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자 시 모음 3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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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시 모음 31편

김용호 0 81
최문자 시 모음 3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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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백

최문자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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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짓말을 지나며

최문자

이번 여름에도 거짓말이 슬쩍슬쩍 나를 지나갔습니다
동방은 어디인가?
추운 동방으로부터 왔다고 들었습니다
곧 허물어질 바람 위에 지어졌습니다
힘이 아니라
점이 아니라
선이 아니라
장미꽃 장면으로
펜스를 넘고
꽃잎을 접고
나에겐
거처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에게서 동방의 가루약이 밝혀진대도
내 혀끝은 서쪽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주 잠깐 믿었습니다

거짓말은 오렌지색
나직한 뱃고동 소리로 구슬프게 부릅니다
흐린 연필 끝으로
꽃을 그리며
나에겐
망치가 없어요
톱날이 없어요
위함이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한여름 밤
여름 마지막 부분에서
뭉게뭉게 지나가는 거짓말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잠에서 깨고
누군가는 서쪽으로 바람을 보냅니다

여름에는 거짓말이
동방으로 난 창문으로 마음놓고 드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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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날의 꽃구경

최문자

그 날,
벚꽃이 만개했다는 그곳으로
우리들은 꽃구경을 갔다.
갖가지 통증을 감추고
꽃을 찾아 나선 사람들은
꽃 아래 가득 차 밀려다녔다.
꽃들은 감춘 통증을 알아보고
매워서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봄 끝에 매달렸던 돌풍이 일자,
꽃의 살점들은 떨어져 나갔다.
눈발처럼 서쪽을 향해 허옇게 날아갔다.
꽃나무는 동쪽에 그냥 남아 있었다.
따라가 볼 수 없는 꽃의 살점
반쯤 남은
꽃 아래서
사람들은 서로 살점 뜯긴 얘기를 나눴다.
푸드득
푸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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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꽃잎

최문자

유럽 여행 중
이름 모를 이국의 해변에서
온몸에 머드팩을 한 적이 있다.
몸에다 진흙을 바르고 진흙 속에 누웠었다.
분명,
여자의 몸에는 깊은 꽃잎이 있는 듯 했다.
흙냄새 풍기는 꽃잎이 있는 듯했다
진흙은 꽃잎을 덮고도 꽃잎 위에서 넘실거렸다.
비누보다 몸에 익숙한 꽃잎
몸의 정맥에 대고 속삭이는 꽃잎
자신만의 풍경을 가지고 있는 꽃잎
이브가 수치를 가릴 때
흔들리던 부표, 그 떨리던 꽃잎
자장가처럼 간지럽게 흘러내리는 꽃잎
태초에 신이 진흙을 주물럭거릴 때
진흙을 뚫고 여자로 움트던 꽃잎
진흙 위에 진흙을 바르며 꽃잎을 느꼈었다.
가장자리가 다 닳아빠지도록
그 동안 얼마나 창백하게 내버려둔 꽃잎인가?
삶의 들판 사이사이에서 울고 웃던 꽃잎
울다가 구름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꽃잎
진흙인 줄 모르고 쇠처럼 써버리던 꽃잎
진흙 속에 누워 유년의 꽃잎을 기억했다.
파들거리며 부끄럼 타던 발그레한 속꽃잎
그 발기한 분홍색 꽃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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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라고 할 것인가

최문자

아주 천천히 손을 씻는다

크고 따뜻했던 손이
때때로 검정 색이야
피를 흘리고 가끔 붕대를 감고

봄밤 연인의 손을 잡다가 너무 많이 울어본 손이
여러 개로 손을 쪼개고 어느 한 조각에 잠긴다

대낮에는 내 손이 아니다
나를 떠난다
나를 이긴다
풋과일처럼 새파랗고 단호하게 다른 손을 잡는다
눈을 감고 있으면 뻐근했다
하루가 꿈틀거렸다
뭔가를 할퀴고 만지다가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잔을 돌리며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한꺼번에 몇 개의 손이 되려 하는 손에게
왜 피가 나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아, 하얗게 자고 싶어
얼굴 같은 손이 나에게 말했다
☆★☆★☆★☆★☆★☆★☆★☆★☆★☆★☆★☆★
《6》
노랑나비

최문자

사랑은
내게 마지막 남은 들판이다.
아직도 노랑나비 비릿한 속삭임으로 꽉 차 있다.
들판에 서면
물결 같기도 하고
눈물 같기도 한 노랑나비가
들풀의 정강이에서 글썽이고 있던 들판이다.
울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날아가던 노랑나비 들판.

사랑의 문장을 노랗게 새긴 꽃잎을 들판에 놓았었다.
홀라당홀라당 허물을 벗어놓고
문장을 건너뛰던 노랑나비
메두기 다리로 뛰어가던 노랑나비 들판

내가 쓴 시에서
노랑나비는 십 년 이상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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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닿고 싶은 곳

최문자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다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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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땅에다 쓴 시

최문자

나는 땅바닥에 대고 시를 썼다.
돌짝도 흙덩읻 부서진 사금파리도
그대로 찍혀 나오는
울퉁불퉁했던 삶.
삐뚤삐뚤 한글 잠가 나가고
미어진 종이 위에서
연필은 몇 자 못 쓰고 부러졌다.
지금지금 흙 부스러기가 씹혔다.
숨기고 있던 내 부스러기들이 씹혔다.

더 이상 세상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땅바닥에 와 있었다.
죽은 꽃잎에 대고
죽은 사과 알에 대고
작은 새의 죽은 눈언저리에 대고
꾹꾹 눌러썼다.
에스겔서의 골짜기 마른 뼈처럼
우두둑 우두둑
무릎 관절 맞추며 붙이며
죽은 것들이 일어섰다.
나는 흙바닥에 대고 시를 쓴다.
죽음도 사랑오 절망도 솟구치며 직혀 나오는
미어지는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다.
몇 자 못 쓰고 부러지는 연필 끝에
침 대신 두근거리는 피를 바른다.
시에서 늘 비린내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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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못의 도시

최문자

쇠와 섞이고 싶은 살이 있다.
더 깊이 찔리고 싶은 상처가 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싶은 영혼이 있다.
온몸을 찔려도 성이 안 가시는 쾌락이 있다.
서울에선 못이 잘 팔려나간다.
나날이 수요가 급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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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믿음에 대하여

최문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금방 날아갈 휘발유 같은 말도 믿는다.
그녀는 낯을 가리지 않고 믿는다.
그녀는 못 믿을 남자도 믿는다.
한 남자가 잘라온 다발 꽃을 믿는다.
꽃다발로 묶인 헛소리를 믿는다.
밑동은 딴 데 두고
대궁으로 걸어오는 반토막짜리 사랑도 믿는다.
고장난 뻐꾸기 시계가 네 시에 정오를 알렸다.
그녀는 뻐꾸기를 믿는다.
뻐꾸기 울음과 정오 사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믿음은 지푸라기처럼 따스하다.
먹먹하게 가는귀 먹은
그녀의 믿음 끝에 어떤 것도 들여놓지 못한다.

그녀는 못 뽑힌 구멍투성이다.
믿을 때마다 돋아나는 못,
못들을 껴안아야 돋아나던 믿음.
그녀는 매일 밤 피를 닦으며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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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백지유감

최문자

아버지,
흰 종이처럼 살지 못합니다.
섞이고 사무치는 무늬가 없으므로
모든 색깔을 깍아낸벌거숭이 그 몸뗑이 구석구석
알 한 번 낳아본 적 없는 숨을 곳 없는 하양
아버지,
흰 종이는 녹지 못하는 소금입니다.
한번도 멈추지 않고 소금이 되려고
갈수록 캄캄한 세상의 물 속에
깊숙히 가라앉아 본 적도 없는
한 번도 짠맛을 버리지 못하는
흰 종이는
흰빛을 무기처럼 숨기고
밤새 앓는 소리내는 짜디짠 위선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
부끄럼도 없이
걷잡을 수 없게
살 냄새 풍기면서도 흰 종이처럼 짭짤하게 살고 있다는
제 얘길 들으신다면
아버지,
그건 헛소문입니다.
무서운 헛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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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비누들의 페이지

최문자

눈물이 나는 건
슬픈 시를 쓰는 건
모두 비누 때문이지
소량의 물에도 사라지는 거품이 그리는 그림
불행한 불확실성 때문이지

죽어도 거품이 일어나지 않던 그 해
논문 두 편 쓰고
두 번째 아이를 지우고
가능하지도 결코 불가능하지도 않았던
빡빡한 영혼으로 누구를 사랑한 적 있다
끊어진 계단
무릎을 다치며
귀뚜라미 두 마리처럼
유리문에 숨을 불고 작은 소리를 내다 죽는 일이었다
나를 모르는 자와
그를 모르는 내가
비누의 페이지로 가서
거품으로 말을 나누고
장롱 깊은 곳에 그 말들을 넣어 두었지만
말조차 깊은 비누였던 것

깊은 서랍을 열고
쓸데없이 남은 것들을 뒤적이다 그때의 분홍 비누 한 조각을 찾아냈다
지금은 어떤 거품을 만들지 고민하지 않는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떤 후회스러운 청춘이 지나간 미끄러운 길로
한 불확실한 거품을 통해
그 해 겨울
끝없이 폭설이 내리고
거짓말처럼 나의 모든 비누들은 눈 속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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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빈집

최문자

나를 거둬 가는 그대 때문에
나는 빈집이예요.
아주 고요해서
불마저 켜기 싫은
고통의 부위만 남겨놓고
나의 집은 비어 있어요.
당신은 언제나 날카롭게 직립하세요.
내 쪽으로 오는 저 칠흑의 어둠을 안고
내가 쓰러질게요
.질벅한 눈물의 한 부피로
생생하게 쓰러질게요.
다시 살아날까 겁이 나서
혼자 흔들리는 문을 잠그고
살듯이 투명하게 죽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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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과 사이사이 새

최문자

나는 사과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을까
사람의 피가 흐르는 사과였을까
연대조차 알 수 없는
선과 악의 무수한 점들이 찍힌
영혼을 걸친 듯한
계속 사람의 문장을 같이 쓴 흔적이 있는
사과 같은 사람들은 사과 없는 광야를 건넜다

사과 옆은 무서운 난간
난간에서 난간으로
누군가가 위험한 높이까지 새처럼 올라간다
날마다 새로 생긴 사과의
틀린 고백 틀린 허기 틀린 반성 틀린 눈물
틀린 틀린 사과의 밥을 보고 있다
죽어라고 틀리게 태어나서
그 누구의 틀린 기쁨을 맛있게 먹여주던
사과 수프
누군가가
틀린 사과들을 통째로 삼키고 통째로 부서진다
수직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그 누구의 부서진 어깨뼈
통증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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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생가

최문자

살아 있는 한 돌아서지 못한다.
꼬집으면
확, 하고 꽃 터질 듯한 자리
누구나
모래바람 일으키며 떠났다가
허기진 애증으로 군데군데 살이 떨어진 채 돌아와
그 원형에 영혼을 다시 대 보지만
닿기만 하고
멍이 지워지지 않는 자리.
무한정하고 소리없이 떨어지던 뒷마당 물앵두꽃
내 가슴을 수없이 다녀갔던 분홍꽃잎
그 꽃비린내로
가슴 울렁이는 매연 속에서도
푸른 뼈 세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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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소나기

최문자

선바위역 근처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물이 무작정 손 발 다 씻어 줬다.
세상의 것들이 모두 우산을 폈다.
젖을 수 없는 부위에다 우산을 씌웠다.
묽어진 세상에 더 물을 붓는다.
없었던 것들이 떠올라 비를 맞고 있다.
풀들도 제 뿌리에서 나와 아무데로나 가고 있다.
어떤 것의 발자국도 남아 있지 못하고 흐르고 있다.
그 사람만 아직 가만히 있다.
당분간 젖지 않을 양
나에게 마른 풀잎으로 바스락거린다.
우산을 쒸우지 않아도 젖지 않는 마른 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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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시인

최문자

삶의 혓바닥이 나를 찾아낸다.
나를 얼른 알아보고 속도를 낸다.
끔찍한 혀를 가지고 미끄러져 온다.
구체적인 절망을 낼름거리며
목마름으로 온다.

빠져나가라
흘러가거라
나는 길을 비켜준다.

혓바닥은 완강했다.
드디어 내 알몸이 드러난다.
어느 시인이
삶에게 당했다는 추문이 한동안 무성했다.

그러나
확고한 알리바이가 하나 있다.
나는
결코 먹지 못하는 먹이
끝간데까지 가면 터져 버리는 비린내나는 핏줄과
삶의 혓바닥을 찌를 수 있는
위험한 감성의 가시를 감추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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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어머니

최문자

알고 있었니
어머니는 무릎에서 흘러내린 아이라는 거
내 불행한 페이지에 서서 죄없이 벌벌 떠는 애인이라는 거
저만치 뒤따라오는 칭얼거리는 막내라는 거
앰불러스를 타고 나의 대륙을 떠나가던 탈옥수라는 거

내 몸 어디인가 빈 방에 밤새 서 있는 여자
지익 성냥불을 일으켜 촛불을 켜주고 싶은 사람

어머니가 구석에 가만히 서서
나를 꺼내 읽는구나

자주 마음이 바뀌는 낯선 부분
읽을 수 없는 곳이 자꾸 생겨나자 몸밖으로 나간 어머니
알고 있었니
기도하는 손을 가진 내 앞에 양 한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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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여름 산책

최문자

일 년 중
한 보름 정도만 빼고 나머지는 추웠다.
지구의 가슴이 점점 뜨거워져서
빙벽이 녹아 무너져내린다는데
오랫동안 여름을 보지 못했다.
나는 여름 동안 어디 있었나?
한여름 문 열고 나와본다.
깊은 밤
군데군데 뭉쳐 있던 몸속의 얼음
소름 돋아 오슬오슬 떨려오던 장기들
같이 따라 나선다.
활활 타오르는 땡볕 아래를
얼음을 품고 걷는다.
꽃인지 나무인지 분간 못하게
온몸을 쥐어짜며 푸르기만한
푸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시린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한여름 속에 살고 있는
이 은밀한 한기
이 추위 깊숙이 저 아래
어쩌면 내가 있으리라.
갑자기 여름이 되지 않는
찬우물 같은 내가
순간순간을 진저리쳐대야 바뀌던 나를
붙잡고 헉헉대며 이미 다 써버린 여름
소낙비처럼 쏟아지다 뒤틀린 땀방울
씻어주는 이 없어 얼고 또 얼던 얼음 위의 얼음
어느 장기 옆일까?
어느 마음 옆일까?
나를 버티게 하던 울툴불퉁한 빙벽이 서 있는 곳
팔보산 정상까지 걸었다.
언젠가 그와 같이 산을 걷다가
추위 깊숙이 웅크린 얼음 서로 만져볼 수 있다면
이 푸른 공기로도
어쩌면 내가 녹아 있으리라.
눈물처럼.
☆★☆★☆★☆★☆★☆★☆★☆★☆★☆★☆★☆★
《20》
여름 산책

최문자

일 년 중
한 보름 정도만 빼고 나머지는 추웠다.
지구의 가슴이 점점 뜨거워져서
빙벽이 녹아 무너져내린다는데
오랫동안 여름을 보지 못했다.
나는 여름 동안 어디 있었나?
한여름 문 열고 나와본다.
깊은 밤
군데군데 뭉쳐 있던 몸속의 얼음
소름 돋아 오슬오슬 떨려오던 장기들
같이 따라 나선다.
활활 타오르는 땡볕 아래를
얼음을 품고 걷는다.
꽃인지 나무인지 분간 못하게
온몸을 쥐어짜며 푸르기만한
푸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시린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한여름 속에 살고 있는
이 은밀한 한기
이 추위 깊숙이 저 아래
어쩌면 내가 있으리라.
갑자기 여름이 되지 않는
찬우물 같은 내가
순간순간을 진저리쳐대야 바뀌던 나를
붙잡고 헉헉대며 이미 다 써버린 여름
소낙비처럼 쏟아지다 뒤틀린 땀방울
씻어주는 이 없어 얼고 또 얼던 얼음 위의 얼음
어느 장기 옆일까?
어느 마음 옆일까?
나를 버티게 하던 울툴불퉁한 빙벽이 서 있는 곳
팔보산 정상까지 걸었다.
언젠가 그와 같이 산을 걷다가
추위 깊숙이 웅크린 얼음 서로 만져볼 수 있다면
이 푸른 공기로도
어쩌면 내가 녹아 있으리라.
눈물처럼.
☆★☆★☆★☆★☆★☆★☆★☆★☆★☆★☆★☆★
《21》
외출

최문자

시인이 생선을 고른다
값을 물어보기 전에
깊은 바다에 얼마나 드나들었나?
아가미를 열어본다
바다에서 나와 땅에서 떠돌기 얼마나 쓸쓸했나?
지느러미 힘줄을 들쳐본다
정말 바다의 자식인지
등짝에서 파도에게 매맞은
푸른 멍자국을 찾아본다
얼마나 바다를 토애내야 죽을 수 있었나?
핏발 선 눈알을 들여다본다
아직도
뻐끔거리던 입마다 바다가 몰려있는데
와르르 와르르 파도가 몰려와 좌판을 때리고 가는데
싸요, 싸
단 돈 오천 원에 싱싱한 주검이 두 마리
수산시장 비린내만 묻히고 그냥 돌아온다
나를 따라 일어서는 겨울 바다
노량진 역에서 같이 지하철을 탄다
☆★☆★☆★☆★☆★☆★☆★☆★☆★☆★☆★☆★
《22》
정거장

최문자

강 건너 저 편
내 철없는 정거장에
기차 한 대 멈춰서 있었다
긴 가을 건너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도착한 기차
가슴까지 밟고 서 있다가
슬금슬금 떠나고 나니
번갯불로 바퀴를 껴안았던 레일
쓰러져 울다 지쳐 잠들었다
들꽃 한 무더기가
피다 흔들리다 흠뻑 비를 맞는 곳
강 건너 저 편
철없는 내 자리에
싹을 못내는 검은 침묵들을 눕히고
새로 레일을 놓는다
안개 낀 가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들이닥친 기차를 위하여
☆★☆★☆★☆★☆★☆★☆★☆★☆★☆★☆★☆★
《23》
정전기

최문자

건기인가 봐요 우리,
새들도 입안이 마른다는.
바짝 마른 말로 통화하고 있잖아요 지금,
마른 대궁만 남은 당신 말에
나는 없는 미련 지지직거리며
타는 시늉 다 해보지만
갑자기 들러붙어요
말과 말 사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말의 먼지들 뿌연데
들리죠
우리 언어가 물 마르는
소리 따가워요
메마른 통화
갈라진 언어의 살 사이로
피 내비쳐요
건기인가 봐요 우리,
☆★☆★☆★☆★☆★☆★☆★☆★☆★☆★☆★☆★
《24》
죄책감

최문자

하나님이
강둑에 세워둔 표지판
'낚시 금지'
하나님이 말갛게 씻어놓은 죄를
이미 용서받은 물고기들을
밤새워 내가 끄집어올립니다
비린내 진동하는 날밤 새우며
☆★☆★☆★☆★☆★☆★☆★☆★☆★☆★☆★☆★
《25》
지상에 없는 잠

최문자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찬 비를 맞으며
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껍질 같아서 들을 수 없는 말
나무 위로 올라오지 못한 꽃들은
짐승 냄새를 풍겼네
내가 보았던 모든 것과 닿지 않는 침대
세상에 닿지 않는 꽃가지가 좋았네
하늘을 데려다가 허공의 아랫도리를 덮었네
어젯밤 꽃나무에서 꽃가지를 베고 잤네
세상과 닿지 않을 필요가 있었네
지상에 없는 꽃잎으로 잤네
☆★☆★☆★☆★☆★☆★☆★☆★☆★☆★☆★☆★
《26》
첫사랑

최문자

언젠가
믿지 않았던 말
그 말이 갑자기 믿어진다.

온몸에
푸른 녹이 잔뜩 슬은 말.

오늘 밤
녹을 닦아내고
날을 세워
그 말에 새롭게 찔리우고 싶다.

처음부터
뿌리에 불을 가지고 있던 말

항상
엉기던 생체
그 말에선
푸성귀 냄새가 난다.
☆★☆★☆★☆★☆★☆★☆★☆★☆★☆★☆★☆★
《27》
팽이

최문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
《28》
푸른 고통

최문자

잎은
괴로웠으리라.
뿌리보다 더 괴로웠으리라.
희망처럼 푸르러야 했으므로
시퍼렇게 멍울진 허세로
꼭 한여름만큼만 연인이어야 했으므로
얼마 안 있어
사랑이 멈출 나무를 잡고
더 괴로웠으리라.
☆★☆★☆★☆★☆★☆★☆★☆★☆★☆★☆★☆★
《29》
핀의 도시

최문자

이토록 외로운 도시
핀의 도시에 삽니다

핀 하나로 눈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핀은 꽃이 아니라서
꽃을 모르고
둥근 것을 모르고
꽃까지 가려면 얼마나 여러 번 부러져야 할까요

핀 하나로
살아 있는 마음
사라지는 마음
맨손의 마음
흩날리는 마음
생피를 흘립니다

짐승의 살을 꿰매던 핀으로 나를 마구 꿰맬 때

밤에도 뾰족하게 서 있는 말들을 생각했습니다
무릎이 넘어가도 마음을 가지고 걸었던 붉은 말
말들은 둥근 것에서 출발하여 흉터에 닿습니다

말들이 돌아오면
슬퍼진 부분에서 나와
꼬리를 흔들고 싶어집니다

밤에는 말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유난히 슬픈 것에만 작동하는 후들거리는 말의 목소리
핀 속으로 들어간 말의 몸들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파야 할까요

모르는 사이
꽃은 피고

모르는 사이
핀은 가라앉겠지요
☆★☆★☆★☆★☆★☆★☆★☆★☆★☆★☆★☆★
《30》
하루

최문자

하루 잘 살기란 힘들지요
하루는 하루살이의 전 생애지요
하루살이에게 시한부로 걸린 하루는 사실 하루가 아니지요
사랑하고 꿈꾸고 아이 낳고 투병까지 하는 사람들의 생애지요
삶의 시간은 배고팠지만
하루만 살고도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삶을 구걸하지 않는 하루살이
바둥거리지 않고 내리꽂히는 가파른 죽음을 보셨는지요
사람들에게는 없는 하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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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후회하는 풀

최문자

다년초가 못 될지라도
뿌리만은 살아 있고 싶었다.

뿌리의 온몸 중 한 군데라도 성해서
그 자양으로
수도 없이 넘어지던
지난 사랑을 일으키고

사랑의 끝
그 닫힌 쇠철책 끝에
처음 기쁨을
깃발처럼 매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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