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민복 시인의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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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에 관한 시 모음> 함민복 시인의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외

정연복 0 3332
<자장면에 관한 시 모음>  함민복 시인의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외


+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함민복·시인, 1962-)


+ 아버지와 자장면

내 어릴 적
아버지 손목 잡고 따라가 먹던
자장면

오늘은 그 아버지가 내 손목 잡고
아장아장 따라 와
자장면을 잡수시네

서툰 젓가락질로
젓가락 끝에서 파르르 떨리는
자장면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처럼 혈흔처럼
여기저기 툭툭 튀어
까만 피톨로 살아나네
(이영춘·시인, 1941-)


+ 자장면에 대한 작은 생각

기억의 두레박으로 길어올린 어린 시절 추억들이
마냥 즐겁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 
하지만 자장면에 대한 기억들만은 언제나 즐겁고 신나
지금도 어린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꼽으라 한다면
자장면은 언제나 순위권에 들 수 있을 거야
세월 지나 우리 입맛 아무리 변덕 부려도
자장면은 언제나 추억 속 그 맛 그대로이지
친구처럼 따라붙는 단무지와 양파 그리고 춘장까지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시대의 자장면을 좋아하는 것은
가진 게 없을 때에도 부족함이 없이 먹을 수 있고
정중하지도, 예의를 차리지 않고 먹어도
푸근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야
자장면아!
세상 급격한 변화에도 아랑곳없이
너만은 그 맛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세대가 바뀌고 입맛 바뀔지라도
나와 어린아이들은 여전히 널 좋아할 테니
(허훈·시인)


+ 나의 경제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만원을 준다
전주까지 왔다 갔다 하려면 시내버스가 210원 곱하기 4에다
더하기 직행버스비 870원 곱하기 2에다
더하기 점심 짜장면 한 그릇값 1,800원 하면
좀 남는다 나는 남는 돈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나의 경제야, 아주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또 어떤 날은 차비 좀, 하면 오만 원도 준다
일주일 동안 써야 된다고 아내는 콩콩거리며 일찍 들어와요 하지만
나는 병천이형한테 그 동안 술 얻어먹은 것 염치도 없고 하니
그런 날 저녁에는 소주에다 감자탕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또 며칠 후에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월말이라 세금 내고 뭐 내고 해서 천 원짜리 몇 뿐이라는데
사천 원을 받아들고 바지주머니 속에 짤랑거리는 동전이 얼마나 되나
손을 슬쩍 넣어 본다 동전테가 까끌까끌한 게 많아야 하는데
손톱 끝이 미끌미끌하다 나는 갑자기 쓸쓸해져서
오늘 점심은 라면으로나 한 끼 때울까 생각한다
또 그 다음 날도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대뜸 한다는 말이 뭐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다고
유경이 피아노학원비도 오늘까지 내야 한다고 아내는
운다, 나는 슬퍼진다 나는 도대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어제도 그랬다 길 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새끼들 데리고 요즘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근심스럽다는 듯이
나의 경제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물었을 때
나는 그랬다 살아보니까 살아지더라, 잘 먹고 잘 산다고
그게 지금은 후회된다 좀더 고통의 포즈를 취할 것을
이놈의 세상 팍 갈아엎어 버려야지, 하며 주먹이라고 좀 쥐어볼 것을
아니면, 나는 한 달에 전교조에서 나오는 생계보조비를
31만원이나 받는다 현직에 계신 선생님들이 봉급에서 쪼개 주신 거다
그래 자기 봉급에서 다달이 만원을 쪼개 남에게 준다는 것
그것 받을 때마다 받는 사람 가슴이 더 쓰린 것
이것이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다 우리들의 사상이다
이렇게 자랑이라도 좀 떠벌이면서 그래서
입으로만 걱정하는 친구놈 뒤통수나 좀 긁어줄 것을
나의 경제야, 나는 내가 자꾸 무서워지는구나
사내가 주머니에 돈 떨어지면 좁쌀처럼 자잘해진다고
어떻게든 돈 벌 궁리나 좀 해 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시지만
그까짓 돈 몇 푼 때문에 친구한테도 증오를 들이대려는
나 자신이 사실은 더 걱정이구나 이러다가는 정말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한 마리 딱정벌레나 되지 않을지
나는 요즘 그게 제일 걱정이구나
(안도현·시인, 1961-)


+ 거대한 소망

아, 그와의 첫 만남은 얼마나 황홀했던가?
두메산골 한 촌놈이 열여섯 어느 봄날
광주의 번화가 충장로 한 중국집에서
그를 처음 만나 한사나흘 밥맛을 잃었던

일곱 살짜리 내 손주 녀석은
왜식집에 가서도 그놈만 찾는,
아니, 조선 팔도의 모든 어린이들이
한결같이 좋아하는,

가난한 이들의 식탁에 자주 올라
그들의 공복을 달래주는
맛있는 한 그릇의 자장면,
손자장면

그 자장면 같은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서민들이 즐겨 찾는
아, 우리들의 대통령
(임보·시인, 1940-)


+ 짜장면을 먹으며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짜장면보다 검은 밤이 또 올지라도
짜장면을 배달하고 가버린 소년처럼
밤비 오는 골목길을 돌아서 가야겠다.
짜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우리들의 사랑은 밤비에 젖고
젖은 담벼락에 바람처럼 기대어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비에 젖는다.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비 적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정호승·시인, 1950-)


+ 자장면의 힘

1.
이제는 사라져 버린 중화반점
앞니 빠진 주방장이 면발을 뽑아내던 중화반점
천장에는 파리 끈끈이가 살랑거리고
이소룡의 맹룡과강을 잘도 흉내내던 짱께네 집
우리는 파리처럼 그놈의 그늘 속으로 모여들었지
이제는 기억 속에만 있는 중화반점
우리는 고요히 복종하는 법을 배웠지
자장면 한 그릇…단무지…양파… 그 속에 들어있는 짱께의
은총
동네 꼬마들을 휘어잡던 자장면의 힘
우리는 너무 일찍 복종의 힘을 알아 버렸지

2.
아파트 계단과 사무실 문밖에 가끔 놓여지는 짱께 그릇들
살아가다 보면 가끔 그때 그 자장면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내가 걸쳐온 옷, 지금까지 그렇게 껴입었던 자존심의
옷들을 홀가분하게 벗어버리고
그 자장면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일회용 그릇에 담겨 있더라도,
일회용 젓가락으로 먹을 수밖에 없더라도
먹고 나면 다 버려질 운명의 것들일지라도
먹는 순간만큼은 황홀한, 사람아
내 가슴 밖으로 내밀어진 자장면 그릇과 나무 젓가락
때로는 눈물나게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사람아,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사람아.
어쩌면 나는
그·때·그·순·간·의·자·장·면을 먹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3.
지금 자장면을 같이 먹는 사람아
비위가 약한 내가
침 묻은 네 젓가락이 면을 비벼도 아무렇지 않고
단무지에 묻은 티끌에도 개념치 않고
씨익 웃으며 함께 먹을 수 있는 기적을 가져다 준 사람아,

이제는 사라져 버린 중화반점
그 때 그 사람들도 다 사라져 버린 중화반점
먹고 먹어도 또 먹고 싶었던 자장면아

나, 아직도
여기 있다
(강수·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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