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깎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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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를 깎으며

가을 0 1147
저자 : 강해림     시집명 :
출판(발표)연도 :     출판사 :
감자를 깎으며 

강해림
 

검은 비닐봉지가 주둥이를 열자
자주빛 싹이 난 감자가 쏟아져나왔다
섣불리 불려나온,
환한 세상을 향한 강한 불신을 담은 눈빛들이 노려본다
성난 뿔 같다
울컥울컥 빈속에 들이켰을 바람의 향기가 아리다

거무튀튀한 흙빛을 띠고 쭈굴텅해진 몸뚱아리
어디, 저리 희멀건 속살 감추어 두었을까
쓸쓸한 앙금들
가라앉고 부유하던 속앓이로 홀로 여위어갔을

어둠 속 즐겁게 굴러가던
짱짱한 울음 하나가 허벅지 깊숙이 지뢰를 묻듯
조심조심 독을 심고
허공의 길 향해 무섭게 싹을 틔웠던 것

껍질을 벗긴다
그는 순순히 성난 뿔을 거세당한다
허옇게 드러나는 비의(悲意),
붉은 피가 스민다
성난 뿔을 잘라내고 그가 걸어간 마음의 유적
은밀한 흔적까지 도굴하려다 검지손가락을 베인 것이다

문득
몸속 길 하나가 들어선다
퍼져나가는, 감자의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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