이 있었더라면
좀더 슬펐을 텐데, 오오, 그에 관한 한 한 치의 변화도 용서 못해
소년이 내게 묻는다.
공원(公園)은 어두운 대기 속으로 조금씩 몸을 숨긴다.
그 사내는 무엇을
슬퍼하는 것일까요, 오래 앓던 가족 때문일까요
나의 이 작은 나무공
밖은 너무 어두워, 둥근 것은 참 단순하죠
나는 입을 열 수 없다.
말이 되는 순간, 어떠한 대답도 또 다른 질문이 된다.
네가 내 눈빛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차라리 저녁에 너를 만난 것을 감사하자.
어느 교회의 검고 은은한 종소리
행인들 호주머니 속의 명랑한 동전소리
모든 젖은 정신을 꾸짖는
건조한 저녁에 대해 감사하자, 소년이여
저 초라한 가등(街燈)들을 바라보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대낮까지도 고정시키려 덤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이지.
나의 꿈은 위대한 율사(律士), 모든 판례에 따라
이 세상을 재고 싶어요, 나는 매일같이 일기를 쓰죠
내가 아저씨만한 나이라면 이미 나는 법칙의 사제(司祭)
움직이면 안돼, 나는 딱딱한 과자를 좋아해
이건 나무
소년은 공을 튕겨본다. 나무공은 가볍게 튀어오른다,
엄청나게 커지는 눈, 이건 뜻밖이야
그러나 소년이 놀라는 순간
나무공은 얘야, 벌써 얌전한 고양이처럼
한 번 놀란 것에 더 이상 놀라면 안돼
그건 이미 나무공이 아니니까
그 취한 사내들은 어디로 갔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던
소년도 재빨리 사라진다. 아저씨는 쓸모없는 구름같아요,
공원은 이미 완전한 어둠
한 개 둥근 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서로 다른, 수백 개 율동의 가능성으로 들려오는
이곳. 견고하게 솟아오르는, 소년이 버린 저 나무공.
0 Comments
제목 저자(시인)
게시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