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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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길을 잃다

가을 0 1142
저자 : 강지산     시집명 :
출판(발표)연도 : 2004     출판사 :
고향에서 길을 잃다

강 지산


꼬깃꼬깃 웅크렸던 기억들이 펼쳐 질 어스름한 저녁
판자 집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踏十里 뚝 길에 접어들면
한 눈에 들어오는 천막 동네 가난이 보입니다
비좁은 골목길을 지날 때면 숨어있던 낮 익은 추억들이,
수 십 년을 살아온 일상 속으로 달려들어
가뜩이나 허전한 기억의 숨통을 막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잊혀지지 못한 얼굴들은
장마철이면 온통 물난리가 나서 학교로 예배당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고
文씨 아저씨네 양조장에서 술지게미 한 그릇 먹고 학교로 가면
배고픔 쯤 은 새 까맣게 잊어버렸던 이야기와 발가락에 물들은 검정 고무신 땟물과
중량 천 건너 아차 산에 진달래 꽃잎 따서 먹다 입술이 붉게 물들었던 파릇한 순간들과
막노동 하루살이 姜씨와 청주 식당 과부 아줌마의 사랑하는 틈바구니에
연탄 공장 다니는 吳씨가 공연하게 끼어 들어 삼각 관계가 된 이야기와
19살에 버스 차장이 되었다가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하고 집을 나간 뒤,
3년 만에 유부남과 헤어지고 자살을 했다는 23살의 곱디고운 공동 수돗가 집 孫씨의 딸
시집 올 때 가마 한번 타지 못하고 지지리 고생만 하시다, 죽어서 꽃가마 타고
저승 가셨다는 양말 공장 귀 벙어리 할머니의 사연과 함께
한때,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아궁이 속 가난에 대하여 히히 덕 거리며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다가 천막 동네에 남아있는
흑백 사진 속 이야기를 하나둘 털어 냅니다
사람들과 판자 집과 잡다한 추억이 떠나간 텅 빈 마을엔
봉숭아 핏물처럼 영혼을 태우던 사람들의 행복이 남아 있습니다
재개발이라는 커다란 입 속에서 불도저의 불규칙한 굉음은
사철 꽃망울 터트리던 뚝 방 길과 실개천에 송사리 물방개조차 빼앗아 갔지만
가끔은 타지로 떠돌다 돌아올 낮 익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살아있습니다
踏十里 294번지에 안개처럼 어둠이 내립니다
하늘엔 미리내 밝기만 한데, 내가 살았던 고향에서 번지수가 없어 길을 잃었습니다
나간 길은 있는데 돌아올 길은 없습니다
꼬깃꼬깃 웅크렸던 기억들이 펼쳐 질 어스름한 저녁
踏十里에 가면 시간조차 길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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