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곡선의 말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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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관한 시모음> 김선태의 '곡선의 말들' 외

정연복 0 3838
<말에 관한 시모음> 김선태의 '곡선의 말들' 외

+ 곡선의 말들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무심코 지나치는
걸어가다, 돌아가다, 비켜서다, 쉬다 같은 동사들...
느리다, 게으르다, 넉넉하다, 한적하다, 유장하다 같은
형용사들...
시골길, 자전거, 논두렁, 분교, 간이역, 산자락, 실개천 같은
명사들...
직선의 길가에 버려진
곡선의 말들.
(김선태·시인, 1960-)


+ 말

산에 사는 산사람은
말이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을
산에서 살다보니 말을 잃었다.

지저귀는 새소리 듣기 좋고
피고 지는 꽃들이 보기 좋고
산이 좋고, 물이 좋고
구름도 좋고

그 많은 것 어떻게
말로 다 하나
그저 빙그레 바라만 본다.
(정원석·시인)


+ 사랑의 말

여기는 바다
고통 속에 진주를 만드는
기다림의 세월

마르지 않는 눈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기는 산

뿌리 깊은 나무를 키우는
흙냄새 가득한 기도

끝없는 설레임의 웃음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그냥이라는 말

그냥이라는 말
참 좋아요
별 변화 없이 그 모양 그대로라는 뜻
마음만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난처할 때
그냥했어요 라고 하면 다 포함하는 말
사람으로 치면
변명하지 않고 허풍 떨지 않아도
그냥 통하는 사람
그냥이라는 말 참 좋아요
자유다 속박이다 경계를 지우는 말
그냥 살아요 그냥 좋아요
산에 그냥 오르듯이
물이 그냥 흐르듯이
그냥이라는 말
그냥 좋아요
(조동례·시인)


+ 내가 좋아하는 말

넘쳐 나는 말들 중에서
꼭 몇 마디만 골라야 한다면
이런 말을 고르고 싶다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고
아무리 써도 변함이 없어
자꾸만 쓰고 싶어지고
쓸 때마다 그 말처럼 돼 버리는 말
생각만으로도 웃음 절로 나고
바라보고만 있어도 든든해지고
소리 높이지 않아도 말할 수 있고
언제 들어도 가슴 두근거리는 말
사람들에게서 처음 배워
사람들 속에서 마지막까지 쓰고 싶은
한 번쯤은 일부러라도 쓰고 싶은
그래서 남들도 좋아하는 말
"우리"
"사랑해요"
이런 말을 고르고 싶다
(최동희·시인)


+ 참 좋은 말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 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600 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 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으나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 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천양희·시인, 1942-)


+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행위는
타인을 위로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를 최고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말하자면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다 운 좋게 이루어진 것으로서,
미처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분 좋은 사건이다.
(피에르 쌍소·속도를 무너뜨린 '느림의 철학자' )


+ 동그라미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코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땅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이대흠·시인, 1968-)


+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개꽃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개꽃 뒤에 뒷짐을 지고 선 미루나무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들판에 사는 풀이며 메뚜기며 장수하늘소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 말을 옮겼다 반짝이는
창유리에게, 창유리에 뺨을 부비는 햇빛에게
햇빛 속의 따뜻한 손에게도 말을 옮겼다
집도 절도 차도, 젓가락도 숟가락도, 구름도 비도
저마다 이웃을 찾아 말을 옮겼다

새들은 하늘로 솟아올라 그 하늘에게,
물고기들은 물밑으로 가라앉아 그 바닥에 엎드려
잠자는 모래에게,
아침노을은 저녁노을에게,
바다는 강에게 산은 골짜기에게
귀신들은 돌멩이에게
그 말을 새겼다

빨강은 파랑에게 보라는 노랑에게, 슬픔은 기쁨에게
도화지는 연필에게, 우리집 예쁜 요크샤테리어종
콩지는 접싯물에게, 태어남은 죽음에게
그리고 나는 너에게
(박제천·시인, 1945-)


+ 참 긴 말

일손을 넣고 해 지는 것을 보다가
저녁 어스름과 친한 말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저녁 어스름, 이건 참 긴 말이리
엄마 언제 와? 묻는 말처럼
공복의 배고픔이 느껴지는 말이리
마른 입술이 움푹 꺼져있는 숟가락을 핥아내는 소리같이   
죽을 때까지 절망도 모르는 말이리
이불 속 천길 뜨거운 낭떠러지로 까무러치며 듣는
의자를 받치고 서서 일곱살 붉은 손이
숟가락으로 자그락자그락
움푹한 냄비 속을 젓고 있는 아득한 말이리
잘 있냐? 병 앓고 일어난 어머니가 느린 어조로
안부를 물어오는 깊고 고요한 꽃그늘 같은 말이리
해는 지고 어둑어둑한 밤이 와서
저녁 어스름을 다 꺼뜨리며 데리고 가는
저 멀리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집
괜찮아요, 괜찮아요 화르르 핀 꽃처럼
소리 없이 우는 울음을 가진 말이리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저녁 밥상 앞
자꾸자꾸 자라고 있는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는
엄마 언제 와? 엄마, 엄마라고 불리는 참 긴 이 말
겨울 냇가에서 맨손으로 씻어내는 빨랫감처럼
손이 곱는 말이리 참 아린 말이리
(강미정·시인, 경남 김해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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