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꽂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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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08:17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 나무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움찔움찔 움을 틔우더니 꽃을 피웠고 곧이어 불어온 비바람에 다 날려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열매를 맺어 폭염과 태풍을 이겨내고 열매를 익혔다.
이젠 열매도 다 커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나뭇잎도 벌써 많이 떨어져 뒤로 파란 하늘이 듬성듬성해지니 나무는 어느덧 외로움을 느낀다. 거기다 아침저녁 찬바람이 불어오니 한동안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동안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허무하게 보내버린 청춘을 아쉬워하며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한다.
이윽고 겨울은 오고 모든 것을 떨구고 야위어 버린 나뭇가지 주위를 밤새 맴돌던 수증기가 느닷없는 새벽 찬바람에 하얗게 얼자 꽃송이처럼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 아름답던 시절 허무하게 다 보낸 후 겨울밤 내내 뒤늦게 사슬처럼 차갑게 나뭇가지를 옥죄는 꽃으로 피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밤새 나뭇가지 주변을 서성이던 수증기가 겨우내 새벽마다 차가운 고통 속에서 아무리 아름답게 피어나도 아침이 되면 그리 따뜻하지도 않은 한 줄기 햇살에 아무도 모르게 한 줌의 물로 녹아 사라진다. 햇살 좋던 어느 겨울 이유도 모른 채 떠나간 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