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하다 손을 베이다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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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30 14:59
저자 : 강미정
시집명 :
출판(발표)연도 : 2002
출판사 :
설거지를 하다 손을 베이다
강미정
설거지를 했습니다
개수통을 채우고도 모자라 바닥까지 쌓여있는 빈그릇,
밥값도 못한다고 자꾸 눈을 흘겼습니다
저 시선, 저 차가움, 저 비웃음, 저 이죽거림,
덕분에 나는 오래도록 외롭지 않았습니다
이 많은 그릇들을 비우며 나는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밥값을 하려면 더 많은 빈 그릇을 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씻어도 끝이 없던 빈 그릇도 이런저런 생각에 다 씻겼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수통에서 수저를 건져 올리다 손이 베였습니다
개수통에 칼이 든 줄은 몰랐습니다
숟가락을 들어올리는 일이
밥을 푹 눌러 떠먹는 밥 먹는 일이
쓰윽, 나도 모르게 내가 베이기도 하는 일인 줄
뜨신 밥 한 그릇을 다 비울 때는 몰랐습니다
내 손끝에서 고통이 켜졌습니다
뜨끈뜨끈 비워낸 빈 그릇이 내 생을 밝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이 켜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강미정
설거지를 했습니다
개수통을 채우고도 모자라 바닥까지 쌓여있는 빈그릇,
밥값도 못한다고 자꾸 눈을 흘겼습니다
저 시선, 저 차가움, 저 비웃음, 저 이죽거림,
덕분에 나는 오래도록 외롭지 않았습니다
이 많은 그릇들을 비우며 나는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밥값을 하려면 더 많은 빈 그릇을 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씻어도 끝이 없던 빈 그릇도 이런저런 생각에 다 씻겼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수통에서 수저를 건져 올리다 손이 베였습니다
개수통에 칼이 든 줄은 몰랐습니다
숟가락을 들어올리는 일이
밥을 푹 눌러 떠먹는 밥 먹는 일이
쓰윽, 나도 모르게 내가 베이기도 하는 일인 줄
뜨신 밥 한 그릇을 다 비울 때는 몰랐습니다
내 손끝에서 고통이 켜졌습니다
뜨끈뜨끈 비워낸 빈 그릇이 내 생을 밝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이 켜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