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시 모음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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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시 모음 30편

김용호 0 9574
최승자 시 모음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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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

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니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니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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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최승자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아직 불기가 남아 있는지
그대의 아궁이와 굴뚝에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지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을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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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황

최승자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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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억하는가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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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최승자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달디단 내 혀의 입맞춤에 녹아
무너져라고 무너져라고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그러나 결코 사랑은 아니라고
깨달아지는 이 나이는 무슨 나이인가?
결코 사랑만이 아니다.
결코 사랑만으로는 태부족이다.
이런, 나는 호 혹시
테러리스트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오 꼬집어다오, 형제여, 내가 호 혹시
깡패의 순정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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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청춘의 영원한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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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너에게

최승자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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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돌아와 이제

최승자

새들은 항상 낮게 낮게 가라앉고
산발한 그리움은 밖에서,
밖에서만 날 부르고

쉬임 없는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춤추었다.

이젠 너를 떠나야 하리.

어화 어화 우리 슬픔
여기까지 노저어 왔었나.

내 너를 큰물 가운데 두고
이제 차마 떠나야 하리.

오래 전에 내 눈 속 깊이 가라앉았던 별,
다시 떠오르는 별.
오래 갈구해온 나의 땅에
다시 피가 돌고
돌아와 이제 내 울타리를 고치느니,

허술함이여 허술함이여
버려진 잡초들이
이미 내 키를 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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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흔

최승자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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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바람의 편지

최승자

내 너 두고 온지
벌써 한 달
바람의 편지도
이제 그쳤구나

아 내 기억 속에서
푸르른 푸르른

또 다시 하루 가고 이틀 가도
내 기억 속에서
푸르고 푸르를

언제나 새로이 쓰여 질
아 지리산, 바람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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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밤 부엉이

최승자

밤부엉이 한 마리가 창가에서
나를 꼬나보기 시작했어.
나는 허둥거리며 내 몸의
모든 기관들을 닫아 버렸지만
부엉이의 눈빛이 오토머신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어 열고
노란 방사선을 쏘아 부었어.
나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차갑게 융해되어 갔어.

이윽고 잠, 닫혀진 회색 강철 바다,
속으로 한 사내의 그림자가 숨어들어
내 꿈의 뒷전을 어지러이 배회하고
환각처럼 들리는 창가에서, 누구시죠?
내게 희미한 두통과 고통을 흘러 붓는, 누구시죠?
내 死産의 침상에 낮게 가라앉아,
누구시죠? 누구 누구 누구……?

밤부엉이가 밤새 내 지붕을 파먹었어.
아침엔 날이 흐렸고
벌어진 큰골 속으로 빗물이 흘러들었어.
이미 죽은 내 몸뚱이 위에
누군가 줄기차게 오줌을 깔기고,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떠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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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비극

최승자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혹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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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빈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리고도 어언 수천 년

빈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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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살았능가 살았능가

최승자

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살았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삶은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늘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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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생각은

최승자

생각은 마음에 머물지 않고
마음은 몸에 깃들이지 않고
몸은 집에 거하지 않고
집은 항상 길 떠나니,

생각이 마음을 짊어지고
마음이 몸을 짊어지고
몸이 집을 짊어지고
그러나 집 짊어진 몸으로
무릉도원 찾아 길 떠나니,

그 마음이 어떻게 천국을 찾을까.

무게 있는 것들만 데불고,
보이는 것들만 보면서,
시야에 빽빽한 그 형상들과
그것들의 빽빽한 중력 사이에서

어떻게 길 잃지 않고
허방에 빠지지 않고
귀향할 수 있을까.

제가 몸인 줄로만 아는 생각이
어떻게 제 출처였던
마음으로 귀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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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술독에 빠진 그리움

최승자

무수한 꿈이 그녀를 짓밟았다
독한 희망에 그녀는 썩어갔다
그리고 오늘밤 또다시 바람은
하늘 밖에서 그녀를 부르고
오오 벼락치는 그리움에
절망이 번개 광선처럼
그녀의 뇌 속에 침투한다
그녀의 머리통이 깨어지고
꿈이 좌르르 쏟아진다
뇌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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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시간이 사각사각

최승자

한 아름다운 결정체로서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사각사각 아름다운 설탕의 시간들
사각사각 아름다운 눈(雪)의 시간들
한 불안한 결정체로서의
시간들도 있습니다
사각사각 바스러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무너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의 마술사는 깃발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아하 사실은
(통시성의 하늘 아래서
공시성인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입니다)
시간이 사각사각
시간이 아삭아삭
시간이 바삭바삭
아하 기실은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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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시인

최승자

시인은 여전히 컹컹거린다.
그는 시간의 가시뼈를 잘못 삼켰다.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의 뼈를
그러나 시인은 삼켰고
그리고 잘못 삼켰다.

이 피곤한 컹컹거림을 멈추게 해다오.
이 대열에서 벗어나게 해다오.

내 심장에서 고요히,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을
나는 누워
비디오로 보고 싶다.

그리고 폐광처럼 깊은 잠을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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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악순환

최승자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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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어떤 아침에는

최승자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내가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숨죽일 때
속절없이 다가오는 한 풍경.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

시간의 사막 한 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
(내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이십 세기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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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떤 풍경

최승자

고요한 서편 하늘
해가 지고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한 사람이
책상 앞에서 시집들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가 읽는 시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시간의 무상함

어떤 사람이 시간의 시를
읽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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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언젠가 다시 한번

최승자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무도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내가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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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여성에 관하여

최승자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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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외롭지 않기 위하여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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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제 가야만 한다

최승자

때론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 한다

한때는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였지만
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구멍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 몸 온 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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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일찌기 나는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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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중구난방이다

최승자

중구난방이다.
한없이 외롭다.
입이 틀어 막혔던 시대보다 더 외롭다.

모든 접속사들이 무의미하다.
논리의 관절들을 삐어버린
접속이 되지 않는 모든 접속사들의 허부적거림.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중구난방이다.
자기 함몰이다.
온 팔 휘저으며 물 속 깊이 빨려 들어가면서
질러대는 비명 소리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없이 외롭다.
신앙촌 지나 해방촌 지나
희망촌 가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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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듯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29》
파괴의 집

최승자

사방팔방으로 바람, 바람 소리.
바람 파도에 포위된 집,
누울 곳 없는 삼십칠 세.

없는 꿈과 있는 현실,
그 사이에서 바람……
바람 소리가 날 흔들어댄다.

영원히 뿌리 없는
허공의 방, 허방의 집.

허망하고 허망하여
이 집을 파괴합니다.
이 집을 복원하지 마십시오.
행여, 이 위에 기념 건물을 세우지 마십시오.
명실공히, 이 집은 파괴의 집입니다.
☆★☆★☆★☆★☆★☆★☆★☆★☆★☆★☆★☆★
《30》
해마다 유월이면

최승자

해마다 유월이면 당신 그늘 아래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내일 열겠다고, 내일 열릴 것이라고 하면서
닫고, 또 닫고 또 닫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이 진행성 퇴화의 삶,

그 짬과 짬 사이에
해마다 유월에는 당신 그늘 아래
한번 푸근히 누웠다 가겠습니다.

언제나 리허설 없는 개막이엇던
당신의 삶은 눈치 챘었겟지요?

내 삶이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오만과 교만의 리허설뿐이라는 것을

오늘도 극장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저 혼자 숨어서 하는 리허설뿐이로군요.

그래도 다시 한번 지켜봐 주시겠어요?
(l go, l go 나는 간다.
(Ego, Ego,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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