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천 시 모음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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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천 시 모음 25편

김용호 0 1040
윤수천 시 모음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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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난한 자의 노래

윤수천

가난도 잘만 길들이면 지낼만 하다네
매일 아침 눈길 주고 마음 주어 문지르고 닦으면
반질반질 윤까지 난다네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는 되지 못해도
그런대로 바라보고 지낼만 하다네

더욱이 고마울 데 없는 것은
가난으로 돗자리를 만들어 깔고 누우면
하늘이 더 푸르게 보인다네
나무의 숨소리도 더 잘 들리고
산의 울음소리도 더 맑게 들린다네

더욱이 고마운 것은 가난으로
옷을 기워 입으면
내 가까이 사람들이 살고 있고
내가 그들 속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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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히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윤수천

사는 일은 무서움이다.
사랑도 다를게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사랑을 흉내낼 뿐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다.
그런 후에 다들 모여서
사랑했었다고 말한다.
후회스러운 부끄러움이여!
사랑이 진실하지 않으면,
삶도 진실일 수 없다.
목숨을 걸어본 경험없이는,
감히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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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두 뒷굽을 갈며

윤수천

비스듬히 닳은 구두 뒷굽을 갈면서
내 인생도 저렇게 비스듬히 닳은 것을 깨닫는다
허, 이럴수가!

내 딴에는 똑바로 걸어갔다고 생각했느데 그게 아니다
뒤뚱거리지 않았으면 생기지도 않았을
저 흠집

등 뒤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었겠지
저 사람 좀 보게나, 저 사람 좀 보게나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겠지

비스듬히 닳은 구두 뒷굽을 갈면서
내 인생도 저렇게 비스듬히 닳은 것을 깨닫는다
허, 이럴수가! 이럴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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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윤수천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로 부서진다 해도
아깝지 않을 거야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부서져서
하얀 포말로
그대의 발치에 머무른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랑
아낌없이 주고 남은 재처럼
거룩한 사랑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완전하고
비로소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한 그루 나무로
그대 안에서
고이 숨을 쉴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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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둥과 언덕

윤수천

만원 전철 안에서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서 있을 수 없다
내 옆사람 또 옆사람들이
기둥이 되어 줄 때
나도 하나의 기둥으로 설 수 있다

어찌 전철 안에서뿐이랴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내 이웃 또 이웃들이
보이지 않는 언덕이 되어 줄 때
나도 하나의 언덕으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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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꽃은 밤에도 불을 끄지 않는다

윤수천

한 목숨 다 바쳐도 좋을 사랑 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깊이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시간은 항상 짧은 것
더 이상 서성거릴 시간이 없다

사랑의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놓친 열차는 절대로
아름답지 않다

적극적인 사랑
오, 적극적인
사랑 사랑 사랑

지옥에 떨어져도 후회하지 않을 사랑 있다면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깊이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시간은 항상 짧은 것
더 이상 서성거릴 시간이 없다
☆★☆★☆★☆★☆★☆★☆★☆★☆★☆★☆★☆★
《7》
녹차를 마시며

윤수천

그대를 생각한다
추운 겨울날
팔달산 돌아 내려오다가
녹차 한 잔을 나누어 마시던
그 가난했던 시절의 사랑을 생각한다

우리는 참 행복했구나
새들처럼 포근했구나

녹차를 마시며
그대를 생각한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따뜻했던
우리의 사랑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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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늦가을 들판에서

윤수천

다들 돌아가는구나
풀도 벌레도 다들 돌아가는 구나

풀들의 집은 어디일까
벌레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우리도 돌아가고 싶구나
따뜻한 등불 하나 켜놓은 집
그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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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면도를 하면서

윤수천

아침마다 수염을 깎는 이 즐거움
나도 한 나라를 정벌할 수 있고
새로운 땅에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이 유쾌함

나는 오늘도 나의 나라를 세운다
청청한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말한다

불의는 가라 불의는 가라
정의와 도덕의 나라를 세우리라

나는 오늘도 수염을 깎으며
새로운 나의 나라
자유가 초원처럼 펼쳐진
그 융성의 나라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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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목숨을 거는 사랑

윤수천

사는 일은 무서움이다.
사랑도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사랑을 흉내낼 뿐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다.
그런 후에 다들 모여서
사랑했었다고 말한다.

후회스러운 부끄러움이여
사랑이 진실하지 않으면
삶도 진실일 수 없다.

목숨을 걸어본 경험 없이는
감히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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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랑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윤수천

깊은 사랑은 깊은 강물처럼
소리를 내지 않는다.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으로 성숙할 뿐
그리하여 향기를 지닐 뿐

누가 사랑을 섣불리 말하는가
함부로 들먹이고 내세우는가
아니다. 사랑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감추어지고 깊이 묻힌다.

사람과 사람 사이
비로소 그윽해지는 것
서로에게 그 무엇이 되어주는 것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가는 것
그리하여 향기를 지니는 것

사랑은 침묵으로 성숙할 뿐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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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산이 있는 풍경

윤수천

산을 내려갈 때에는
언제나 허리를 낮추어야 한다
뻣뻣하게 세우고 내려갈 수는 없다
고개도 숙여야 한다
고개를 세운 채 내려갈 수는 없다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고 위를 쳐다보면
아, 하늘은 높고 푸르구나

이것이다
산이 보여주려는 것
하늘은 무척 높다는 것
푸르다는 것

사람보다 훨씬 크다는 것
이것을 보여주려고
산은 날마다 손을 내밀어
오라 오라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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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상처

윤수천

칼에 베이면
상처가 밖으로 남지만
사랑에 한 번 베이면
보이지 않는 상처가 가슴에 남는다.

진실로 아름다운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상처를 지니고 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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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소금 같은 이야기 몇 줌

윤수천

이왕이면 소금 같은 이야기 몇 줌
가슴에 묻어 두게나

당장에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겠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도 다 추억이 된다네

우리네 삶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
즐거웠던 일보다는 쓰리고 아팠던 시간이
오히려 깊이 뿌리를 내리는 법

슬픔도 모으면 힘이 된다
울음도 삭이면 희망이 된다

정말이지 소금 같은 이야기 몇 줌
가슴에 묻고 살게나

세월이 지나고
인생이
허무해지면
그것도 다 노리개감이 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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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슬픈 노래가 오히려 기쁨이 되는 강

윤수천

사랑이 설움이라 할지라도
나는 비켜가고 싶지 않습니다.
설혹 한 생을 바치고도
눈짓 한 번 받아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회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시퍼렇게 피멍 들어
바위가 되거나
빨갛게 타고 타서
숯검정이 된다 해도
당신을 향한 이 마음은
오직 기쁨,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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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윤수천

사람들이 친할 수 있으려면
뭐라도 한 가지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우리 글 쓰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은
글을 밥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누런 원고지를 퍼런 지폐보다도 더욱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닌 남들이 본다면
우리는 참 한심스러운 사람들이다

밥이 되지 않는 시
돈은 더더욱이나 되지 못하는 시를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시는 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밥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돈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시는 아름답다
새나 꽃처럼 아름답다

시는 밥이나 돈은 되지 못하지만
새나 꽃이 되기 때문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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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시간

윤수천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 죄가 아니다
시간을 허비한 것도 죄가 된다
빠삐용이 죽음 직전까지 가서
깨달았던 것도
시간을 허비한 것에 대한 낭비죄였다

내일은 언제나 올 것 같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최선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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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내

윤수천

아내는 거울 앞에 앉을 때마다
억울하다며 나를 돌아다본다
아무개 집안에 시집 와서
늘은 거라고는 밭고랑 같은 주름살과
하얀 머리카락뿐이라고 한다

아내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모두가 올바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내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슬그머니 돌아앉아 신문을 뒤적인다

내 등에는
아내의 눈딱지가 껌처럼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잠시 후면
아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발딱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환하도록 문지르고 닦아
윤을 반짝반짝 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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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름다운 아내

윤수천

아내여, 아름다운 아내여.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어도
변치 않고 살아주는 아름다운 아내여.

세상의 파도가 높을지라도 좀처럼 절망하지 않는
나의 아름다운 아내여. 방파제여.

당신은 한 그루 나무다.
희망이라는 낱말을 지닌 참을성 많은 나무다.
땅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꽃을 피우는 억척스런 나무다.

아내여, 억척스런 나무여.
하늘이 푸르다는 것을 언제고 믿는 아름다운 나무여.
나의 등이 되어주는 고마운 나무여.

아내는 방파제다.
세월 속의 듬직한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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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아름다운 이별

윤수천

우리는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오래 빛날 수 있다.

저 높은 곳의 별처럼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더욱 확실할 수 있다.

누가 이별을 눈물이라 했는가
아픔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빛날 수도 없다
아픔이 크면 클수록 더욱 빛나는
이별은 인생의 보석이다.

헤어짐을 서러워하지 말라
이별은 초라하고 가난한 인생에
소중하고 눈부신 보석을 붙이는 일

두고두고 빛날 수 있는
사랑의 명패를 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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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름 속으로

윤수천

돌아가고 싶다
뜨거운 폭양 속으로
피라미떼 하얀 건반처럼 뛰어 놀던
그 시냇물
악동들 물장구치던 그 여름 속으로

뜨거운 맨살의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
악동들 다시 불러모아
온 산천을 발칵 뒤집어놓고 싶다
매미들도 불러다가
한바탕 축제를 열고 싶다

쇠꼬챙이처럼 내리꽂히는 불볕화살
가마솥 같은 여름 한낮에
온몸 열어 태우고 싶다
온갖 세상의 땟자국들을
말끔히 지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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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인생이란

윤수천

남기려고 하지 말 것

인생은
남기려 한다고 해서
남겨지는 게 아니다

남기려고 하면 오히려
그 남기려는 것 때문에
일그러진 욕망이 된다

인생이란 그저
사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정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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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할머니는 바늘구멍으로

윤수천

할머니가 들여다보는
바늘구멍 저 너머의 세상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잖는데
할머니 눈에는 다 보이나 보다.

어둠 속에서도
실끝을 곧게 세우고는
바늘에 소리를 다는
할머니 손

밤에 보는 할머니의 손은 희다.
낮보다도 밝다.

할머니가 듣고 있는
바늘구멍 저 너머의 세상 소문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잖는데
할머니 귀에는 다 들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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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항아리

윤수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항아리 속에서는
구름이 떠간다.

꽃구름
뭉게구름
소나기구름.

아무도 없는 데도
항아리 속에서는
무슨 소리가 난다.

꽃잎 눈뜨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때론 수수밭을 서성이는
그 달빛 소리.

누가 맨 처음
항아리 빚는 것을 알았을까.

별이 우쭐대는 밤이면
나는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빨간 불더미에서
흙을 주무르시던
그 불빛 손.

할아버지 생각에 이어
떠오르는 달
달의 꿈이 잠긴
아, 항아리.

누가 항아리 속에
그 많은 말을 담아 놓았을까.
꿈속에서도
항아리의 낱말은
파란별이 되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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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행복한 죽음

윤수천

젊은 나이로 죽을 수 있는 것도
행복하다
푸른 줄기로 빛나는 나무처럼
싱싱한 추억으로 떠나는 여행

오래 산다는 것이
자첫 허물만을
남기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떠남은 행복이다

저 누추한 얼굴들을 보아라
추한 무덤들을 보아라
살았어도 산 게 아닌
가엾은 사람들을 보아라

아쉬워할 때 떠나는 것은
오히려 고맙다
그럴 수 없는 게
다만 아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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