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와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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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와의 연애

가을 0 1278
저자 : 강해림     시집명 : 환한 폐가
출판(발표)연도 : 2006     출판사 : 한국문연
허무와의 연애

강해림


허무라는 말은 참 허무 맹랑하다
내 혀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동안
세상은 텅 빈집이 되어 버리고
문 꽁꽁 걸게 해 놓고
오로지 당신 품 안에서만 놀게 하고
그래서 좋았다

우린 만나면 늘 진지했다
치 떨리는 외로움으로
손안에 들어오면 놓아 버리고 싶고 앙탈하고 싶었으므로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래서 좋았다

가끔 내게 디오니소스의 술통이 동이 나도록 취해 보자고
한 살림 차리자고 농을 걸긴 했는데
어디 그가 남긴고 간 자리만한 넓고 텅 빈
우주 공간이 있던가
그가 주는 것이라면 독주라도 달게 마실 수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이별주도 없이 내 곁은 떠났을 때도
죽을 만큼 아팠지만
그래서 좋았다
세상에 헛 것 아닌 거 있냐고
깨닫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그래도 가끔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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