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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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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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마

가을 7 5782
저자 : 신기섭1     시집명 : 2005 신춘문예 당선시집
출판(발표)연도 : 2005     출판사 : 문학세계사
나무도마

                          신 기 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7 Comments
이승복 2009.01.05 21:55  
신기섭1 님이 인기 시인반열에 올라 들어와 읽고서 "좋은시 잘 읽고 갑니다." 라고 써놓고, 다시 들어와 약력쪽에 눙을 돌리니 26세 나이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셨네요. 아직 너무나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신 시인님을 생각하니 슬퍼집니다. 신기섭 시인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승복 2009.01.05 22:06  
<신기섭씨 시소개글 1>
신기섭(25)씨는 공고를 졸업했고, 쇠 공장에서 일했다. 다들 죽네 사네 하던 1997년이었다. 속절없이 고향으로 떨려나간 그는, 철 든 이래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와의 생계를 막일로 이었다. 그가 말하는 '가족'은 그리 따스한 어감의 단어가 아니었다. “사연이야 많죠… 그게, 네, 뭐, 그랬어요.” 신기섭 시인이 ‘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한 인터뷰다.  1년 후인 2005년 12월 4일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도시의 옥탑방처럼 외롭고 쓸쓸했던 시인은 한 마리 극락조가 되어 이 생을 너무 쉽게 탈출하였다.  ‘미친 듯이 기뻐 보이는’ 눈이 내리는 날, 망루 같은 옥탑방 앞에 발자국을 새기고 싶다던 그는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눈이 소복이 쌓인 옥상에 <분홍색 흐느낌>(문학동네.2006)만 물감처럼 뿌려놓고 간 시인이 극락조화가 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빈 방, 탄불 꺼진 오스스 추운 방,/나는 여태 안산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며칠 전 당신이 눈을 감은 아랫목에,/질 나쁜 산소호흡기처럼 엎드려 있어요/....../불현 듯 오래 전 당신이 하신 말씀; 기습아,/인제 내 없이도 너 혼자서 산다, 그 말씀,/생각이 나, 그때는 내가 할 수 없었던,/너무도 뒤늦게 새삼스레 이제야/큰 소리로 해보는 대꾸; 그럼요,/할머니, 나 혼자도 살 수 있어요,/살 수 있는데,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눈치 없는/눈발/몇/몇,”(‘뒤늦은 대꾸’중) 단 하나의 혈육이었던 할머니마저 잃은 시인에게 도시의 겨울은 숨쉬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외로움과 그리움의 눈발이 시인의 얼굴을 타고 눈물로 흘러내립니다. “이 밤 마당의 양철쓰레기통에 불을 놓고/불태우는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 /....../이제는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검은 하늘 가득 분홍색을 죽죽 칠해나간다/값싼 외투에 깃들어 있는 석유 냄새처럼/비명의 냄새를 풍기는 흐느낌/확 질러버리려는 찰나! 나의 몸속으로/다시 돌아와 잠잠하게 잠기는 분홍색 흐느낌/분홍색 외투의 마지막 한 점 분홍이 타들어가고 있다”(‘분홍색 흐느낌’중)
이승복 2009.01.05 22:09  
<신기섭시인 시소개글 2>
겨우내 끌어안고 잤을 할머니의 외투를 꺼내 태우는 시인의 등이 물고기처럼 파닥거립니다.  그리움의 체취를 지우려는데 병꽃나무처럼 붉어진 마음이 죄스러워 마냥 눈물이 나옵니다.  시인에게 할머니를 제외한 가족의 존재는 인터뷰에서처럼 따스한 느낌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가 보는 <동물의 왕국> 속; (뱀이 뱀을 먹으며 죽어간다/....../천천히 먹어치우며 가는 몸은 멀고 먼 길이다/고독한 길 뱀은 자꾸 이빨을 박으며 간다/독은 길을 따라 몸속으로 서서히 퍼진다/....../서로 다른 끝을 보며 스쳐가듯 하나가 되는 고통 속/다시 슬그머니 눈을 뜬 뱀의 눈빛이 깊어졌다/함께 가자,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뱀은 운다”(‘아버지와 어머니’중) 서로를 먹어가면서 같이 죽어가는 뱀을 통해 평탄하지 않은 가족사를 예측하게 됩니다.  ‘함께 가자’고 했던 그 다툼의 종말이 혹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모두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저마다 간격을 두었지만 서로의 핏물이/커튼처럼 그 간격 꼼꼼히 닫아주었다/....../이제는 피로써 서로에게 스밀 수 있다는 걸/딱딱하게 굳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그들은 눈을 감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 순간/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그들도 이 생에서/눈을 뜨고 가족사진을 박는다”(‘가족사진’중)
끝내 해결하지 못한 가족의 비극은 시인을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는 난파선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불행한 가족이 너무 많아서 등대와 같은 십자가 불빛은 불야성을 이루는가요.
“그는 또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노를 젓는다/여자의 몸이 방바닥을 휘젓는 소리/그릇들이 난파되는 소리 비명 소리 속으로/콸콸 물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그는 거친 뱃사람인 것이다 그러나/한 번도 갑판에 올라본 적 없는 선장/....../해가 저물고, 그의 배가 여자의 골짜기 끝에 정박했던 것이다/흘러간 것들을 다시 건져 올라온 그가/어딘지 모를 먼 곳으로 항해를 시작한 밤/물소리는 끝이 없고/도대체 저들은 어디까지 흘러간 것일까/귀를 막고 창문을 내다보면 너무 많은/등대의 불빛, 불빛들”(‘등대가 있는 곳’중)
골목길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나무도마는 시인이 살아온 스무 여섯 해 상처의 무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찌른 사람이나 찔린 사람이나 똑같이 상처를 입은 채 주름진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게 인생인가요.
이승복 2009.01.05 22:12  
<신기섭시인 시소개글 3>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너의 몸 그 움푹 팬 상처 때문에/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나무도마’중)
어린 나이에 환란을 맞아 쇠공장에서 일했던 시인은 그러나 강철대신 나무를 연마했나 봅니다.  아니 나무에서 피어나는 환한 꽃을 갈고 또 갈고 싶었나 봅니다.
“공장 다니는 친구 하나 연삭기에 코가 스친 순간/얼마나 깊이 다쳤나 슬쩍 코끝을 들어보았다고/코가 얼굴에서 뒤꿈치처럼 들렸다고 피가/터진 그의 얼굴이 이 저녁의 화단 안;/시름시들 숨이 멎어가는 저 붉은 極樂鳥花 같았겠다./날아오를 새의 형상이라는 꽃, 그러나 얼굴이 찢어져 있어/폭삭 주저앉은 새의 앉음새를 닮은 꽃, 느닷없이/세찬 바람에, 혹은 떼를 지어 지나가는 죽은 새들의 혼에/꽃 花자를 지우고 속박에서 벗어난 듯/오롯하게 몸을 세우고 있는 한 마리 極樂鳥,”(‘극락조화’중)
꽃에게서 꽃을 떼어냈더니 한 마리 새가 파드득 날아갑니다.  새는 그가 살았던 옥탑방 흰 눈 위에 분홍색 눈물 몇 방울 떨어뜨려 한 떨기 꽃을 다시 피웁니다.  영원히 지지 않을 불멸의 꽃이기에 이제 더 이상 흐느낄 일도 없을 것입니다.  소백산 죽령에 병꽃나무 피면 마음 붉어지고, 이화령에 사과꽃 피면 다시 늘 그리워 질 테니까요.  희고 붉어서 분홍빛 된 마음을 당신의 추모1주기에 바칩니다.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fargo3@naver.com
[출처] 분홍색 흐느낌, 신기섭|작성자 카라쿨리
이승복 2009.01.06 11:23  
<문태준님의 글>
 
시에는 눈동자가 있다 신기섭 시인이 생전에 쓴 시에는 눈동자들이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빛난다
시집을 펼치거나 덮을 때 "투명한 발이 달린 눈물들이 기어나온다" 읽는 사람에게도
통증이 온다 저곳에 그가 인공눈물을 사들고 비명 속을 절뚝절뚝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모든 상처와 광풍을 황홀하다고 담대하게 말한다
고통의 품에 오래 안겨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대긍정이 그의 시에는 있다
궁곤을 환락으로 바꿔놓는 힘이 있으니 놀랄 일이다
그는 스물 여섯 해의 짧은 생을 살고 갔다 너무나 애석하다 몸은 큰 강을 건너갔지만
바와 바람에도 씻기지 않을 언어의 비석이 세상에 남았다 이 비석에 꽃을 바친다

-문태준 시인-
이승복 2009.01.06 11:41  
<故 신기섭시인님의 스물여섯해의 짧은 일생에 읊은시 20편을 아래에 올립니다>

*가족사진, 나무도마, 등대가 있는 곳, 울지 않으면 죽는다는 2005 신춘 당선 시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했으나 2006년 12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스물여섯 해 짧은 생을 마친, 신기섭 시인.
그의 시들은 “엄마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 신생아”가 “나에게 눈알을 달아준”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세월의 상처들, 그 할머니마저 보내고 홀로 남은 뒤의 흐느낌으로 슬프다. 또 그 슬픔을 삭여 추억으로 안으려는 안간힘으로 고통스럽다. 시마다 촘촘히 새겨진 ‘죽음’의 서정들은 그 슬픔과 고통을 이겨보려는 극한의 단련이었을까.
시인에게 할머니는 사실상 유일한 혈육이었다. 할머니의 노동으로 시인이 컸고, 그의 노동으로 당신을 부양했다.(‘안개’는 그와 할머니의 일상의 고단함과 슬픔이 절제된 시어로 빚어진 절창이다.) 그에게 모든 ‘엄마’는 ‘짧은 비명’일 뿐, “엄마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할머니”였다. ‘이제 혼자 살라’며 떠나버린 할머니의 빈 자리에 앉아 시인은 이렇게 혼잣말한다. “할머니, 나 혼자도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는데,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눈치 없는// 눈발// 몇// 몇,”(‘뒤늦은 대꾸’)
혼자 살 수 있다고 한 것도, 추억의 힘이다. ‘추억’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산소호흡기 거두고 헐떡이던 할머니를 닮은 꽃의 향기를 맡는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속을 떠도는 향기,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 할머니의 몸이 내 몸속에서 천천히 숨쉰다.”
명당자리 포기해서 집안이 기울고 병든 자식을 낳더라도 “물과 무덤이 만나는 사랑을 생각”(‘무덤’)하는 이 질긴 집착은 그가 견딘 외로움의 그늘이다. 또 “눈물 흘릴 구멍하나 없”이 상처에 상처를 얹으며 살다가 그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하면 버려지는 (‘나무도마’) 그 쓸쓸함이다.
고통과 고독으로 씻기고 단련된 시선이 바깥으로 향할 때 세상은 연민과 애정으로 투명하다. 이웃 건물 창문 너머에서 자위하는 중년 남자의 모습에서 “접힌 가슴살 옆구리살들 제 몸을 때리며 날아가려는 새의 날개”(‘고독’)짓 같은 슬픔을 본다. 공장에서 코를 다친 친구의 상처 자국에서 꽃도 보고 새도 보고, “피숨을/ 내쉬었다 들이마실 때마다 이승을 저승이게끔/ 느끼게 하는 노을”을 본다.(‘극락조화’) 시인은 그래서, 삶의 무거움은 “상투적이지만(…) 상투적이라 말하지 않기로 한다”(‘이발소 가는 길’)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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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엄마

여자는 웃고 있다
한 장의 잎처럼 붉게 물든 물 속에 가라앉아
화분 밑 바닥에서 피를 다 짜낸 뿌리처럼 하얗게
이를 들어내고 웃고 있었다
붉은 잎이 흘러 넘치는 소리로 부서지는 소리로
꽃 지는 구경 오라 사람들 불러모은 여자
눈을 뜨고 웃고 있었다
도마뱀이 꼬리를 끊고 달아나듯
장정들의 손에 붙잡히자 제 팔뚝살을 끊어낸 여자
욕조 속에서 너무도 흐물흐물, 웃고 있었다
그렇게 후련하게 꽃을 피운 듯
피 한 방울 없이 하얗게 부풀어 있었다
누군가 욕실 거실에 새겨진 그 글씨를 읽었다
내 배속에 네 핏덩이가 갓 태어난 여아의 그곳처럼
손목의 상처는 너무도 깨끗했고, 평화로웠고
사랑을 버리기 위해 스스로 그은 상처는
사랑할 때의 속옷처럼 수줍게, 반쯤 뼈를 들어냈다
나는 사진을 찍고 기록을 해야 한다
붉은 물 속에서 여자는 영정 사진처럼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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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구름도 시름시들 늙어 아프면
땅바닥에 내려와 눕습니다
할머니 정거장에서 당신을 기다리며
나는 그 늙은 구름들을 묻을 땅을 파고 놀았습니다
십년을 그랬습니다
어느덧 할머니 당신이 정거장에서 나를 기다리며
그 늙은 구름들이 묻힌 땅을 밟고 서 계십니다
오늘은 몇 박스나 팔았느냐
몇 박스의 땀을 흘렸느냐
아직 일러요 요즘은 마진도 하나 안 남아요
할머니 이제 마중 나오지 마요
나도 이제 스물셋이에요
어쩌면 내가 묻어준 그 늙은 구름들 속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몇 박스의 꿈들도 묻혔나 봅니다
할머니 당신이 이토록 작은 몸 웅크리며 떨고 있습니다
이제 마중 나오지 마요
나도 이제 어른이에요
그 늙은 구름들을 묻은 정거장 담벼락 아래
할머니와 나는 맞담배를 태우고 오늘도
집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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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목련을 보러 나온 밤의 옥상,
바로 앞 건물의 반쯤 열린 고시원 욕실 창문 너머 중년 남
자가 자위를 하고 있다.
옥상에서 장대하게 커올라온 주인집 목련나무, 나도 환한
목련들도 남자를 훔쳐보는 것이다.
남자의 비대한 몸 전체가 붉다.
손에 잡혀 한참 만에 커진 자지가 가장 붉다.
벽을 짚고 있는 다른 한 손은 거미처럼 곤두서서, 천천히
가슴으로 건너와 목을 타고 오른다.
가슴을 폈다가 오므릴 때마다 파다닥파다닥
접힌 가슴살 옆구리살들 제 몸을 때리며 날아가려는 새의
날개같이 슬퍼 보였다 
점점점 핏줄이 몰려드는 中心,
아주 한참 만에 빳빳해진 그 끝에서 그러나 찔끔, 피어나
진득하게 맺혀 있는 중년의 汁(즙),
남자는 그만 욕실 바닥에 쪼그려앉고,
이 밤에도 손을 뻗어 만져보는 목련꽃의 목, 꽃을 보내기
위해 어제보다 더 흐물흐물 젖어 있다.
귀를 기울이니 큰 물소리가 들린다.
고시원 욕실의 남자는 비누거품을 풀어 몸을 씻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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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가는 길

손등에 글씨를 쓰고 날갯짓을 한 문창과 동생,
몸이 무거운 새* 그 날개에 남겨진 글씨; 삶이 무겁다
상투적이지만…… 이발소를 찾아 가는 이 저녁, 삶이
무겁다 벌써 초겨울 낙엽 깔린 佛光洞 골목,
가슴을 내놓고 박수를 치는 여자; 이제 두 돌이 지났다고
많이 컸다고…… (내 눈엔 보이지 않는 무게) 죽은 아기가
크고 있다 나날이 커질 무게, 행복하고 불행한 무게.
그나저나 이발소는 보이지 않고, 제 똥 보고 좋아라 하는
변비 환자같이 떨어진 무게를 굽어보는 홀가분한 가로수들,
처럼 잘라달라고 할까? 뜨거운 이발소 수건에 덮여
벌겋게 익을 얼굴 하얀 거품이 발린 무게 덩어리.
이발사는 칼을 들고 나를 내려다보며 말하리라, 눈 감으세요.
그러나 얼마 만에 와보는 이발소인데 어둡고 한산하다.
의자에 앉아 이발소의 꽃, 달력 속 벗은 여자를 바라본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발기하는 몹쓸 무게 순간
대문처럼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전신거울, 거기
환하게 나타나는 붉은빛 통로! 어서 건너오라고
내게 손짓하는 여자! 잘못 온 길인데 제대로 온 길같이
설레다 머릿속의 무게들이 가볍게 떨리고 온몸 가득
퍼져나가는 (((떨림))) 천천히 입이 벌어지고, 삶이……
상투적이라서 말하지 않기로 한다.
 
* 몸이 무거운 새 : 신기섭 시인의 추모 시집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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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억

봄날의 마당, 할머니의 화분 속 꽃을 본다
꽃은, 산소호흡기 거두고 헐떡이던
할머니와 닮았다 마른 강바닥의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헐떡이는 몸의 소리
점점 크게 들려오더니 활짝
입이 벌어지더니 목숨을 터뜨린 꽃,
향기를 내지른다 할머니의 입속같이
하얀 꽃, 숨쉬지 않고 향기만으로 살아 있다
내 콧속으로 밀려오는 향기, 귀신처럼
몸속으로 들어온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속으로 떠도는 향기,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 할머니의 몸이
내 몸속엣 천천히 숨쉰다
빨랫줄 잡고 변소에 갈 때처럼
절뚝절뚝 할머니의 몸이 움직인다
내 가슴속을 밟으며 환하게 웃는다
지금은 따뜻한 봄날이므로
아프지 않다고, 다 나았다고
힘을 쓰다 그만 할머니는 또
똥을 싼다 지금 내 가슴 가득
흘러넘치더니 구석구석
번지더니 몸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추억, 향기로운 나무껍질처럼
내 몸을 감싸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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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인사동 cafe vook's앞에 서 있는데
제 의족을 빼서 머리에 베고
길에서 잠자는 사내. 흐린 하늘 꽝!
천둥소리 사내는 눈을 뜨고 다시
의족을 끼운다. 마음에서
잘라버린 덩어리, 나 잠시 거기 머리를 베고 눈
감아본다 사랑해, 너를 아직도!
막 퍼붓는 가을비 번개의 섬광!
빗물이 들어차 소름 돋는 끽끽,
의족 소리 마구 들뜨는 마음.
활짝 펼쳐지는 내 검은 우산 속으로
덩어리 같은 섬광 아, 너의 몸,
들어온다. 오랜 시간 증오의
온도 속 상처는 썩어 물러져서
네 몸에 내 몸을 끼우는 것, 함께
내딛는 것, 한 덩어리 우리.
검은 우산 속에 서 있는데
나의 한쪽 어깨가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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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바지만 입던 여자 웬일로 치마를 다 입었네
재활원 뒤뜰, 치마폭 밑으로 나온 다리 하나로
목발을 짚고 걷는 여자 치마폭 뭉툭한 다리는
뱃속의 아기처럼 발길질을 헤대고 민망하게 펼쳐지는
하얀 치마가 폐백받는 자세로 햇볕을 받는다
저도 상처가 있다고, 나무로부터 잘려진 뒤꽁무니를
바짝 쳐들던 낙엽들 이제 둥글게 상처를 말아 묶고
봇짐처럼 부스럭대며 풀숲에 박혀 있다
(상처는 풀어보고 싶지 않은 짐 속의 낯선 물건?)
바지를 입으면 꼭 한쪽 바짓가랑이를 단단히 묶던 여자
그 매듭 풀어버리느라 부러진 손톱 같은
눈물 흘렸나 얼굴에 그어진 빨간 자국들
상처만이 상처를 아파하지 않는가
치마폭 밑으로 나온 다리 하나보다 붉은 복숭아뼈보다 발
등의 핏줄보다 파란 풀물이 든 목발 끝자락보다
치마폭 속의 상처가 살아 날뛴다 바람이 불고
상처만이 상처를 만나주는가, 저도 상처가 있다고
치마폭 속으로 뛰어오르는 낙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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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흐느낌

 

이 밤 마당의 양철쓰레기통에 불을 놀고

불태우는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

우르르 솟구치는 불씨들 공중에서 탁탁 터지는 소리

그 소리 따라 올려다본 하늘 저기

손가락에 반쯤 잡힌 단추 같은 달

그러나 하늘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검은색,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일순간

그해 겨울 용달차 가득 쌓여 있던 분홍색

외투들이 똑같이 생긴 인형들처럼

분홍색 외투를 입은 수많은 할머니들이

나의 몸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이제는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

검은 하늘 가득 분홍색을 죽죽 칠해나간다

값싼 외투에 깃들어 있는 석유 냄새처럼

비명의 냄새를 풍기는 흐느낌

확 질러버리려는 찰나! 나의 몸속으로

다시 돌아와 잠잠하게 잠기는 분홍색 흐느낌

분홍색 외투의 마지막 한 점 분홍이 타들어가고 있다

 

 

꿈(-이 년 동안)

 

봄이 온다며 할머니는

화분을 하나 사왔다 며칠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높은 언덕배기 화장터 화국에다

할아버지를 밀어넣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 누군도

화분에다 흙을 채우지 않았는데

화분에는 흙이 한가득 들어찼다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몇 달 후

모시고 살던 외증조 할머니

단식으로 세상을 뜨셨다.

높은 언덕배기 화장터 화구에다

외증조할머니도 밀어넣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화분에다 꽃씨를 심지 않았는데

화분에는 꽃이 자라나 봉오리를 터뜨렸다.

 

아니,

생각하니,

할머니가 화분을 사오던 날,

나는 그날 야밤에 술 취해 들어오다

그 화분을 밟아 깨뜨렸는데!

 


원에게

 

너도 나를 포기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미안하지만 나는 한때 이러한 의심을 했다.

갖은 노래와 농담을 입에 달고 다닌다는 것;

때로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나는

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애인에게

사과를 깎아주는 너무도 순한 처녀처럼

혹은 다 큰 자식들뿐인 집의 새엄마처럼

칼을 쥐고 떨어야만 한다는 걸. 떨림;

언제나 내 부족함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미워진 사람은,

어떠한 추억을 막론하고,

끝까지 미워하는,

나의 기질은 변함이 없다.

사랑하는 일보다 미워하는 일의

 

(((떨림)))

 

내가 오백 년 전 프랑스의 궁중악사였음을 확인한

전생체험; 그때 나는 지루한 궁전을 탈출한 죄로

사형당했다, 수많은 횃불들이 내 몸을 더럽혔지만

나를 위해 울어준 이들은 모두 난쟁이였다.

그러나 그 난쟁이들과 내가 어덯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전생체험을 통해서 보지 못했으므로, 너를 만난

이 生에서 나는 그것을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걱정은 나는 이 生도 탈출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안녕) - 점촌 터미널에서

 

두 노인이 서로 마주 보고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비록 입술을 봉오리처럼 봉긋 다문 채

손가락을 움직여 나눈는 대화지만

손가락이 목소리를 내지만

그렇지만 어떤가

저 담 너머 플라타너스 빈 가지들 또한

두 노인의 앙상한 손가락같이 쌩쌩- 휘날린다

눈 털어 날린다

 

노인들 곁을 지나는

여자의 등에 업힌 아기가 자꾸만

눈을 깜빡이며 뒤돌아본다 붉어진다

 

이 뻣뻣한 웅성거림 속에서

저 노인들은 고요하다

부드럽다

향기롭다

대화를 접은 손가락으로

눈을 씻으며, 그러나 한 노인만이

가르랑대는 버스에 오른다

 

남은 노인도 매한가지 눈을 씻으며

눈을 씻는

손가락 끝의 반짝임이 아, 속삭인다

 

(안녕)
이승복 2009.01.06 11:53  
<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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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오래 전에 문을 닫은 영화관을 스쳐 지난다. 저기 아직도
걸려 있는 낡은 그림간판; <초콜릿> 웃고 있는 줄리엣 비노
슈, 그녀의 귀를 바라보는 듯한 혹은 핥는 듯한 측면 얼굴의
조니 뎁. 그 영화 속에서 그는 아름다운 기타를 가진 보트 유
랑자였다. (한때 나도 아름다운 기타를 가진 보트 유랑자가
되고 싶었다. 겉멋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다시 아름다운 기
타를 가진 보트 유랑자가 되겠다고 꿈꾼다.
간절히) 그러자 서서히,
어디서 왔는지 모를 작은 초콜릿 하나
입안에서 녹은다. 문득 남몰래
사랑하고 있는 여자가 더 사랑스러워지고
하나 남은 세상의 길처럼 두 눈 가득 들어차는 푸른 강물.
거리의 인파들 희뿌연 건물들 다 사라지고
어느새 내 발밑을 떠받치고 있는 검은 보트, 
나는 흘러가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빨간불이에요, 하는 아득한 소리
돌아보면 안개 낀 음울한 강물뿐 나는 한없이 흘러가는데
노래를 부르기 위해 손을 뻗어 기타를 더듬는다.
잘 만져지지 않는다. 안개는 깊어지고
내가 만지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뼈 같다.
손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간 듯 만져지는 뼈가 축축하다.
너무 싱싱하게 젖어 있어 오히려 기분이 상할 정도다.
음악이 되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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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상여

욕창으로 짓무른 나의 몸 곳곳에, 꽃들이 수북하게 피었다. 나는 스스로 꽃상여가 되었다. 초라하지 않게 내 꽃들 골고루 햇볕 다 받길 바라, 나는 내 입으로 哭을 하며 길을 떠난다. 산소호흡기와 오줌 호스를 떼어놓는 순간, 질긴 가래 덩어리와 썩은 오물방울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
낯익은 화장터 火口에 누워 있으면
서서히 발끝부터 닿는 꿈의 불, 나를
눈 뜨게 했다 한밤중에. 때론 거울로 만들어진 관 속에서
울부짖기도 했다. 밤새 그 밤의 어둠에 쓸려갈 듯했던
눈동자의 검은자위처럼 바싹 오그라든 저 나무 그림자
속에서 벌건 핏대 형태로 쭈글쭈글한 노인들 꿈틀댄다.
다들 가벼운 돛배처럼 잔잔히 지나가는 꽃상여를 본다.
그림자 속의 부채질들이 미안한 눈꺼풀처럼 분주하다.
백년 만에 꽃상여에 오른 그녀,
이따금 지팡이를 짚고 죽은 자들을 찾아다녔다.
(우리 할머닌 이제 없어요. 자꾸 찾아오지 말아요.)
죽은 자들로 꽉 찬 기억에서 죽음이 사라진 순간
살아서 보는 그 신비로운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몸의 모든 구멍은 매표소 구멍처럼 분주해졌고
몸속에서 몸 밖으로 나갈 발걸음은 두근거렸다
그 세계는 일절 에누리가 없었으므로
똥칠을 한 기억들마저 다 받아주고도 아직 남은 그것
개천 접시 물에 홀로 뜬 징검돌로 사랑받듯 부풀다
뒤늦게 발견된 그녀, 지금은 저 꽃상여에 올랐다.
백년 만에 저렇게도 큰 꽃다발을 내밀어 연애를 건다.
죽음은 수줍지만, 꽃상여는 꽃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
나는 가던 길을 매번 다시 돌아온다.
이 생의 산소호흡기와 오줌 호스를 탯줄처럼 다시 꽂고, 눈을 뜨면 사라진 내 몸의 꽃들. 실연당할수록 꽃보다는 향기가 그립다. 매일매일 하루분의 향기를 제공받지만, 그 향기 왜 맡지 못할까 사람들은, 왜 그것을 목숨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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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조화(極樂鳥花)
 
공장 다니는 친구 하나 연삭기에 코가 스친 순간
얼마나 깊이 다쳤나 슬쩍 코끝을 들어보았다고
코가 얼굴에서 뒤꿈치처럼 들렸다고 피가
터진 그의 얼굴이 이 저녁의 화단 안;
시름시들 숨이 멎어가는 저 붉은 極樂鳥花 같았겠다.
날아오를 새의 형상이라는 꽃, 그러나 얼굴이 찢어져 있어
폭삭 주저앉은 새와 앉음새가 닮은 꽃, 느닷없이
세찬 바람에, 혹은 떼를 지어 지나가는 죽은 새들의 혼에
꽃 花자를 지우고 속박에서 벗아난 듯
오롯하게 몸을 세우고 있는 한 마리 極樂鳥,
훨훨훨훨 날아갈 자세다. 피 섞인 숨,
헐떡이는  極樂鳥, 저 얼굴을 누가 찢었을까
상처로 숨을 쉬느라 아무 말 못하는 얼굴인데
행복해......한눈에 읽을 수 있는 환한 표정은
기뻐......황홀해......즐거움의 극치!
추운 가을 저녁의 환한  極樂鳥, 피숨을
내쉬었다 들이마실 때마다 이승을 저승이게끔
느끼게 하는 노을이 화단 가득 번져
점점 더 붉어진  極樂鳥, 훨훨훨훨 훨훨훨훨
노을빛과 똑같은 색으로 날아갔나 한순간에
캄캄해진 화단 어두운 하늘, 저 너머에서
누군가 내 표정을 읽고 있는 것 같아
언젠가 문병 가서 본 친구의 그 다친 코를
꼭 붙잡고 있던; 꽃 花자 같은 수술 자국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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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대꾸

빈 방, 탄불 꺼진 오스스 추운 방,

나는 여태 안산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

며칠 전 당신이 눈을 감은 아랫목에,

질 나쁜 산소호흡기처럼 엎드려 있어요

내내 함께 있어준 후배는 아침에 서울로 갔어요

당신이 없으니 이제 천장에 닿을 듯한 그 따뜻한

밥 구경도 다 했다, 아쉬워하며 떠난 후배

보내고 오는 길에 주먹질 같은 눈을 맞았어요

불현듯 오래 전 당신이 하신 말씀; 기습아,

인제 내 없이도 너 혼자서 산다, 그 말씀,

생각이 나, 그때는 내가 할 수 없었던,

너무도 뒤늦게 새삼스레 이제야

큰 소리로 해보는 대꾸; 그럼요,

할머니, 나 혼자도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는데,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눈치 없는

눈발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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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느낌이 왔다
등을 구부리고 앉아 떡을 먹는데 등에 담(痰)처럼 박힌 느낌,
느낌을 보내려고 저 이화령(梨花嶺)의 병꽃나무를 바라보았으나
거기 붉은색에 버무려져 뜨겁게 파닥대는 느낌, 추억처럼
다시 돌아와 한 사람의 모습으로 커지는 느낌; 그는
병든 사람이다 팔뚝의 주사자국들은 미친 별자리 같다
등을 구부리고 한 그릇 국수를 말아먹는 그는
지금 내 등에 박힌 느낌, 그는 이빨이 다 빠졌고
안타깝게 면발을 놓치는 잇몸 사이로 하얀 혀가
넌출같이 흐느끼는 소리 어두운 방에서 혼자
그는 죽은 사람이다 더러운 요에 덮여, 지금 이 봄날
담(痰)처럼 내 등에 박힌 몸, 점점 내 등은 구부러졌으나
저기 병꽃나무의 붉은 품속에서 잠깐 잠깐씩
하얗게 병꽃나무를 늙게 하는 봄볕같이
나를 따뜻하게 늙게 하는 죽은 몸, 죽은 환한 몸,
내 몸에 겹쳐졌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이 몸처럼 왔다 가는 것이었다 날마다
그렇게 끈질기게 나를 찾아오는 몸이 있다
이제야 그 몸을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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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비 그치고 까만 걸레 같은

새떼들의 그림자

한바탕 마당을 닦으며 지났습니다

구석구석 잘 닦인 마당 환합니다

빨랫줄을 치받고 선 장대의

금마저도 환한

봄날,

장대 금 사이로 맺혀 있는 물방울들이

금 사이로 슬몃슬몃 스미고 있습니다

영영 다시 뜨지 못할 눈 감기고 있습니다

그래도 담장에 솟은 사이다병 조각들은

제 모난 머리에다 봄볕을 얹고 깜빡,

깜빡 깜빡 깜빡,

깜빡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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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

 

개가 비를 맞으며

운동장 한복판에 앉아 있다

물방울 털어내는 새파란 상추 같은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개는

털이 빠져 군데군데 드러난 살결마다

물감처럼 흉터가 굳어 있다 빗줄기에

뜯겨도 흉터로 아문 상처는

이제 아프지 않은 아픔이라

개는 사타구니에 난 흉터를 핥고 있다

입을 벌리고 헛구역질도 하고 있다

제 몸의 흉터처럼 군데군데 일그러진

운동장의 흙탕물들까지 개는

일어나 핥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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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

 

그들은 모두 맨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저마다 간격을 두었지만 서로의 핏물이
커튼처럼 그 간격 꼼꼼히 닫아 주었다
무엇을 꼭 끌어안은 모습으로 누워있는 여자의
발치엔 아기가 구토물같이 엎질러져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마다 얼굴을 가린 여자들의
짧은 비명소리 같은 엄마!
(엄마, 언제부턴가 모든 엄마는 비명이었다)
깊이 파헤쳐진 무덤처럼 누워있는 여자
얼마나 귀가 찢어질 듯한 짧은 엄마인가?
혼자 멀찍이 떨어져 누운 여자의 사내는
여전히 술냄새를 풍겼으므로
그의 핏물은 거침없이 여자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피로써 스밀 수 있다는 걸
딱딱하게 굳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눈을 감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 순간
카메라 불빛이 터졌다, 그들도 이 생에서
눈을 뜨고 가족사진을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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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마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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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가 있는 곳

 

위층에서 터진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는 또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노를 젓는다
여자의 몸이 욕실바닥을 휘젓는 소리
살림이 난파되는 소리 비명소리 속으로
콸콸 물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오후 내내 베란다에 앉아있던 여자의
흐느낌은 물소리였다
이내 길고 긴
골짜기가 되었다 화분이 하나 둘 흘러갔고
앞날을 모르고 웃고 있는
환한 사진들이 흘러갔다
불붙은 편지는 뒷걸음질치며 느리게 흘러갔고
우수수 머리카락들이 흘러갈 때
멀리 먼 바다의 문어대가리처럼 지던 태양은
먹물 같은 어둠을 갈겨 버렸다
그때 첨벙첨벙 어둠을 밟으며
장화 신은 그가 온 것이다

늘 바다 비린내가 나는 그의 몸,
그는 거친 뱃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갑판에 올라본 적 없는 선장
토막나고 썩은 물고기만 가득 싣고
그의 배의 바깥 손잡이를 끌며 허우적댔다
시장과 거리에서,
그는자주 목격됐다

과중으로 인해 배의 뒤축이 침몰해 버릴 때면
그의 굽은 몸도 덩달아 들려 올려져
배와 함께
물 위로 입을 내민 고래처럼 포효하곤 했었다
해가 저물고,
그의 배가 여자의 골짜기 끝에
정박했던 것이다

흘러간 것들을 다시 건져 올라온 그가
어딘지 모를 먼 곳으로 향해를 시작한 밤
물소리는 끝이 없고
도대체 저들은 어디까지 흘러간 것일까
귀를 막고 창문을 내다보면 너무 많은
등대의 불빛, 불빛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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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으면 죽는다

 

  1

 세상에 나올 때 나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가 나를 때렸다고
한다
 오늘은 보답하듯 나도 그녀의 가슴을 때렸지만
 

  2

 당신이 기르던 새를 내가 맡았네 당신 박수소리에 울음을 울던 새
내 박수소리에는 울지 않는 새 가만히 보니 방전放電이 된 새 그 가
슴을 열고 힘세고 오래간다는 심장을 넣어주네 딸깍, 피 한 방울 같
은 붉은 빛으로 새의 귀가 밝네 내 박수소리를 듣는 순간 눈꺼풀처
럼 핏빛이 깜박이네 귓속에서부터 몸 속까지 울음의 시간을 전하러
스며드네 뱃속에 품은 알, 전구가 부화할 듯 환해진, 새는 그러나 울
지 않았네 울음 터트리지 않는 갓 태어난 아기 때리듯, 새를 때렸네
그러자 다행히 파란 하늘을 건드리고 온 듯 점점 푸르게 밝아지는
새의 프라스틱 날개 그 두 눈 속에는 분홍빛 동공이 한 점씩 새겨지
네 울음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 울음임을 알았을까 울음으로 꽉
잠긴 듯 환해진 새 다시, 박수를 치네 새를 울리네 또 울지 않았네
제목 저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