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재기 시 모음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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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 모음 20편

김용호 0 651
구재기 시 모음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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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월

구재기

1
산빛은
저물녘에 이우르고
산기슭
외딴 초가
연기는
줄줄이 피어오르는데
노승(老僧) 한 분
산사(山寺)를 뒤로하여
바람 끝에
하롱하롱
오동꽃
송이송이

2
빗방울에 씻기고 씻기어
마침내 튕겨져 나온
햇살 무리들아
허리를 구부리고
무슨 금맥(金脈)이라도 찾으려는가
하늘 끝 어디쯤서
뺨 부비고 눈부시게 살이 올라
저기, 저,
젖가슴 철철 넘치는 청보리빛
눈물 찬 꽃봉오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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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구재기


지난밤의 긴 어둠
비바람 심히 몰아치면서, 나무는
제 몸을 마구 흔들며 높이 소리하더니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더 푸르다
감당하지 못할 이파리들을 털어 버린 까닭이다
맑은 날 과분한 이파리를 매달고는
참회는 어둠 속에서 가능한 것
분에 넘치는 이파리를 떨어뜨렸다
제 몸의 무게만큼 감당하기 위해서
가끔은 저렇게 남모르게 흔들어 대는 나무
나도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어둠을 틈 타 참회의 눈을 하고
부끄러움처럼 비어있는 천정(天頂)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무게만을 감당하고 싶다
홀가분하게 아침 햇살에 눈부시고 싶다
대둔산 구름다리를 건너며
흔들리며 웃는 게 눈부실 수 있다
가끔씩 온몸을 흔들리며
무게로 채워진 바위
그 무게를 버려가며 사는 게 삶이다
지난날들의 모자가 아직 씌워져 남아있는
푸념의 확인, 구름다리 밑의 아찔한 거리로
가끔은 징검징검 흔들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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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을 하늘

구재기

울타리 밑에서 호박은 핑크빛으로 늙어갔다
마른 넝쿨손이 울타리목을 잡은 게 필사적이었다
은행잎이 노라니 익어가는 언덕길 끝은
푸르디 높은 하늘
어디서, 쩡쩌엉쩡, 대낮의 장끼가 울어댔다
하루가 소리 없이 빨리도 지나가지만
다가오는 먼 그림 속 빛깔들이
바람 속에서 다투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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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림자

구재기

세상의
맑은 곳일수록
햇살 밝은 날일수록

내 삶의
무게만큼
내려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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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금강金剛으로 향하며

구재기

금강으로 향하여
바다를 달린다
하얗게 일어서는 뱃길

발을 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자는 오라
흙탕물을 밟지 않은
전투화를 벗어 던지고
달릴 수 있는 자는
모두 이곳으로 오라, 오라

금강으로 가는 길
하늘의 모든 구름이 쏟아 부은
온갖 설움과 슬픔과 원망을 딛고
너와 나는 비로소
한 마음 한 몸이 될지니

두터운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달릴 수 있는 자는
모두 이 뱃길로 오라
이 푸른 알몸의 바다로 오라

청정의 창해
햇살이란 햇살들이
이곳에서는 애시당초
심해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것

푸른 물낯을 터전으로 하고
금강의 그림자를 얼싸안을 수 있는
너른 가슴인 자는
이 뱃길에 온몸으로 뛰어 들어라

금강으로 향하여
뱃길을 간다
청정의 순한 길
모진 두 손을 씻으며 닦으며
금강과 한 몸 되려
하얗게 일어서는 창해의 햇살로
뱃길을 빚으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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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길을 가는 데는

구재기

길을 가는 데는
굽이가 있어야 한다
빠른 걸음을 좀더 더디게 할 수 있는
가로질러 갈 걸 돌아갈 수 있는
바로 곁이 아니라
좀더 멀리할 수 있는
더딤이 있어야 한다

큰 강을 건너는 데에는
다리가 없어야 한다
먼 건너를 가까웁게, 성큼성큼
너른 물을 좁으막히, 넝큼넝큼
바로 건너가 아니라
아득한 저만큼의 거리가 있어야 한다

옛길을 그리워하는 사람아
너와 내가 걷던,
빠른 걸음을 부끄러워 할 때쯤
너와 나는 분명한 이별이었나니
스러졌어도 남아 있어야 할 노래도 없이
먼 길 따라 가쁜 숨결 따라
헉헉헉헉 숨 차 오르는 지름길로 다가서서는
끝내 눈물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는가

길을 가는 데는 언덕이 있어야 한다
함께 걸어야 할 너와 내가
산길 굽이굽이 함께 올라가야 할
무엇보다도 충분히 걷고 걸어야 할
아무리 길눈이 어두워도 함께, 찾아보기 쉽게
이 세상의 언덕을 넉넉히 챙겨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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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꽃샘추위

구재기

꽃밭에 얼굴을 부비며
빈 꽃가지를 흔들며
또 그렇게 지나야 하는 겨울,
그 비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

조금씩 조금씩 뒤안길을
보듬어 스스럼 열며
꽃철을 맞아 사위어져 가는……

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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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내일

구재기

오늘의 바람도
자정을 넘으면
내일로 가댄다

겨울 숲은 언제나
눈부시게 부서질
가슴만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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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돼지가 웃었다

구재기

살아서는 하늘을 볼 수 없는
돼지는 하늘 한 번 보기가
평생 소원이었는지라
목숨을 버려서야 목욕재계하고
온몸을 뉘인 채
비로소 하늘을 보았다

돼지는 입만 슬쩍 벌리고 헤헤헤 웃었다

살아생전 웃을 일 전혀 없었던
돼지는 몸통마저 버린 채
머리만으로 높은 상에 올라앉으니
사람들은 저승 갈 노자까지
입에 물려주며
두 손 모아 큰절을 하였다

돼지는 소리 없이 크게 흐흐흐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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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무지개

구재기

하늘이여
나는 이 순간
시인으로 태어나
비로소
언어의 사기꾼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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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보석에 대하여

구재기

유리칼로 유리를 잘랐다
단단한 유리가
어떤 몸부림처럼 소리하며 둘로 잘려나갔다

유리를 자른 단단한 것이
금강석이라 했다

금강석은 보석이라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의 사랑이 보석이라 했다
그 보석이 결국 우리를 둘로 갈라놓았다

잘려진 유리가 유리창에 끼워졌을 때
안과 밖이 생겼다 안과 밖에서
우리의 사랑이 마구 울었다

바람이 겨울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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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비를 맞으며

구재기

마른 땅에 비가 내렸다
흘러내릴까 했는데 나무 밑에서
빗물은 이내 땅속에 스며들었다.
지금쯤 빗물은 아직 한 번 본 적도 없는
지상의 사랑 이야기를
나무 뿌리들에 속삭여주고 있을 것이다.

아, 아, 나도 빗물이고 싶다.
여자의 마른 몸에 빗물로 스며
가슴의 뿌리를 적시면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내 사랑을 속삭여주고 싶다.
그렇게 또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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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소주에 대하여

구재기

우리는 소주를 좋아했다.
입술을 제 빛으로 촉촉이 적시고
맑음을 가진
소주와 같은 사랑을 했다.

남들처럼 입술에 거품을 물고
배부르게 사랑하는 걸 싫어했다.

우리의 사랑은 가난해서 좋았다.
가난을 만날 때마다 슬픔이 자주 일었다.

가난은 서로 나눌 슬픔이 있다는 것

우리는 슬픔을 나누기 위해
곧잘 사랑을 마셨다.

사람들처럼 거품을 물지 않고
우리는 맑은 사랑으로 입술을 적시며
슬픔으로 가까이 슬픔을 길러
더욱 더 가난하게 소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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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오늘이고 싶다

구재기

매양 오늘 같이
사랑에 취하고 싶다
바람이 불고
간간히 소나기 내리듯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싶다
산등성이로 이는 구름 속에 묻혀
지상의 어느 누구도 바라볼 수 없는
하늘의 자리를 마련하고
햇살처럼 찬연히, 뜨거웁게
온 몸을 달구고 싶다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 해도
오늘 같이
오늘의 사랑은 오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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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잡초
- 둑길行

구재기

밤새도록
폭풍우가 몰아쳤는데도
자고 일어나 나아가 보니
둑길의 잡초들이 살아 있었다
아, 아침 햇살 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하이야니 저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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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잡초 뽑기

구재기

별나게 울어대는 까치 한 마리를 보고
이른 아침 골아실 돌밭에 앉아
잡초를 뽑아내는 것일까, 아버지는
허이연 뿌리째 뽑혀지는 잡초를 볼 때마다
훌훌 옷의 먼지라도 털어내듯
땅을 마다하고
모조리 도시로 떠나버린
자식들의 생각을 되살려낸다
어느 잡초더미에서 작물로 자라
연약한 목을 내밀고 있을까
때로는 손끝이 바르르 떨리기도 하지만
하나의 잡초가 뽑힐 때마다
그만큼 넓어지는 視野
돌밭 둔덕에 학처럼 앉아
마지막 힘을 더하여 날개를 퍼득이며
세상의 구석구석 모든 잡초를 뽑아낸다, 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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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저수지에서

구재기

물결이 흔들리자
모든 게 사라지는가 싶더니
모든 게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물결이 조용해지면서부터였다

조용해진다는 것은
제 몸을 스스로 낮춘다는 것
저수지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맑은 물밑까지
훤히 보이는가 싶다가

항상 높이 존재할 수 있는 하늘이
조용한 물 속에
몸을 내릴 줄 안다는 것을
머리 숙여 하늘을 우러르며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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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좋은 일

구재기

슬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슬픔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입니다
막차는 이미 떠나고
차마 돌려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돌리면서
눈물 한 종재기라도 흘릴 수 있는
사랑을 가졌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오늘의 날은 이미 깊이 저물어
또 다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곳에
내일이 있다는 것은
조금은 더디게 만날 사랑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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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햇빛 사냥

구재기

사과나무에서 사과알로 미처 다 익지 않은 것은
햇빛 사냥을 시작한다

멍석 위에 동그마니 앉아
하늘을 닮아 가는 연습을 하다가

바람 한 줄기를 만나면
바람에 실린 햇빛까지도 사냥한다

청청청청 가을 하늘이 살아서
죄 없는 지상의 자리

넉넉한 햇빛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로
붉은 기억의 흔적으로 남기기 위하여
미처 다 익지 않은 사과 알들은
멍석에 동그마니 앉아
햇빛 사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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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흔들의자

구재기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면
세상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이
이토록 편안할 줄이야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그 물결이
출렁이면서 바다가 살아있다는 것이
보인다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은 것들도
한 번쯤 흔들리고 나면 정이 붙는다
흔들릴 때마다 하늘이 내려와 앉고
멀리 보이는 작은 섬들이 치솟다가
물 속에 잠기기도 한다 한여름
무더위가 씻은 듯이 사라질 무렵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안심이 된다

배 한 척이 수평선 위에 뜨기까지
얼마동안이나 육지를 밀어내며
흔들려 나아갔을까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세상에서 혼자서만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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