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의 '감자의 맛'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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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 관한 시 모음> 이해인의 '감자의 맛' 외

정연복 0 7399
<음식에 관한 시 모음> 이해인의 '감자의 맛' 외

+ 감자의 맛

통째로 삶은
하얀 감자를
한 개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해지네

고구마처럼
달지도 않고
호박이나 가지처럼
무르지도 않으면서

싱겁지도 않은
담담하고 차분한
중용의 맛

화가 날 때는
감자를 먹으면서
모난 마음을 달래야겠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마늘촛불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가운데에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복효근·시인, 1962-)


+ 봄동아, 봄똥아

봄동아,
볼이 미어터지도록 너를 먹는다
어쩌면 네 몸 이리 향기로우냐!
오랜만에 팔소매 걷고 밥상 당겨앉아
밥 한 공기 금세 뚝딱 해치운다만
네가 봄이 눈 똥이 아니었다면
봄길 지나는 그냥 흔한 풀이었다면
와작와작 내게 먹히는 변은 없었을 게 아니냐
미안하다만 어쩌겠냐
다음 생엔 네가 나를 뜯어 쌈싸 먹으려므나
살찐 뱃가죽 넓게 펴 된장 바르고
한입에 툭 쳐 넣으려므나
봄의 몸을 받지 못한 나는 구린내만 가득하여
너처럼 당당하지 못하고
다른 반찬 밑에 엎드려 얼굴 가리며
아마 죽은 듯 숨어 있겠지
그렇겠지? 봄동아, 봄똥아.
(황상순·시인, 1954-)


+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시인, 1946-)


+ 별국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히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공광규·시인, 1960-)


+ 홍어

어느 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김희수씨네 마당 한가운데선
김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
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
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
나는 고기가 한 점 먹고 싶고

김치 한 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 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줄 것만 같았다
죄스런 마음에 몇 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
어머니 뱃속에 있던 열 달이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손택수·시인, 1970-)


+ 홍어

말이 좋아 삭힌 거고 숙성이지 결국은 조금 상한 것 아니겠는가
시들어 꽃답고 늙어 사람답고 막다른 골목이 길답고
깨어 헛것일 때 꿈답던 꿈

우리의 한 시절은 모두 비非철에 이루어진다
냉동실에 안치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는 박봉규씨만 봐도 그렇다
노점공구상 그가 폭력적인 단속에 항의하다 분신, 목숨을 잃자
사람들은 그를 열사라 불렀다 우리 모두 열사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는 추리소설의 시작처럼 죽었고 덕분에 살아남은 우리들이 판을 쳤다

어둠아, 사람만큼 상한 영혼을 가진 물건이 어딨더냐
죽을똥 살똥 살아도 허구헌 날, 그날이 그날인 사람아
(신정민·시인, 전북 전주 출생)


+ 마누라 음식 간보기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내 앞에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 한다

그러면
"음, 마침맞구먼, 맛있네!"
이것이 요즈음 내가 터득한 정답이다.

물론,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지만―

만일
"좀 간간한 것 같은데" 하면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뭣이 간간허요? 밥에다 자시면 딱 쓰것구만!'
하신다.

만일
"좀 삼삼헌디" 하면
또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짜면 건강에 해롭다요. 싱겁게 드시시오."
하시니 할말이 없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고?
아내 음식 간 맞추는 데 평생이 걸렸으니

정답은
"참 맛있네!"인데 
그 쉬운 것도 모르고…
(임보·시인)


+ 시래기를 위하여

고집스레 시래깃국을 먹지 않던 날들이 있었다
배추나 무의 쓸데없는 겉잎을 말린 것이 시래기라면
쓰레기와 시래기가 다른 게 무엇인가
노오란 배춧속을 감싸고 있던
너펄너펄 그 퍼런 잎들
짐승 주기는 아깝고 있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는 것
그 중간 아래 영하의 바람 속에서
늘 빳빳하게 언 채 널려있던 추레한 빨래처럼
궁색의 상징물로 처마에 걸려있던 시래깃두름이
부끄러워서였는지도 모른다
난 시래기로나 엮일 겉잎보다는
속노란 배춧속이거나 매끈한 무 뿌리이기만을 꿈꾸었을 것이다
세상에 되는 일 많지 않고 어느새
진입해보지도 않은 중심에서 밀려나 술을 마실 때
술국으로 시래기만한 것이 없음을 안다
내가 자꾸 중심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뛰고 있을 때
묵묵히 시래기를 그러모아
한 춤 한 춤 묶는 이 있었으리라
허물어가는 흙벽 무너지는 서까래 밑을 오롯이 지키며
스스로 시래기가 된 사람들 있었으리라
알찬 배춧속을 위해 탄탄한 무 뿌리를 위해서
시래기를 배운다
시래기는 쓰레기가 아닌 것이다
(복효근·시인, 1962-)


+ 어떤 미식가 

봄에는
홍어 내장으로 보릿국을 끓이고
여름에는
개불이나 하모 같은 갯것에 입을 대고
가을에는
석쇠 위에 전어를 굽고
겨울에는
매생이국을 후후 불며 떠넣는다

낯선 음식에 길들여지는 동안에도
사람에 대한 입맛은 까다로워져
마음의 끼니를 거르는 날이 늘어간다

온기 없는 방에서
간장에 절인 김 장아찌 몇 조각에
혼자 마른 밥알을 곱씹는 저녁

검은 김에 우연히 뿌려진 깨소금 몇 알이
혀끝에 돌올하게 느껴지는 저녁

낯선 음식에 길들여지는 동안에도
마음은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아
낯선 곳에 흩뿌려진 자신을 곱씹고 있는
어떤 미식가
(나희덕·시인, 1966-)


+ 깊은 맛

모름지기 배추는
다섯 번은 죽어야
깊은 맛을 얻을 수 있다는데

밭에서 잘 자란 놈을
모가지 잡아채서 쑤욱 뽑아내니
그 첫 번째요
도마 위에 올려놓고
번득이는 칼로 몸통을 동강내니
그 두 번째요
커다란 고무다라에
소금물 뒤집어쓰고 누웠으니
그 세 번째요
고춧가루에 마늘에 생강에
온몸이 붉은 피로 뒤범벅이 되었으니
그 네 번째요
마지막으로 독이란 관에 묻혀
흙 속으로 다시 돌아가니
그 다섯 번째라

푸르뎅뎅한 겉절이 같은 것이 아니라
시큼털털한 묵은지 같은 것이 아니라
쓴맛에 매운 맛에 단맛까지
몇 번은 죽어
깊은 맛을 내는 김치처럼

우리네도
몇 번은 죽었다가
몇 번은 살았다가
곰삭은 인생이야말로
깊은 맛을 지니는 것 아닌가

잘 익은 저 주검을
손으로 집어
한 입 먹어주는 것도
生에 한 발 더 깊이 빠지는 일이겠다
(김종제·시인, 1960-)


+ 밥 먹는 자식에게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거여.
(이현주·목사)


+ 어머니의 감성돔

진해 어머니 감성돔 두 마리 보내셨다
아마 중앙시장 어물전에서 물 좋은 그놈들 보시고
산골에 엎드려 시 쓰는 내 생각 났을 것이다

크고 튼실한 놈이라 값도 만만찮을 것인데
어머니 망설이지 않고
용돈 주머니 다 터셨을 것이다

마흔 중반을 살면서도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어린 새끼다
집 떠난 지 스무 해가 지났어도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 새끼다

그 스무 해 혼자 헤엄치며
어머니의 바다 멀리 떠나왔나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언제나 어머니의 손바닥 안이다

어머니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어머니의 밥상에는 무엇이 오르는지 모르는
불효한 내 식탁으로 내일 아침
감성돔 구이가 오를 것이다

늘 혼자 드시는 어머니의 밥상으로
살진 감성돔 되어 회향하고 싶은 밤

......어머니
(정일근·시인, 195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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