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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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아벨

가을 1 3506
저자 : 고정희     시집명 : 이 시대의 아벨
출판(발표)연도 : 1983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이 시대의 아벨*

                    고정희
 

며칠째 석양이 현해탄 물구비에 불을 뿌리고 있었읍니다.
이제 막 닻을 내린 거룻배 위에는
저승의 뱃사공 칼롱의 은발이
석양빛에 두어 번 나-부-끼-더-니, 동서남북
금촉으로 부서지며 혼비백산
숲에 불을 질렀읍니다.
으-아, 솔바람 불바람 홀연히 솟아올라
둘러친 세상은 넋나간 아름다움
넋나간 욕망으로 끓어 오르고 있었읍니다.
아세아를 건너지른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에 당도한 건 바로
이때입니다.

오그덴 10호*는
몇 명의 수부들을 바다 속에 처넣고
벼락을 때리며 외쳤읍니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안락한 처마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치상에서
주린 배 움켜 쥐던 우리들의 아벨
우물가에서 혹은 태평 성대 동구 밖에서
지친 등 추스르며 한숨짓던 아벨
어둠의 골짜기로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믿음의 아들 너 베드로야
땅의 아버지 너 요한아
밤새껏 은총으로 배부른 가버나움아
사시장철 음모뿐인 예루살렘아
음탕한 왕족들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야
너희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
독야청청 담벼락과 아벨을 바꿨느냐?
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 고통을 짊어진 아벨
너희 족보를 짊어진 아벨
너희 탐욕과 음습한 과거를 등에 진 아벨
너희 자유의 멍에로 무거운 아벨
너희 사랑가로 재갈물린 아벨
일흔 일곱 날 떠돌던 아벨을 보았느냐?
아흔 아홉 날 한뎃잠을 청하던 아벨을 보았느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
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물리라
지진이 솟구쳐 빗장을 뽑으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

오 불쌍한 아벨
외마디 소리마저 빼앗긴 아벨을 위하여
나는 너희 식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아방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별장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교회당과 종탑을 엎으리라
소돔아 너를 엎으리라
고모라야 너를 엎으리라
가버나움아 너를 엎으리라
예루살렘아 너를 엎으리라
천사야 너도 엎으리라
깃발을 분지르고 상복을 입히리라
생나무 마른 나무 함께 불에 던지고
바다더러 산 위로 오르라 하리라
산더러 너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울지 않는 종은 입에 칼을 물리고
뛰지 않는 말은 등에 창을 받으리
날지 않는 새는 뒷축에 밟히리
뒷날에 참회는 적당치 못하다
너희가 쫓아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어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고 부인한 아벨
너희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시치미뗀
아벨의 울음 소릴 들었느냐?
금동이의 술잔에 아벨의 피가 고이고
은소반의 안주에 아벨의 기름 흐르도다
촛농이 녹아 흐를 때 아벨이 울고
노랫가락 높을 때 아벨이 탄식하도다

오 불쌍한 아벨을 찾을 때까지
나는 이 세상 어디든 달려가
너희 잔치상과 보신탕을 엎으리라
너희 축복과 토룡탕을 엎으리라
너희 개소주와 단잠을 엎으리라
돌들이 일어나 옥답을 일구고
지진이 솟구쳐 평지 풍파 일으키리라
바람더러 주인이라 주인이라 부르리라

너희의 어둠인 아벨
너희의 절망인 아벨
너희의 자유인 아벨
너희의 멍에인 아벨
너희의 표징인 아벨
낙원의 열쇠인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그때 한 사내가
불 탄 수염을 쥐어뜯으며
대지에 무릎을 꿇었읍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읍니다
―우리가 눈물 흘리는 동안만이라도
주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다음날 신문은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의 대기권을 완전히 떠나갔다고
보도했읍니다.

* 창세기 4장 2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첫아들 카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농부가 되었는데, 형 카인은 아벨에 대한 질투 때문에 아우를 들로 꾀어내어 쳐 죽였다. 이때 야훼께서 이렇게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 1981년 8월 초 한반도에도 상륙한 태풍 이름.
1 Comments
가을 2006.04.01 14:33  
「이 시대의 아벨」은 부정한 세상을 질타하는 매서운 어조를 통해 강렬한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기본적인 구도는 선량하고 죄없은 아벨이 형 카인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이후의 드러나는 인간의 타락과 죄악 그리고 이 죄업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질타의 목소리로 짜여있다.
 1연에서 등장하는 바다에 불을 부리는 저승 뱃사공의 모습에서 독자는 이 불길이 종말적인 응징의 징후임을 짐작할 수 있다.
 2연부터는 응징의 내용과 사악한 세상에 대한 질타가 뒤따른다. `너희'로 지칭되는 속악한 자들은 호화로운 침상과 교회당을 위해 주린 배를 움켜쥐던 아벨을 내쫓고 핍박했으며, 안락한 처마 밑과 풍성한 잔치상에서 내쫓긴 아벨은 태평성대의 동구 밖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지친 등을 추스르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속악한 땅에는 환락과 거짓이, 바람부는 세상에는 아벨의 울음으로 가득하다. 죄없는 아벨을 핍박하고 그 대가로 식탁과 침상과 교회당을 얻은 세상은 `회칠한 무덤'이며 `독사의 무리들'로 가득한 곳이다.
 이와 같이 아벨로 표상되는 죄없이 핍박당하는 자와 `너희'로 지칭되는 `독사의 무리'의 도덕적 대립은 성서적 세계를 떠나 현실의 패덕성에 대한 질책으로 옮아가고 있다. 시의 앞뒤를 감싸는 `오그덴 10호'로 대표되는 현재적 시간의 명시는 성서적 과거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겹쳐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류의 원죄의식을 빌어와 현재에도 여전한 자행되고 있는 부도덕성을 질타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사뭇 준열하다. `배부른 가버나움'과 `음탕한 소돔과 고모라'의 화려하고 풍성함이 가득한 시대는 아벨의 고통과 한숨을 대가로 얻어졌듯 이 시대의 화려한 물질적 풍요는 또다른 아벨을 추운 땅에서 울게 할 것이다. 그들이 환락과 풍요의 대가로 쫓아버린 아벨을 모른다 부인할 때 그들의 죄는 절정에 달한다. 파멸과 재앙을 예고하는 심판의 목소리는 `한 사내'의 간절한 구원에의 갈망으로 유보된다.
 이 시에는 카인의 살인과 구약 시대의 인간의 죄상과, 아벨과 예수에 대한 핍박과 구원, 묵시록적 예언의 이미지, 그리고 현재의 어지러운 상황이 중첩되어 있다. 진실된 참회의 눈물로 종말적인 재앙을 모면하는 결말에서 시인이 환기하고자 하는 점이 징벌의 응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패덕에 대한 경고이며 구원을 향한 희망에 있다는 뜻을 확인할 수 있다. [해설: 유지현]
제목 저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