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 시 모음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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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시 모음 40편

김용호 0 109
문인수 시 모음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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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박 3일의 섬

문인수

2박 3일 일정으로 섬에 들어갔다.
섬은 허퍼 한 번도 섬을 구경하지 않았다.

바다가 바다를 구경하지 않듯이
파도 소리가 파도 소리를 구경하지 않듯이
갈매기가 갈매기를 구경하지 않듯이
수평선이 수평선을 구경하지 않듯이
통통배가 통통배를 구경하지 않듯이
일몰이 일몰을 구경하지 않듯이
별빛이 별빛을 구경하지 않듯이 또한
그 무엇도 다른 무엇을 구경하지 않듯이

바삐 바삐 어구를 챙기는 어부들,
한 팀 꽉 짜인 저 바다.
어깨 너머 기웃거리다 머뭇거리다 가는
나는 섬, 2박 3일 떠돈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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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월

문인수

그대 생각의 푸른 도화연필 같은 저녁이여,
시린 바람의 억새 사이사이가 자디잘게 자디잘게 풀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
나무와 억새와 바위 사이가 또한 거뭇거뭇
소문처럼 번져 잘 풀리면서
산에 있는 것들 모두
저 뭇 산의 윤곽 속으로 흘러들었나,
불쑥불쑥 지금 가장 확실히 일어서는 검은 산 아래
저 들판 두루 사소한 것들의 제방 안 쪽도 차츰 호수 같다
다른 기억은 잘 보이지 않는 저녁이여
세상은 이제 어디라 할 것 없이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고
그립다, 그립다, 눈머는구나
저렇듯 격의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이여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
아,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대여
마음이 풀리니 다만 몸이 섞일 뿐인 저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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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월

문인수

아직은 바람이 차다 하면서
누가 밤중에 깜깜한, 찬 부엌으로 내려갔다
군불 한 소끔 더 때고 들어왔다
잉걸 화롯불도 새로 들여온 것 같았다
나도 선잠을 걷고 화롯불 앞에 쪼그려 앉고 싶었던 것처럼
방금 자리 뜬 저 아이들처럼
이글이글 올라온 이 한 무더기 동백꽃 쬐보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지금은 또 먼 땅 속에서 두런두런거리는 것 같다
아직은 때때로 바람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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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월

문인수

절을 에워싼 산 빛이 수상하다.
잡목 사이로 여기저기 펄럭 걸린 진달래.
단청 엎 질린 것 같다.
등산로를 따라 한 무리
어린 여자들이 내려와서 마을 쪽으로 사라진다.
조용 하라. 조용히 하라 마음이여
절을 에워싼 산 빛이 비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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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9월

문인수

무슨 일인가, 대낮 한 차례
폭염의 잔류부대가 마당에 집결하고 있다
며칠째, 어디론가 계속 철수하고 있다
그것이 차츰 소규모다
버려진 군용 텐트나 여자들이
호박넝쿨의 저 찢어져 망한 이파리들
먼지 뒤집어쓴 채 너풀거리다
밤에 떠나는 기러기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몇몇 집들이 더 돌아와서
또, 한 세상 창문이 여닫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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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0월

문인수

호박 눌러 앉았던, 따 낸
자리.

가을의 한복판이 움푹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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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을걷이

문인수

달구지
타고 갈 때
나락단 거두러 갈 때
막바리 그득 싣고 돌아올 때
첨벙첨벙 물로 건너는
건너다가 슬며시
물 마시는

기다렸다가 또
칸 한 칸
징검다리 건너는
물잠자리
뒤에 뒤에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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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각축

문인수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왔습니다.
따로따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

만 놉니다.
2월, 상사화 잎싹만 한 뿔을 맞대며 톡, 탁,
골 때리며 풀리그로
끊임없는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

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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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겨울 강

문인수

바람은 이제 엷은 살얼음으로 깔리면서
뻘밭 위에다가 덜렁 거룻배 한 척 올려놓고는
또 거기서 나와 처마 끝으로 어둑어둑 번져 가더니
이번에는 굴뚝 끝에서 오래 머리 풀고
몸조심하거라……. 자주 편지하고…….
이르며 사람들은 낳은 자식들의 날개를 깊이 품노라 사람들은
저마다의 땅 끝에 이르러
집을 짓고 낳은 자식들의 날개를 깊이 품노라 사람들은
저 갈대 숲으로 드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모로 누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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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겨울 강변에서

문인수

먼 수풀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새들은 왜 건너건너 날아가고 있나요

강 건너로 가서 살고 싶어요 어머니
얘야, 내 귓속을 들여다보아라
찬바람 드나드는 갈대 숲 말아냐
추운 저 새소리 말이냐 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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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꼭지

문인수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러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 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 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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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문인수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진 A4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어,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

종이도 죽는구나.

그러나 입 꽉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나왔으면 그

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누가,
날 구겨 한번 멀리 던져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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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방

문인수

갈색나방 한 마리가 이틀째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한 쪽 벽에, 벽과 벽이 만나는 구석에 납작 붙어 있다.
오체투지하는 것 같다.
천장에서 방바닥까지의 거리를 재는 듯
그렇게 날개를 쫙 펴 붙이고 있다.
그러다 잠든 걸까, 숨조차 멎은 것 같다. 그새
문밖엔, 뜰엔 목련꽃 더 많이 터져 올라 눈부신데
절방에 들앉은 지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간다.
아득한 하늘 아래, 어둔 땅 위에
나도 양팔을 벌린 채 힘껏, 가만히 누워 배긴다.
풍경소리, 대바람소리, 잘 마르지 않는 과거가, 슬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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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눈 내린 날의 첫 줄

문인수

비쩍 마른 검둥개 한 마리가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네 발바닥,
뜨고 닿는 동작이 순서대로 다닥다닥 바쁘다.

꽃 자국나는 바닥과 병 뚜껑 따는 것
같은 허공이 지금
일직선으로 길게 달라붙는 중이다.

브라더미싱.
어머니 재봉틀 소리 멀어져가는 것 같다.

저 개, 방향을 꺾어 이번엔 또
가로로 자를 댄 듯
내 눈썹 위를 오래 긋는다.

지평선에도 박음질 자국이 만져질까,
나는 자꾸
멀쩡한 데를 공연히 스스로

봉하는 것 아니냐. 하긴,
상처 아닌 행로가 어디 있을까.

날지 못하는 흰 날개, 양쪽 경치는
그저 차디차다. 어딜 가나
벗어재낄 수 없는 틈바구니,

이것이 길이다. 나는 무심코
저 개를 한참 밀고 있구나.

이쪽저쪽 끌어다 붙여 마음이 모처럼
광활한 아침이다.
무수히 꿰맨 흉터,
여기서는 안 보이는 곳으로
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
개 한 마리가 첫 줄 타자처럼 새까맣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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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달 북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득,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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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동강에서 울다

문인수

동강은 대뜸 말문을 막는다.
어이없다, 참 여러 굽이 말문을 막는다.
가슴 한복판을 뻐개며 비스듬히 빠져나가는
저기 내려 꽃피고 싶은 기슭이 너무 많다.
몸이 먼 곳,
인생이 저렇듯 아름다울 수 있었겠으나
어떤 죄가 모르고 자꾸 버렸으리라.
늙은 사내는 엎드려 산 첩첩 울고
물길은 산에 막히지 않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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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동강의 높은 새

문인수

동강 높이 새 한마리 떴다.
저, 마음에 뚫린 구멍, 꼭 그만하다.
산의 뿌리가 다 만져진다.

단 일획 깊이 여러 굽이 새파랗게
일자무식의 백 리 긴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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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동백 씹는 남자

문인수

한 이레 일찍 온 셈이 되어버렸다.
남해 이 섬엔 아직 동백이 활짝 피지 않았다.
완전 헛걸음했다. 꽃샘바람이 차다.
일행 중 좌장께서
이제 겨우 눈 뜬, 쬐끄맣게 핀
동백 한 송이를 꺾어들고 다녔다.
들여다보고, 향기 맡고, 어린
속잠지 만한 것에 혀 대보고 하더니
어, 먹었다. 아작아작아작 씹어 꿀꺽, 삼켰다.
나도, 둘러앉은 일행도 낄 낄 낄 웃었다.
그의 안색이 동백 독이 오른 것처럼 잠시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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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드라이플라워

문인수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는다.
말린 장미 . 안개꽃 한 바구니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다. 오래,
기별 없다. 너는 이제 내게 젖지 않아서
손 뻗어 건드리면 바스러지는 허물, 먼지 같은 시간들.
가고 없는 향기가 자욱하게 눈앞을 가릴 때
찔린다. 이 뾰족한 가시는
딱딱하게 굳은 독한 상처이거나 먼 길 소실점,
그 끝이어서 문득, 문득 찔린다.
이것이 너 떠난 발자국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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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땅 끝

문인수

끝났다.
모든 길은 또 이렇게 시작되었다.
땅 끝 마을 땅 끝에다가 슬쩍
발끝을 갖다 대보고는 씁쓸히 웃는다.
가파른 언덕 아래
밤바다 파도 소리가 폭풍을 안고 거칠다. 지느러미,
부레가 없는 지난날의 절망 따위여
포말, 포말,
캄캄하게 에워싸며 파랑치던 야유를 기억한다.
다시 출발하자고 막 돌아섰으나
질풍노도라는 말, 혹은 말,
저놈의 갈기를 잡고 올라타 본 적 없다.
나는 한 번도 부려먹어 보지 못한 세월,
세월이 끝내 준 것이라고는 도대체 청춘뿐이다.
지금은 늙어 아무것도 자멸하지 않고
땅끝마을 왔다가 돌아가는 초행길이지만
땅끝과 발끝,
말단끼리는 서로 참 돈독한 데가 있구나
소싯적부터 오래 잘 알고 지낸 사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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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말 걸지 말아라

문인수

나무의 큰 키는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 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나갈 곳 없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도화선 같겠다.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하다.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젓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움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걸린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저 나무 송두리째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나무는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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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매미소리

문인수

나무들은 나름대로 전원 각기 적소에 서 있다
그리움은 그러나 혼자 살지 못하고
지하공장에서 올라온 것처럼 일사불란한 작업 중이다
암흑에서 뽑은 강철심같은 것 무수히 내지르고 있다. 나무들이 내
는 금속성은 듣기에도 어째 거북하지 않다.
질긴 그 노래로써 요새
숲을 새로 짓고 있다. 수북하게 부풀어 오른 녹음이
거친 산악을 한 번식
해일처럼 거대하게 흔들어보곤 한다. 무공해 신도시는
튼튼하다. 삼나무 고사목이 나무들의 공중전화 부스처럼, 송신탑
처럼 장대하게 서있다. 팽팽한
신경섬유 같은 것, 나무와 나무 사이를 통틀어
의미망이라 한다. 빗방울, '나비바람' 한 점에도
숲은 널리 젖거나 고봉으로 다시 설렌다. 누가 울었다, 봐라
저녁 노을 또한 왕창,
전 세계적으로 한꺼번에 울창하게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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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밝은 구석

문인수

민들레는 여하튼 노랗게 웃는다
내가 사는 이 도시, 동네 골목길을 일삼아
ㅁ자로 한 바퀴 돌아봤는데, 잔뜩 그늘진 데서도
반짝! 긴 고민 끝에 반짝, 반짝 맺힌 듯이 여럿
민들레는 여하튼 또렷하게 웃는다.
주민들의 발걸음이 빈번하고 아이들이 설쳐대고
과일 파는 소형 트럭들 시끄럽게 돌아나가고 악, 악,
살림살이 부수는 소리도 어쩌다 와장창, 거리지만 아직
뭉개지지 않고, 용케 피어나 야무진 것들
민들레는 여하튼 책임지고 웃는다.
오십 년 전만 해도 야산 구릉이었던 이곳
만촌동, 그 별빛처럼 원주민처럼 이쁜 촌티처럼
민들레는 여하튼 본색대로 웃는다.
인도블록과 블록 사이, 인도블록과 담장 사이,
담장 금 간 데거나 길바닥 파진 데,
민들레는 여하튼 틈만 있으면 웃는다. 낡은 주택가,
너덜거리는 이 시커먼 표지의 국어대사전 속에
어두운 의미의 그 숱한 말들 속에
밝은 구석이 있다. 끝끝내 붙박힌 '기쁘다'는 말,
민들레는 여하튼 불멸인 듯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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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배꼽

문인수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 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 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정낭 지붕 위 조

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 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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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벽의 풀

문인수

풀들은 어떻게 시멘트를 삭이는가, 사귀는가
이 도시의 4차선 도로변을 따라 높이 둘러쳐진 옹벽엔
오래 전부터 깊은 금이 구불구불 길게 가 있다
이 거대한 위압 아래가 한동안 고요한 때가 봄이다
상처에 자꾸 손이 가고 슬픔이 또 새파랗게 만져지는 것처럼
금간 테를 디디며 풀들이 줄지어 돋아나 자란 것이다
산야의 풀들에 비해 물론 몹시 지저분하고 왜소하지만
명아주 바랭이 참비름 강아지풀 같은 제 이름, 초록
정강이의 제 중심을 잘 잡고 있다
생이 곧 길이어서 달리 전할 말이 없는 풀들
흙먼지며 매연, 저 숱한 차량들의 소음까지도 꽉 꽉 다져 넣어
밟으며 빨며 더듬더듬 더듬어 풀들은 또 풀들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천산북로, 누더기 몸들이 누대누대 닦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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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문인수

흐린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비
젖은 것들의 몸이 잘 보인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의 한쪽 끝을 물고 새 날아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세뼘 잿빛 하늘 가로질러 짧게 사라진다
창유리 창유리들이,
나무 나무의 이파리 이파리 풀잎들이
모두 그쪽을 보고 있다
잘 보이는, 뇌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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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뿔 시퍼렇게 만져진다

문인수

책상 모서리에 허리가 떠 받혀 오래 아프다.
아시다시피 모서리의 안쪽이 구석이고
구석의 바깥쪽이 모서리인데
이 단단한 명.암의 어떤 내용이
이 책상에서 불쑥 나온 원목의 어떤 일갈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날 일부러 한 대 쥐어박은 걸까
그러나 무슨, 악의에 찬 공격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벌목 현장의 열대 우림을 쩌억 갈라붙이며 우지끈
쓰러졌을 때, 그때 지축을 흔든 우레의 뿌리,
혹은 엄청난 수령의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저릿하다.
그 여진이겠지만, 아직도 직진인 것 같다.
창공을 찌르며 내쳐 홀로 가는 외뿔, 그런 정신이
노거수(老巨樹)의 망한 몸인 이 책상 어디에
책상으로 가부좌를 튼 오랜 시간 내내
그대로 옹이 박혀 있었구나 나는 종일 빈둥거렸으니
무슨 길을 잡아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니고
부질없는 근심들이 밀어 올린 외로움은 쥐뿔도 아니어서
병인 것 같다. 오늘 다시
떠 받힌 데를 들여다보니 멍이 다 들어 있다.
드높은 우듬지 끝이 시퍼렇게 만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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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수장(樹葬)

문인수

나무 한 그루를 얹어 심는 것으로
무덤을 완성하면 어떻까.

평평하게 밟아
그 일생이 보이지 않으면 되겠다.

너무 많이 돌아다녀 뒤축이 다 닿은 족적은 그 동안
없는 뿌리를 앓아온 통점이거나 죄
쓸어모아 흙으로 덮는다면 잘 썩을 것이며
그 거름을 빨아 한탄 무성하면 되겠다.

어떤 춤으로 벌서면 다 풀어낼 수 있겠는지
느티나무든 측백나무든 배롱나무든 이제
오래 아름다운 감옥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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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문인수

말 걸지 말아라.

나무의 큰 키는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 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나갈 곳 없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도화선 같겠다.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하다.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젓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움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걸린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저 나무 송두리째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나무는 폭발한다.
☆★☆★☆★☆★☆★☆★☆★☆★☆★☆★☆★☆★
《30》
싸우는 소

문인수

소 눈은 검고 커다랗다
싸우니까 더 커다랗다
와- 와- 떠드는 사람들 소리에 뿔을 맞대고 있지만
소의 두 눈은 점점 더 커다랗게 껌뻑, 껌뻑, 슬프다 서로
미안, 미안하다고 한다
☆★☆★☆★☆★☆★☆★☆★☆★☆★☆★☆★☆★
《31》
안개

문인수

기차의 기인 꼬리가 막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아무런 구멍도 나지 않는다.
아 마음의 자욱한 준령,
이 그리움 통과하지 못하겠다.
쿵쾅거리는 몸만 제자리 뜨겁게 만져진다.
☆★☆★☆★☆★☆★☆★☆★☆★☆★☆★☆★☆★
《32》
여름밤

문인수

저인망의 어둠이 온다

더 많이 군데군데 별 돋으면서
가뭄 타는 들녘 콩싹 터져오르는 소리 난다

가마솥 가득 푹 삶긴 더위
솥검정 같은 이 더위를 반짝반짝 먹고 있다

보리밥에 짱아찌 씹듯
저 별들이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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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오징어

문인수

억누르고 누른 것이 마른 오징어다
핏기 싹 가신 것이 마른 오징어다
냅다, 불 위에 눕는 것이 마른 오징어다

몸을 비트는 바닥을 짚고 이는 힘
총궐기다
하다못해 욕설이다

잘게 씹어 삼키며
무수한 가닥으로 너를 찢어발기지만
너는, 시간의 질긴 근육이었다

제 모든 형상기억 속으로
그는, 그의 푸른 바다로 갔다
☆★☆★☆★☆★☆★☆★☆★☆★☆★☆★☆★☆★
《34》
저 할머니의 슬하

문인수

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엔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는 숨쉬는
것조차 짐 아닐까 싶은데
노구를 떠난 거동일랑 전부
잇몸으로 우물거려 대강 삼키는 것 같다.
지나가는 아낙들을 부르는 손짓,
저 허공의 반경 내엔 그러니까 아직도
상처와 기억들이 잘 썩어 기름진 가임의
구덩이가 숨어 있는지
할머니, 손수 가꿨다며 호박잎 묶음도
너풀너풀 흔들어 보인다.
☆★☆★☆★☆★☆★☆★☆★☆★☆★☆★☆★☆★
《35》
정월

문인수

농촌 들녘을 지나가는데 춥고 배고프다
저 노인네 시린 저녁이 내 속에서
등 달 듯 등 달 듯 불을 놓는다
꽃 같은 불 쪽으로 빈 들판이 몰린다
거지들 거뭇거뭇 둘러앉은 것 같다
발싸개 벗어 말리며 언 발 녹이며
구운 논두렁도 맛있겠다
그 뱃속 깊은데 실낱같은 도랑물 소리
참 남루한, 어두운 기억을 돌아오는데도
피를 맑히는
이 땅의 神이옵신 그리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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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중심을 잡다

문인수

하늘이 잠시도 눈 떼지 못한다.
강아지풀 하나가 왜 하필
이 거친 돌담장 위에 올라서서 하늘을 쓰고 있나
미루나무 큰 키가, 방올음산 꼭대기가 그러하듯이
상모 돌리듯 상모 돌리듯
제게 꼭 맞는 모자인 양 하늘을 쓰고 있다.
가느다란 모가지며 정강이로 추는 춤,
폭우와 암흑의 나날이 상세하다.
바람에서 뽑은 섬유질 같은 것
세 필로 적는 일대가 새파랗게 질기다.
파란만장의 강아지풀 하나가 잠시
가만히 귀 기울이다가 다시 즐겁게,
즐겁게 하늘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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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창포

문인수

창포를 보았다.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 말을 슬쩍 못들은 척 하며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저 혼자 새초롱하게 내다보고 있다.
노리실댁/소래네/닥실네/봉산댁/새촌네/분네/개야미
느미/꼭지/뒷모댁/부리티네/내동댁/흠실네/모금골댁/
소득골네/갈 잿댁 우거진 한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
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
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
멀리 가 버린다 창포
긴 허리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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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파 냄새

문인수

노점 아주머니가 지금 부지런히 대파를 다듬고 있다

아주머니한테 아직 묻어있는 색이 잠시 입을 가리며 킬킬킬킬 웃으며
오늘도 펑퍼짐한 몸 한 무더기를 털썩 낳아 놓았다.
어둑살 아래, 좌판 위에 쑥 쑥 뽑아놓는 대파,
파는 벗겨져 하얗게 가지런히 깔리고
건반 같다. 그 옛날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 소리가 날 것 같다는
내 생각 따위의 파 껍질들은 아무렇게나 희끗희끗
언 길바닥에 나부끼고 들러붙고 밟히고 깨끗한,
독한 파 냄새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저 아주머니 속에는 더 많은 입김이,
긴 화차 같은 인생이 꽉 꽉 채워져 악물려 있을 것이다.
또한 아주머니의 오십대 중반을 시꺼먼 방한복에다 뚤뚤 뭉쳐
눌러 앉혀 놓았으니 낮은, 최종학력의 저 바닥은 사실
이 놈의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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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문인수

폭포 직전 물의 근육은 팽팽하다.

이제 저 허연 광목 필 틀어잡고
남김없이 부서지는 물보라의 화염으로 당기는 것,

개벽 당시를 본다.
고요는 마침내 만발, 만삭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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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그립다는 말의 긴 팔

문인수

그대는 지금 그 나라의 강변을 걷는다 하네.
작은 어깨가 나비처럼 반짝이겠네.
뒷모습으로도 내게로 오는 듯 눈에 밟혀서
마음은 또 먼 통화중에 긴 팔을 내미네.
그러나 다만 바람 아래 바람 아래 물결.
그립다는 말은 만 리 밖 그 강물에 끝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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