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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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8 12:47
저자 : 김시천
시집명 :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출판(발표)연도 : 2003
출판사 : 내일을여는책
피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
김시천
피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몸이 살살 가려워진다 이른 봄날 논둑 길에 피어오르던 아지랑이 같은 어린 시절 동갑내기 계집아이의 수줍은 웃음소리가 생각나고 군침 도는 얼큰한 김치 찌개에 술 한 잔이 생각난다 피리 소리에서는 앞산 양지 녘에 금잔디 이불 덮고 잠드신 할아버지 기침 소리가 정답게 묻어 나오고 지게 목발에 장단 맞추어 불던 산골 아이들의 풀피리 소리가 필리리 필리리 달음박질친다 피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재 넘어 잔칫집 사립 너머로 어쩌다 얻어먹던 빈대떡 한 쪽에도 함박만하게 입을 벌리고 좋아하던 때묻은 소맷자락의 동무들 생각이 나고 밭둑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로 마른 목을 축이던 턱수염 난 이웃집 아저씨 질퍽한 노랫가락이 생각난다 생각이 난다 생각이 난다 피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 생각이 난다 떠들썩한 시골 장터가 생각이 나고 장마 때면 더욱 장하게 흘러가던 도도한 강줄기가 생각이 나고 굽이굽이 강물을 끼고 돌며 어깨 장단 들썩이던 백두대간 숨 가쁜 산맥들이 생각난다 그 작은 몸집으로 어쩌면 그리도 씩씩한 소리를 내는지, 방귀 뀌는 소리 낸다고 웃고 도망가는 아이들에게나 내노라 하는 달인에게나 똑같이 제 몸을 내어주고 몸값에 계급을 두지 않는 그래서 그저 주머닛돈 정도면 족한 저 무욕의 샘에서 솟는 피리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늘도 분주하게 길을 가고 있는 너 아니면 나 같은 수많은 우리들 생각이 난다 그저 흔하여 이름 없고 힘없는 풀피리 같은 우리들이 생각난다 그렇게 천 년을 이어가는 우리들이 생각난다
김시천
피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몸이 살살 가려워진다 이른 봄날 논둑 길에 피어오르던 아지랑이 같은 어린 시절 동갑내기 계집아이의 수줍은 웃음소리가 생각나고 군침 도는 얼큰한 김치 찌개에 술 한 잔이 생각난다 피리 소리에서는 앞산 양지 녘에 금잔디 이불 덮고 잠드신 할아버지 기침 소리가 정답게 묻어 나오고 지게 목발에 장단 맞추어 불던 산골 아이들의 풀피리 소리가 필리리 필리리 달음박질친다 피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재 넘어 잔칫집 사립 너머로 어쩌다 얻어먹던 빈대떡 한 쪽에도 함박만하게 입을 벌리고 좋아하던 때묻은 소맷자락의 동무들 생각이 나고 밭둑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로 마른 목을 축이던 턱수염 난 이웃집 아저씨 질퍽한 노랫가락이 생각난다 생각이 난다 생각이 난다 피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 생각이 난다 떠들썩한 시골 장터가 생각이 나고 장마 때면 더욱 장하게 흘러가던 도도한 강줄기가 생각이 나고 굽이굽이 강물을 끼고 돌며 어깨 장단 들썩이던 백두대간 숨 가쁜 산맥들이 생각난다 그 작은 몸집으로 어쩌면 그리도 씩씩한 소리를 내는지, 방귀 뀌는 소리 낸다고 웃고 도망가는 아이들에게나 내노라 하는 달인에게나 똑같이 제 몸을 내어주고 몸값에 계급을 두지 않는 그래서 그저 주머닛돈 정도면 족한 저 무욕의 샘에서 솟는 피리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늘도 분주하게 길을 가고 있는 너 아니면 나 같은 수많은 우리들 생각이 난다 그저 흔하여 이름 없고 힘없는 풀피리 같은 우리들이 생각난다 그렇게 천 년을 이어가는 우리들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