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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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poemlove 1 29897
저자 : 김수영1     시집명 : 거대한 뿌리
출판(발표)연도 : 1974     출판사 : 민음사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1 Comments
가을 2006.04.05 11:50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다. 시인은 사라져 버린 왕조의 궁궐을,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둘러보았고, 그 부근에서 설렁탕을 먹었던 모양이다. 또한 그때 그는 이 일체의 일정에 대해 까닭 모를 짜증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짜증 또는 분개는 사라진 왕조의 우울한 유물인 궁궐의 스산함과 설렁탕의 맛없음에 대해 일차적으로 표출된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분노가 특히 후자에게 더 공격적임을 스스로 분석해 내고, 자신의 옹졸함과 비겁함에 대해 이차적으로 분개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체질적으로 본질을 우회하고 마는,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을 단지 편리함과 심리적인 안정 때문에 물고 늘어지는 나약한 지식인의 속성에 대한 짜증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조차도 사실은 비겁함과 옹졸함의 발로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시인이 진단한 자신의 옹졸함은 뿌리가 깊은 것이다. 자신에 대한 한없는 힐난에 잠겨들지 않고, 그 뿌리를 짚어가며 사회적, 현실적인 문제로 한 걸음씩 다가서는 비판적 지성의 발길에 이 시의 힘과 재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의 자유에 대하여, 월남파병에 대한 태도표명에 대하여,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전쟁 때의 수모에 대하여, 이제 시인은 더없이 냉정하게 자신의 태도를 비판한다. 이윽고 그의 자기비판, 또는 자기진단은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라는 표현에 귀결되며, 그것이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라는 단정에 이른다. 결구 `모래야 나는 얼만큼 작으냐'는, 일상의 작은 행동을 깊이 파고들어 시인이 이른 자기성찰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무서우리 만큼 철저하게 수행되는 이 시의 자기비판에서 우리는 시에서 흔히 목도할 수 있는 자기 미화와 과시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이와 같은 작품에서 우리는 시가 진정한 내면의 탐색과정임을 느낄 수 있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시인 김수영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심을 가졌느냐보다는, 얼마나 치열한 정신의 소유자인지를 더 잘 알게 된다. 자신에 대한 냉정한 태도는, 바람직한 경우, 세상과 삶에 대한 엄정한 태도에 곧바로 이어진다. 이 시는 바로 그렇다. [해설: 이희중]
제목 저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