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시인의 '편지 쓰는 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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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에 관한 시 모음> 이생진 시인의 '편지 쓰는 일' 외

정연복 0 3578
<편지에 관한 시 모음> 이생진 시인의 '편지 쓰는 일' 외


+ 편지 쓰는 일

시보다 더 곱게 써야 하는 편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서면서
네 살에 파고드는 글
정말 한 사람만 위한 글
귀뚜라미처럼 혼자 울다 펜을 놓는 글
받는 사람도 그렇게 혼자 읽다 날이 새는 글
그것 때문에 시는 덩달아 씌어진다
(이생진·시인, 1929-)


+ 나에게 쓰는 편지

모나게 살자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모서리마다
빛나는 작은 칼날
찬물로 세수를 하며

서리 매운 새벽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이정록·시인, 1964)


+ 편지

기다리면 오지 않고
기다림이 지쳤거나
가다리지 않을 때
불쑥 찾아온다
그래도 반가운 손님.
(나태주·시인, 1945-)


+ 편지

나무가
꽃눈을 피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 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 꽃잎 우표 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달될 수 있을까
그리운 이여,
봄이 저무는 꽃 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오세영·시인, 1942-)


+ 밤에 쓰는 편지

먹을 갈아 정갈해진 정적 몇 방울로 편지를 쓴다
어둠에 묻어나는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어
한줄기 기러기 떼로 날아가고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한 묶음으로 동여맨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올려 드리면
내 가슴에는 외출중의 팻말이 말뚝으로 박힌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그의 먼 안부
동이 트기 전에 편지는 끝나야 한다
신데렐라가 벗어놓고 간 유리구두처럼
발자국을 남겨서는 안 된다
밤에 쓰는 편지는 알코올 성분으로 가득 차고
휘발성이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가 깨어나 창문을 열 때
새벽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푸르러야 한다
맑은 또 하나의 창이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어둠을 갈아 편지를 쓰기 위하여
적막한 그대를 호명하기 위하여
(나호열·시인, 1953-)


+ 슬픈 날의 편지

모랫벌에 박혀 있는
하얀 조가비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

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랠 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이
참된 위로이며 기도입니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믿음을
언제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도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해인·수녀, 1945-)


+ 외국어로 온 편지

방언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말은 분명히 말이니

너는 네 말만 하고
나는 내 말을 할 뿐이나

우리가 서로에게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랴

사랑한다든가, 예쁘다든가
행복하다는 말
고맙다는 방언은
알아들으니,
(김옥남·시인, 1952-)


+ 어머니의 편지

딸아, 나에게 세상은 바다였었다.
그 어떤 슬픔도
남 모르는 그리움도
세상의 바다에 씻기우고 나면
매끄럽고 단단한 돌이 되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돌로 반지를 만들어 끼었다.
외로울 때마다 이마를 짚으며
까아만 반지를 반짝이며 살았다.
알았느냐, 딸아

이제 나 멀리 가 있으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뜨겁게 살다 오너라.
생명은 참으로 눈부신 것.
너를 잉태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했던가를 잘 알리라.
마음에 타는 불, 몸에 타는 불

모두 태우거라
무엇을 주저하고 아까워하리
딸아, 네 목숨은 네 것이로다.
행여, 땅속의 나를 위해서라도
잠시라도 목젖을 떨며 울지 말아라
다만, 언 땅에서 푸른 잎 돋거든
거기 내 사랑이 푸르게 살아 있는 신호로 알아라
딸아, 하늘 아래 오직 하나뿐인
귀한 내 딸아
(문정희·시인, 1947-)


+ 어떤 편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한 사람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숲의 나무들이 시들고
눈발이 몇 번씩 쌓이고 녹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때는
내가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아파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헤어져 돌아와 나는 당신의 아픔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아껴온 나의 마음을 당신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만나
우리 서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도종환·시인, 1954-)


+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시인, 1961-)


+ 겨울 편지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안도현·시인, 1961-)


+ 아플 땐 편지가 쓰고 싶어집니다

감기 몸살에 신음하면서도
몹시 편지가 쓰고 싶어집니다.
아플 땐 왜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지요?
평소엔 아무렇지 않다가도
이렇게 몹시 몸이 아파오면
당신에게 편지가 쓰고 싶어집니다.

아마도 마음 따뜻한 당신의
다정한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애써 애처로이 가련하게 보이고 싶고
공연히 어리광도 피우고 싶어요.

알아요, 감기는 편안하게 쉬면서
주사도 맞고 약도 먹어야지요.
아, 하지만 세상 그 어느 약보다도
그리운 당신의 답장이 훨씬 나은 치료제란 걸
당신은 알기나 하신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요.
이런 날 사랑스런 마음의 답장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시길 부탁해요!
아직 부치지 못한 편지지만......
(강해산·시인, 경남 삼랑진읍 출생)


+ 연애편지를 쓰는 밤

당신이 마련하신
기쁨과 고통의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몇 명이 다녀가셨다지요
꽃을 준비하지 못한 건
시들지 않는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꽃이란 게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하던가요
살아 있음을 인생이라 하고
피어 있을 때만이 꽃이라 하고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요
믿을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대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건
이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정해종·시인, 1965-)


+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시인, 1938-)

* 엮은이 :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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