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시인의 '슬픔을 탈바꿈하는'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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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관한 시 모음> 박재삼 시인의 '슬픔을 탈바꿈하는' 외

정연복 0 18400
<슬픔에 관한 시 모음> 박재삼 시인의 '슬픔을 탈바꿈하는' 외

+ 슬픔을 탈바꿈하는

아무리 서러워도
불타는 저녁놀에만 미치게 빠져
헤어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윽고 밤의 적막 속에
그것은 깨끗이 묻어버리고
다음날에는
비록 새 슬픔일지라도
우선은 아름다운
해돋이를 맞이하는 심사로
요컨대 슬픔을 탈바꿈하는
너그러운 지혜가 없이는
강물이 오래 흐르고
산이 한자리 버티고 섰는
그 까닭 근처에는
한치도 못 가리로다.
(박재삼·시인, 1933-1997)


+ 슬픔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덤덤하거나 짜릿한 표정들을 보았고
막히거나 뚫린 몸짓들을 보았으며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들도 보았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정현종·시인, 1939-)


+ 슬픔

슬픔은
힘이 세다
살과 뼈를
다 녹인다

목숨을
태운 끝에
보이느냐
한 줄기 빛

영혼이
먹고 자라는
식량이다
슬픔은
(유자효·시인, 1947-)


+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 백두산 천지에서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정채봉·아동문학가, 1946-2001)


+ 슬픔에게

슬픔이 오면
내 반갑게 맞으리
고단한 기억을 헤아리며
양지바른 길목이 아니어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한순배 도는 저녁을 위해
슬픔과 동거한 기쁨을 위해,
사랑의 날들은 많지 않으리
내 뜨거운 눈물 있음을
슬픔에게 보여주리
그 쓰린 어깨를 안아주리
(김현성·시인)


+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함민복·시인, 1962-)


+ 깨끗한 슬픔

작은 마당 하나 가질 수 있다면
키 작은 목련 한 그루 심고 싶네
그리운 사월 목련이 등불 켜는 밤이 오면
그 등불 아래서 그 시인의 시 읽고 싶네
꽃 피고 지는 슬픔에도 눈물 흘리고 싶네
이 세상 가장 깨끗한 슬픔에 등불 켜고 싶은 봄밤
내 혼에 등불 밝히고 싶은 봄밤
(정일근·시인, 1958-)


+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시인, 1950-)


+ 타인의 슬픔 1

문득 의자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툭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나호열·시인, 1953-) 


+ 슬플 때는

꽃이 없다고 나비는 슬퍼하지 않는단다.
개미는 바빠서 슬퍼할 겨를이 없단다.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을 따서
가슴 가득 채워 봐.
슬플 때는.

그래도 슬플 땐
들꽃을 만나 봐.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아도
웃고 있지 않니.

그러면
가슴속에 들어 있는 슬픔이
채송화 꽃씨같이 토옥 튀어 나와
동글동글 굴러가 버릴 거야.
(오순택·아동문학가)


+ 슬픔이 나를 깨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느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발 한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 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황인숙·시인, 195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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