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철 시 모음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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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철 시 모음 30편

김용호 0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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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철 시 모음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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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 끝

      나해철

자정 넘어 든 잠자리에서
바라보는 창문에 나무 그림자가 서렸다
가을은 너무 깊어 이미 겨울인데
저 나무를 비추고 서 있는 등불은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
갑자기 어려 저서 철없이 하는 말을 듣고
옆에 누운 사람이 하는 말
그럼 나가서 그 등불이나 껴안아주구려
핀잔을 준다
그래 정말 막막한 이 밤 등불의 친구나 될까보다
괜스레 마음은 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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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겨울 버스

  나해철

코끝이 어는 승강장에 서면
너처럼 오고 또 너처럼 오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가족을 모아 고향을 일구고 싶은 아버지의 꿈과
산 바위 위에서나 소리쳐 부르는 스무 살 동생의 터질 듯
한 가슴과
끝끝내 기다림의 불쏘시개만 넣고 마는 새벽마다의 시
뱃속까지 시원하고 다디단 바람의 어느 봄
일렁이며 터져 남이나 북 개울과 마을을 환히 밝힐
그 날의 빛들을 생각한다.
길이 멀고 끝이 없으면 그만큼 더디 오고
기다리는 사람이 몇 안될수록 애터지게 오지 않는
너는 그러나 온다.
황혼 그리고 어둠이 들어 모두들 쓰러져 눕기 전
언제나 눈부신 소리로 먼저 온다.
얼어붙은 손끝과 가슴 하늘과 산 그림자가 깨어나며
달려가 맞이하는 기다림의 끝. 평화와 따뜻한 것.
버스에 오르면 풀밭처럼 잡목림처럼 안기고 섞이어
살의 온기로 데우고 서로 녹여
살붙이로 하나가 되는 사람들.
희망은 너처럼 오지 않고 또 너처럼 온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쁨과 눈물겨움
감사와 복된 춤 노래와 빛이 터지는
그날의 이 땅 위에 서듯
흙도 피도 얼어붙는 칼바람 속에서 버스에 오르면
기어코 너처럼 오고야 마는 우리들의 희망에 대해서 생
각한다.
몸은 덥혀지고
누군가를 데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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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건 아야해

    나해철

풀을 꺾는 내 아이에게
풀은 아프다고 알려줬다.
아이는 꺾인 것을 보면
언제나 아야해
그건 아야해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나
바보와 같은 이 행성.
이쪽과 저쪽에서 끊임없이
버려지는
귀한 그 누구의 아버지, 누군가의
자식과 아내, 그 행복,
불도저에 밀리는 가족과
족속, 그들의 평화와 기도.
이대로 간다면
사랑과 따뜻함을 다 익히기도 전에
증오와 파괴의 추문은
해일처럼 밀어닥칠 것이고
너는 지극한 슬픔,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울 것이다.
아이야 너는 오늘도
꽃을 꺾는 한 어른에게
아야해, 그건 아야해
작은 풀밭의 나라를 떠나며
풀꽃들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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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리운 이에게

    나해철

사랑한다고 말할 걸.
오랜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도
그리움은 가슴 깊이 박혀 금강석이 되었다고 말할 걸.
이토록 외롭고 덧없이 홀로 선 벼랑 위에서 흔들릴 줄 알았더라면
세상의 덤불가시에 살갗을 찔리면서라도
내 잊지 못한다는 한 마디 들려줄 걸.
혹여, 되돌아오는 등뒤로
차고 스산한 바람이 떠밀고 가슴을 후비었을지라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사랑이 꽃같이 남아 있다고
고백할 걸...
그리운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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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까치

      나해철

감나무 가지 위의 까치 세 마리
어둠의 빗장을 끄르고 있네

돌쩌귀 미끌리며 문 열리는 소리

살아 있으므로 느끼는 것은
오직 한가지
문 밖에 황홀히 빛나는
자유

반가워 나아가니
문 밖은 아직 어둡고
까치들만 앞서 날아가 또 다른 문을 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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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무숲에서

    나해철

나무는 언제라도 무리져 직립한 채 있다.
베인 가슴으로 이 시대 영혼이 이렇듯 숲에 들면
그 자리 그대로 곧추선 나무들 때문에
우리는 다시 고귀한 무엇이 된다.
살 속에 흐르는 가락은 절로 넘치는데
거리와 작은 방 광장에서
그립고 눈물겨운 것들을 위하여 노래하지 못하고
달팽이처럼 살기로 하거나
밤 깊도록 불밝히고 섰자면
바보와 천한 것들로 쓰러져
이 끝과 저 끝에서 씻기우거나 아파하다가
산에 들면 다시 지상의 고운 한 생명으로
구부러진 영혼의 곱추를 세운다.
이 흙 위에 새와 꽃바람
사람과 사람이
깨끗이 어울려 살날이 오리라
기다림과 바램으로
자주 울고 무너지는 사람들.
그늘과 양지의 나무들
숲의 꿈을 꾸면 무성하여 숲이 되고
밀림은 밀림이 되고
산맥이 되리라 기원하면 곧추서서 그리 되는
희망의 땅과 숲에 들자
새벽바람의 숨쉼으로
맑은 하늘의 이마로 푸르름으로
다시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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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몰래 흘리는 눈물

      나해철

꽃 그늘 졌다
지금 꽃 그늘 아래서
어룽어룽 그늘진 꽃 무데기를 본다
송이마다 꽃들은
조금씩 다르게 어딘가를 바라보며
무한히 고요히
햇빛 밖에 그늘 밖에
있다
누가 소리하나
남몰래 남몰래라고
목이 타서
꽃들은
세상 너머나 바라보는 듯
그날밖에 햇빛 밖에
가만히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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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내 마음의 가을

        나해철

붉은 단풍잎처럼 얇아서
디뎌 밟으면
바스러질 무엇이 거기 있다
그때쯤이면
꼭 무엇이던가 디뎌 밟으며
떠나는 것이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을
견디어낸다는 것일까
견디어낼수록
그렇게 되어가는 것일까
요즈음 몇 일에
십 년이 늙었다
고개를 숙이면
단풍 든 이파리가 아주 말라서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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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 마음의 겨울

      나해철

입김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낸다
사라진다
건너가보지 못하고
소멸이다
그와 같다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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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 마음의 첼로

      나해철

텅 빈 것만이 아름답게 울린다
내 마음은 첼로
다 비워져
소슬한 바람에도 운다
누군가
아름다운 노래라고도 하겠지만
첼로는 흐느낀다
막막한 허공에 걸린 몇 줄기
별빛같이
못 잊을 기억 몇 개
가는 현이 되어
텅 빈 것을 오래도록 흔들며 운다
다 비워져
내 마음은 첼로
소슬한 바람에도
온몸을 흔들어 운다
☆★☆★☆★☆★☆★☆★☆★☆★☆★☆★☆★☆★
《11》
넥타이

      나해철

그렇게 말고 이렇게
매듭을 묶을 수도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니
그 후로 그렇게 말고
이렇게도 인생을
묶으며 살아왔다
아니 늘 이렇게만
살았다
이렇게 묶을 때마다
네가 준 내 인생 때문에
사무쳐 목이 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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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해철

눈이 허리까지 내려 쌓인 날
태어났다 했었지
골짜기 깊은 곳에서
붉은 동백처럼 피어났겠구나
그래 네 사랑은
눈에 갇힌 동백과 같았다
붉어서 아프고
흰 눈 속이어서 아팠다
하얗게 바랜
내 가슴의 흰 눈밭에
너는 붉게 피어서
동백같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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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해철

너를 만나려면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달아 너의 몸 아래 내 몸 눕히려면
어두워야만 한다
황홀한 네 빛이
내 영혼에 가득하기까지는 밤이 와야 한다
햇빛에서는 아름다운 네 모습 볼 수 없어
그러므로 밤뿐인 사랑
어둠뿐인 사랑이다
달아 이지러져서 내 심장 멎게 하다가
터질 듯 차올라 내 가슴
달뜨게 하는 달아
너를 만나려면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밤뿐인 사랑
어둠뿐인 사랑이다
☆★☆★☆★☆★☆★☆★☆★☆★☆★☆★☆★☆★
《14》
담쟁이

  나해철
 
살았을 뿐이다
살아내야 할 시간을
견디며
빈자리에
푸른 잎을 토해냈을 뿐이다
다만
절체절명
사는 일을 위하여
살아냈을 뿐이다
오늘 너는
흰 절벽을 푸르게 덮었다고 하는구나!
시간들이
직벽으로 서 있었는가?
절벽에서 살아왔는가?
절체절명
이 시간
살이 터지며 또 푸른 것
하나 토하자꾸나
☆★☆★☆★☆★☆★☆★☆★☆★☆★☆★☆★☆★
《15》
동해일기·3

      나해철

바다에 서면
이제는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생각난다
부서진 유리창처럼
상처의 숲을 이룬 가슴이
구석구석 따뜻해지면 평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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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두엄자리

      나해철

두엄은 썩어서 금비가 되는데
지푸라기, 돼지똥, 닭똥 그리고 오줌이
섞여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료가 되는데
벼가 먹고 보리가 마셔서
살이 통통 오르는 영양식이 되는데
헛헛한 내 가슴은
썩어도 어디 붙일 데 없다
가슴을 두엄자리에 내려
독새풀, 엉겅퀴, 억새, 물풀들과 포개져서
다 탄 재와 똥오줌에 달구어져
질 좋은 퇴비가 되면 좋겠는데
땅 위에 떠서 흔들리는 저 가벼운
내 가슴
누구를 만나 껴안아도
안기는 건 저같이 무게도 없는
빈 뼈의 집
☆★☆★☆★☆★☆★☆★☆★☆★☆★☆★☆★☆★
《17》


    나해철

한겨울 마른 나뭇가지 끝에도
주먹만큼 별들은 매달려
외로워
외로워 말라고
파랗게 빛나는데
아직은 심장에 따뜻한 피 흐르는
내 가슴과 어깨 위에
어찌 별들이 맺혀 빛나지 않겠는가
사람들아 나를 볼 때도
겨울 나무를 만날 때도
큰 눈에 어린 눈물보다 더 큰
별이 거기 먼저 글썽이고 있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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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봄날과 시

      나해철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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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해철

불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따스하게 찬 것들을 덥히고
온전히 재가 되는 것을 보면
역사의 꽃밭마다 몸을 던져
죽어서도 온기로 남아 있는 그대들이 생각난다.

우리는 불 주위의 새벽에
침묵으로 앉았다. 우리는 덥혀졌으며
추운 거리와,
거리의 방패, 구둣발을 잊었다.
가장자리와 가운데 어디서나 불은 타오르고
하늘의 흐린 별까지 닿아 올랐다.
눈시울에 몇 장의 낙엽처럼 떠오르는
지난 새벽과 정오, 황혼의
이 땅, 절망과 증오, 답답함과 비애에 대해서
오래 말들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불과
불의 순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생은 귀하고
이 흙 위의 우리들 삶에
눈물겨운 것들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알았다.
불 속에 한줌의 슬픔을,
누구는 한움큼 마른 뼈를 넣고 또 던지며
우리는 기다렸다.
새벽 불의 완성을,
우리들 기도의 간절한 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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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나해철

비오는 날을
젖었다

함께라면 기쁨에
따로라면 그리움에
젖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당신은 뼈아픔에
나는 슬픔에
젖었다

당신 얼굴에 흐르는 비로
멀리서도
내 얼굴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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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비 오는 날은

    나해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함께라면 기쁨에
따로라면 그리움에
젖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당신은 뼈아픔에
나는 슬픔에
젖었다
당신 얼굴에 흐르는 비로
멀리서도
내 얼굴 젖었다
☆★☆★☆★☆★☆★☆★☆★☆★☆★☆★☆★☆★
《22》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나해철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때로는 나란히 선 키 큰 나무가 되어
때로는 바위 그늘의 들꽃이 되어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온 산과 들이 비워진다 해도
여윈 얼굴 마주보며
빛나게 웃어라
두 그루 키 큰 나무의
하늘쪽 끝머리마다
벌써 포근한 봄빛은 내려앉고
바위 그늘 속 어깨 기댄 들꽃의
땅 깊은 무릎 아래서
벌써 따뜻한 물은 흘러라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세월은 무정타고 말하여져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벌써 봄 향기 속에 있으니
여윈 얼굴로도 바라보며
빛나게 웃어라
☆★☆★☆★☆★☆★☆★☆★☆★☆★☆★☆★☆★
《23》
세탁기

      나해철

한 세상 잘 놀다 간다는 말은
나, 게으르게 살았다는 말
나, 죄가 크다는 말
나, 한 세상 잘 놀고 있다
양심은 팬티와 같은 것
가끔 벗어서 세탁기에 빤다
말려서 다시 입는다

한 세상 슬픔을 잊고 웃다 간다는 말은
나, 독하게 살았다는 말
나, 한을 주었다는 말
나, 한 세상 늘 웃고 있다
의무는 런닝셔츠와 같은 것

나의 세탁기에서는
땟물과 함께
눈자위 붉은 그리움이
배수구를 통해 흘러나간다
☆★☆★☆★☆★☆★☆★☆★☆★☆★☆★☆★☆★
《24》
쓸쓸한 그것

      나해철

나뭇잎을 물들이다 떨어지게 하는 것
세월을 밀어 한 시대를 저물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시집도 편지도 태워서 재가 되게 하는 것
살도 뼈도 누우면 흙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
《25》
오래 되었네

      나해철

오래 되었네
꽃 곁에 선 지

오래 되었네
물가에 앉은 지

오래 되었네
산길 걸어 큰 집 간 지

오래 되었네
여럿이서 공놀이 한 지

오래 되었네
사랑해 사랑해 속삭여 본 지

오래 되었네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낸 지

오래 되었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 다정하게 불러 본 지

오래 되었네
산 밑 집에서 들을 바라보며 잠든 지

오래 되었네
고요히 있어 본 지

오래 되었네
고요히 고요히
앉아 있어 본 지
☆★☆★☆★☆★☆★☆★☆★☆★☆★☆★☆★☆★
《26》
웃음소리

      나해철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버렸어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던 것들을
찢어 부수고 보여주었어
하늘을
푸른 하늘을
시간과 공간이
바람처럼 떠도는
푸르른 하늘로 된 세상을
열어주었어
한 번의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주었어
내 생의 가면을
☆★☆★☆★☆★☆★☆★☆★☆★☆★☆★☆★☆★
《27》
웃음소리

      나해철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버렸어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던 것들을
찢어 부수고 보여주었어
하늘을
푸른 하늘을
시간과 공간이
바람처럼 떠도는
푸르른 하늘로 된 세상을
열어주었어
한 번의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주었어
내 생의 가면을
☆★☆★☆★☆★☆★☆★☆★☆★☆★☆★☆★☆★
《28》


    나해철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빛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와
벽지에 남은 어린 아들의 희미한
그림이 보인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린다
베란다를 지나는 바람과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들린다
지친 몸일 때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그들이 안 들리던 그들이
눈도 귀도 어루만지며
곁에 와 함께 눕는다
☆★☆★☆★☆★☆★☆★☆★☆★☆★☆★☆★☆★
《29》
화해를 위하여

      나해철

새벽이면 이슬에 새들은 부리를 닦고
풀잎들도 정결해진다
외로운 그대
이 땅 어디나 펼쳐진 부드러운 산자락과
푸르른 들판을 보라
곳곳에 희고 허리 굽은 억새로 노동하며 모여 있는
우리를 보아라
그대의 꿈은 이방의 것
그대의 쇠는 모질다
그대는 빛 속에 우리는 뒷전에 있으나
지금 우리는 새벽에 있고
그대는 차라리 어둠에 있다
새벽은 모두가 새로와지는 것
호젓한 능성이 이 땅 한줌 흙으로 태어난 형제여
아교와 같은 어둠을 벗고
이제 돌아오라
헹구어진 얼굴로
잠방이인 채로 황토 묻은 발걸음으로
새벽에 선 우리들 싱그런 가슴으로 오라.
☆★☆★☆★☆★☆★☆★☆★☆★☆★☆★☆★☆★
《30》
후회

    나해철

해준 것 없구나
사랑이여
반지도 팔찌도
옷도 구두고
집도 자동차도
해주지 못했구나
그대 목마를 때
한 종지 물만 건네주었구나
그대 눈시울 젖을 때
입술만 대어 닦아주었구나
속절없는
사랑이라는 말만
사랑이라는 말만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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