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냄새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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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냄새 속에서

가을 1 1669
저자 : 마종하     시집명 : 파냄새 속에서
출판(발표)연도 : 1988     출판사 : 나남
파냄새 속에서

마종하


빈 사과 궤짝을
우리 마을 아파트 쓰레기통에서 주워다
흙을 담고 빽빽히
파를 심었다. 눈 오는 날
발가벗은 나무들이 흰 깁을 두르던 날
마누라가 우산장 기슭으로
나를 마구 끌고 가서
흙을 담으라고 해서 담았다.
구제받지 못 할 나의 긴긴 잠을
불러 흔들어 깨워서
파를 심으라고 해서 심었다.
시퍼렇게 언 파를 흙에다 끼우면서
나는 은빛 깁의 산이 그립다고 했다.
(목숨이야 마음같이
안될지언정, 그 산 속에 한동안
묻혀 있고 싶다고 했다.)
길다란 궤짝에 흙을 담아 왔으면 되었지.
검은 흙 가득가득
속살이 하얀 파를 심어 놓았으면 되었지.
더 무슨 정신 나간 잠꼬대를 하느냐고
마누라는 치마를
펄럭이며 돌아서 버렸다.
그래 좋다, 푸른 파.
뜯어먹자 매운 파.
콧날이 얼얼한 우리들의 삶.
너무 매워서 눈물나는 궤짝 속의 삶.
1 Comments
가을 2006.03.19 19:43  
이해와 감상

 시적인 소재는 고아한 감정의 세계나 명상적인 철학의 논리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체험들이 모여 하나의 시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시적인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체험의 단순한 집합이 곧 시적 감동의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적절한 깨달음과 시적 형상화가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마종하의 「파냄새 속에서」는 일상의 삶의 경험이 시적 통찰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빈 사과 궤짝을 주워다 파를 심게 되었다는 것이 시적인 통찰을 얻게 되는 구체적인 일상경험이다. 파를 심게 되는 과정은 다분히 수동적이다. 긴긴 잠을 깨게 되었고 억지로 끌려가 흙을 담는다. 그러나 이 수동적인 과정 중에서 시인은 잠시나마 `발거벗은 나무'들이 은깁을 두른 산을 그리워한다. 벌거벗은 나무처럼 헐벗은 삶의 허기에 시달리는 시인은 흰눈을 은깁처럼 두르고 있는 산에서 다소의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궤짝 속에 있는 흙이 아니라 산에서 살고자 하는 소원은 간단히 묵살된다. 일상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는 근원적인 삶에 대한 욕망은 누구나 잠시 가져보는 것이지만 실현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 욕망을 버젓하게 드러내놓지 못하고 괄호 안에 묶어 놓은 시인의 의도에서 우리는 괄호 속에서 시인의 조심스러운 욕망과 그 서글픈 드러냄을 읽을 수 있다. 현실의 완강한 속박은 길다란 궤짝 속의 삶, 일상의 삶에 만족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4연은 답답한 일상에 대한 역설적인 긍정이다. 만족할 수 없지만 궤짝 속의 파처럼 매운 냄새를 지니면서 살고자 한다. 그것은 현실 삶에 대한 최대한의 긍정이면서 삶에 부과되는 고통에 대한 수락이다. 또한 일상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매워서 눈물나는 삶, 파냄새처럼 강렬한 삶을 살자는 다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해설: 유지현]
제목 저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