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역

홈 > 시 백과 > 시인의 시
시인의 시
 
* 특정 종교나 정치.사상, 이념에 치우친 작품과 다수 회원이 삭제를 요청하는 글은 양해없이 삭제되거나 개인게시판으로 옮겨집니다.
* 저자난에는 이름만 사용해야 하며, 별명이나 아호 등을 사용해 등록자 이름과 저자(시인)의 이름이 달라지면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 모두를 위하여 한 번에 많은 작품을 연속해서 올리는 것은 지양하시길 부탁드립니다.
* 목록의 등록자 이름에 마우스를 놓고 클릭하시면 해당 등록자가 올린 작품을 한번에 조회할 수 있습니다. 
* 검색시에는 리스트 하단 <다음검색>버튼으로 나머지 검색 결과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정주역

저자 : 이장욱     시집명 :
출판(발표)연도 :     출판사 :
정주역

                                    이장욱


  이미 너도 놓여 있는 궤도를 따라가는 여행. 나와 같은 궤도로, 너도 핑핑 돌고 있지.

  역사를 나오면 어디든 사람들이 보이고, 사람들도 또 가판대에서 석간을 살 뿐. 그걸 깨닫기 위해,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기차에서 보냈다.
  석간 기사 안을 소리 없이 통과하는 내장산행 막차.

  行間 속으로 들어가면 뭐가 보인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신비주의는 삶을 유연하게 만들지. 그런데 이를 어째. 여긴 왜 아무것도 없는 거야. 곁길. 혹은 길 바깥만 있네.
  가령 사슴 싸롱. 정주 여인숙.

  그 뒷골목. 내 사랑.
  그대와 청소년 금지 구역에 들어가는 게 목표였던 아, 그리운 한시절. 금지된 저 너머에서만이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믿던 때. 근데 믿음이 생을 망쳐요,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종말이지.

  종말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온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순간에, 그 사랑이 끝이었어. 이를 어째, 여긴 또 왜 아무도 없는 거야
  온통 비어 있네. 내장산행 막차는 떠나고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없는 몇 편의 드라마를 석간 신문은 보여 주는 것이다. 가령 사회면, 애인을 살해하고 자살한 朴某氏(29)의 1단짜리 평생.
  내장산.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는 2면.
  지워진 생애들이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될 때, 나는 신문의 시학을 외경에 가까운 심정으로 읽는다. 아아, 이게 해탈이군.

  물론 아무도  行間은 읽어주지 않는다. 뻔한 <사이>들만 창궐하는 정주역 부근. 허리를 껴안은 저 남녀들은 모두 노골적이다. 뼈가 다 보인다. 하지만 오늘은 저 흰 뼈들로써 아름다우나니, 저기 아득히 손 들고 하늘을 우러르는 겨울 나무들.

  용서해 줘. 나는  行間만으로 너를 이루려 했지. 누군가 키 작은 시계탑에 기대 길 끝을 보고 있다. 그를 실루엣으로 만드는, 모텔 캘리포니아, 라고 적힌 붉은 네온.
  사람들은 신문을 접어들고 정류장을 떠난다. 막차는 이미 지나갔다.

  다만 저무는 어느 날, 나는 결국 안개 낀 내장산을 흘러갈 것이다. 이기적인 몸, 어디다 부리고 보면 제일 편한 곳이었지. 새벽의 자욱한  行間을, 나는 안개가 되어 거니는 것이다
0 Comments
제목 저자(시인)
게시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