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아 시 모음 3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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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시 모음 35편

김용호 0 1050
이향아 시 모음 3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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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 강물 소리는

이향아

이제는 나도 철이 드나 봅니다,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는 치맛귀를 붙잡고
이대로 그만 가라앉거라, 가라앉거라
타일러 쌓고
소슬한 바람 내 속에서 일어나
모처럼 핏줄도 돌아보게 합니다
함께 살다 흩어지면 사촌이 되고
다시 가다 길을 잃어 남남이 되는,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지금은 내왕이 끊긴 일가친척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고 가면 바다가 벼랑처럼 있어
거기 함께 떨어져 만난다고 하지만
죽어서 가는 천당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가을 강물을 보면 문득 용서받고 싶습니다, 어머니.
즐펀히 너브러진 물줄기가 심장으로 고여서
땀으로 눈물로 이슬 맺는 은혜
가을 강가에 서서
나는 모처럼, 과묵한 해 그림자 갈대그늘을
따라가면서 잠겨들면서
내 목숨 좁은 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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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결심

이향아

하나씩 덜어내리라
젖은 빨래 물기 짜듯
뱉어내리라

참았던 울음
차 오른 가래를 밀듯
눈 딱 감고
비워내리라

강아지풀은 어깨를 부벼
씨를 털어내고
하늘도 비구름 쏟더니
표표하구나
도도하구나

부질없는 이름
잘라내리라
텅 빈 껍데기만
덜컹거려도
초연히 머리 젖혀
푸른 바람 쐬고
맑게 들이비치니 날개 돋치리

보내리라
버리리라 열 두 번이라도
여기가 설령
눈 먼 벼랑일지라도
뛰어내리리라
죽어도 슬픈 혼 있으면
솔개처럼 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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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청하소서

이향아

하루를 탈없이
건넜습니다

안 풀리는 매듭은
베고 잡니다

오늘밤 꿈속 밝힐
불꽃같은 눈

내일 아침 돋는 해여
나를 경청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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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욕일기·1

이향아

지금까지 내가 씹은 것은 질긴 무료였다
지금까지 내가 삼킨 것은 아름다운 독소였다
며칠 째 빈속에 맹물만 들이키면서
맹물보다야 유정하게
채색되었던 목숨
맹물보다야 간간하게
길들여진 비위
목숨을 비워내리라
비위를 헹궈내리라
나 비로소 사랑하노니
아름다운 목숨아
명상에 지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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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꽃이 있는 세상

이향아

지상에서
빛나는 이름 하나 누가 물으면
꽃이여,
내 숨결 모두어 낸 한 마디 말로
그것은
'꽃입니다'
고백하겠다
너와 사는 세상이
가슴 벅차다

바람 몹시 불어서
그 사람이 울던 날도
골목마다 집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이 이별로 얼어붙던 날도
낮은 언덕 양지쪽 등불을 밝혀
약속한 그 날짜에 피어나던 너
꽃이 있는 세상이 가슴 벅차다

간직했던 내 사랑을 모두 바쳐서
열 손가락 끝마다 불을 켜 달고
나도 어느 날에 꽃이 피련다
무릎 꿇어 핀다면
할미꽃으로
목숨 바쳐 핀다면
동백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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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사랑과 근심

이향아

내 근심은
그대를 바라보는 일
그대를 바라볼 때 어리는 물기
떠돌다가 심장으로 되돌아가는
붉은 피톨의 환상이다

늦은 저녁 식탁을 치우며
설겆이 그릇에 노니는 비누거품을
꿈처럼 날리고 있노라면
깊은 밤 걸어서 떠나는 여행처럼
자유여
구슬프다

평생을 두고두고 색깔을 골라도
결국은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열 손가락 불 밝히고
전생인지 이승인지
하염없는 부활의 옥타브를 올라도
한 발자욱도 오르지 못하는

내 근심은
그대를 사랑하는 작업,
그대를 반기는 갈채
깊어가는 세월 위에 쓰러진
몇 소절의 노래
몇 마디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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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 아들이 건너는 세상

이향아

잘난 남자들이 남자를 벗어던지고 시시한 여자가 되려고 한다
여자보다 작은 계집애가 되려고 한다
계집애가 되어 입술연지 붉게 칠하면 그 몸으로 편히 살 수 있다고
여자가 되면 세상물정 몰라도 쉽다고 누가 가르치나보다
제 집에선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모르면서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을 건지려던 옛날의 영웅,
태평하게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리나 내던 한심한 선비,
그들은 오래 전에 죽고 없다
먼 바다 파도와 싸워 태산 같은 물고기를 잡아,
앙상한 뼈만 싣고 돌아온 남자,
그 우렁찬 남자도 요즘 소설에는 없다
가늘고 길게 비겁해도 좋아, 오래 살아남으려고 한다
살아남는 일 중요하지 아암, 죽지는 말아야지
세상이 갈수록 잘난 남자들의 기를 죽여서,
나는 내 잘난 아들에게, 내 아들의 잘난 아들과 그 아들의 잘난 아들에게
키 큰 쑥대밭길 숨어 걷는 법이나 가르치란 말인가
내 아들이 건너야 할 걱정스러운 세상,
내 아들의 청춘이 걱정스러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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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내 아들이 건너는 세상

이향아

잘난 남자들이 남자를 벗어던지고 시시한 여자가 되려고 한다
여자보다 작은 계집애가 되려고 한다
계집애가 되어 입술연지 붉게 칠하면 그 몸으로 편히 살 수 있다고
여자가 되면 세상물정 몰라도 쉽다고 누가 가르치나보다
제 집에선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모르면서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을 건지려던 옛날의 영웅,
태평하게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리나 내던 한심한 선비,
그들은 오래 전에 죽고 없다
먼 바다 파도와 싸워 태산 같은 물고기를 잡아,
앙상한 뼈만 싣고 돌아온 남자,
그 우렁찬 남자도 요즘 소설에는 없다
가늘고 길게 비겁해도 좋아, 오래 살아남으려고 한다
살아남는 일 중요하지 아암, 죽지는 말아야지
세상이 갈수록 잘난 남자들의 기를 죽여서,
나는 내 잘난 아들에게, 내 아들의 잘난 아들과 그 아들의 잘난 아들에게
키 큰 쑥대밭길 숨어 걷는 법이나 가르치란 말인가
내 아들이 건너야 할 걱정스러운 세상,
내 아들의 청춘이 걱정스러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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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바람만 불어도

이향아

나는 아무래도 메말랐나보다
바람만 불어도 버스럭거린다
버스럭거리다가 혼자 찢어지고
찢어지다가 혼자 가라앉는
나는 그래도 축축한 편인가보다
바람만 불어도 눈앞 보얗게 막히고
남들 따라 흐느끼기 목이 아프다
바람만 불어도 이렇게 사무치는
바람만 불어도 가슴 미어지는
버스럭거리든지
가라앉든지
날마다 무슨 바람이든 불지 않는 날 없고
무슨 핑계로든 울지 않는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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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버릇된 가난

이향아

나도 모르게 버릇이 되었나 보다
요즘은 남의 외투를 걸친 듯 더러 서툰 일이 생기고
뒤꿈치가 벗겨질 듯 미끄러운 신발
거리는 타관처럼 낯선 얼굴로 넘친다
언제 이렇게 되었는가
마음 편하기로는 가난만한 것이 없는데
거기 질이 나서 모자람 없이 살았거늘
이제 새삼 무얼 바꾸랴
아무리 일러줘도 부자들은 모르는
아랫목 이불 깔린 구들장 같은
발뻗고 기대기 은근하고 수더분한
그러다가 금세 눈앞이 젖어드는
그보다 좋은 세상 어디 있으랴만
나도 모르게 가난을 벗으려고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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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벚꽃 잎이

이향아

벚꽃 잎이 머얼리서 하늘하늘 떨리었다
떨다가 하필 내 앞에서 멈추었다
그 눈길이 내 앞을 운명처럼 막았다
가슴이 막히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흐느끼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아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었다
벚꽃 잎은 계속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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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별들은 강으로 갔다

이향아

유성이 금을 긋고 지나간 다음이면
궁창이 양쪽으로 나뉜다는 말
홍해가 갈라지고 물 가운데 길이 나듯
오래 맺힌 소원도 풀린다는 말
허구한 날 뒤채기며 울부짖어도
손톱하나 끄떡없는 사파이어의 하늘
희고 맑은 가슴이나 비추며 살까
흐르던 별들은 강으로 갔다
강둑에는 서걱대며 흐느끼는 갈대
오지랖엔 사방천지 여울이며 실개천
쫓기면서 반짝이기 몇 광년인가
별들은 다시 흘러 먼 강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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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비운 항아리처럼

이향아

기적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퍼낸 물만큼 물은 다시 고이고
달려온 그만큼 앞길이 트여
멀고 먼 지축의 끝간데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동이 튼다면

날마다 다시 사는 연습입니다
연습하여도 연습하여도
새로 밀리는 어둠이 있어
나는 여전히 낯선 가두에
길을 묻는 미아처럼 서 있곤 했습니다

눈을 감고 살기를 복습하여서
꿈을 위해 비워둔 항아리처럼
꿈도 비워 깊어진 항아리처럼
기적보다 눈부시게 돌아오기를
옷깃 여며여며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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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이향아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울고불고 한다
산 사람이야 들풀처럼 내던져도
살아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숨을 쉬는 그대 지금 행복하신가

서걱거리는 소금의 눈물 가지고
차지게 엉겨 붙는 미련 붙들고
천만 번 아니라고 도리질해도
들불처럼 일어나는 그리움으로
정말 그런가,
살아가기 온 동네 평안들하신가

죽은 사람이 더 잘 알겠지
물어보자, 그도 한 때는 산 사람이었느니
삼시 세끼 탈 없이 녹녹하던가
사대육신 쉽던가, 멀쩡하던가

남기고 간 걱정 남기고 간 빚까지 갚아가려면
하마 깨질 듯 금간 항아리
덜컹거리는 군소리도 달래야 하는데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지만
산 사람도 무지무지 짠하다
지고 갈 짐 만만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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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늘한 세상

이향아

갑자기 아무도 없다
한 끼니 같이 먹자고 불러낼 사람이 없다
차 한 잔 마시자고 부를 사람이 없다
나 잘 있노라고 통정할 사람이 없다
갑자기 아무도 없다
검은 땅 겨우 딛고 나 혼자 섰다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되나 보다
나는 너무 헤프게 그리움을 풀어서
너무 가볍게 나불거렸나 보다
갑자기 아무도 없는,
하늘 아래 지평선에 혼자 던져진
얼음처럼 비치는
서늘한 세상
☆★☆★☆★☆★☆★☆★☆★☆★☆★☆★☆★☆★
《16》
아지랑이처럼 살아요

이향아

그래도 가끔은 내 생각도 하면서
더러는 이 근처를 지나기도 하겠지요.
달빛 떠나 헹궈서 가라앉은 웃음으로
아지랑이처럼 살아요, 나는.
예전의 불길은 고운 재로 덮어서
예전의 원망은 물살에 흘려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려요
아지랑이처럼 끄덕거려요.
세월이란 무서워요,
세월 덕분이지요.
아지랑이처럼
아지랑이처럼
내가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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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부만 묻습니다

이향아

안부만 묻습니다
나는 그냥 그렇습니다
가신 뒤엔 자주자주 안개 밀리고
풀벌레 자욱하게 잠기기도 하면서
귀먹고 눈멀어 여기 잘 있습니다.
나는 왜 목울음을 꽈리라도 불어서
풀리든지 맺히든지 말을 못하나.
흐르는 것은 그냥 흐르게 두고
나 그냥 여기 있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날짜는 가고 드릴 말씀 재처럼 삭아
모두 없어지기 전에 편지라도 씁니다.
날마다 해가 뜨고 날짜는 가고
그날이 언젠지 만나질까요.
그때도 여전히
안녕히 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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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어제와 다른 세상

이향아

어금니 하나를 빼냈습니다
조여 주시던 질긴 끈 하나
지탱하던 받침 하나를 뽑았습니다
뼈 중의 뼈
수십 년 날 먹여 살리느라
늘그막에 병이 든 충직한 일꾼 하나를
이제는 쓸모없다 몰아냈습니다
한결같지 않다는 말, 믿지 못할 세상이란 말,
믿지 않았더니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채워지면 채워지는 대로
이만해도 다행이지, 고맙지
끄덕이며 살리라
두 손바닥 정히 모아 그러려고 했더니
어제 없던 구멍 하나 새로 뚫었습니다
그 틈새로 바람이 샙니다
바람을 따라 헛것이 드나들어
사정없이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미 어제와 다릅니다
몰아낸 것보다 더 모자라
밤 지나면 세상은 사뭇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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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울어야 할 것 같다

이향아

살다보면 가끔은 내가 가엾다
그런 날도 나는
가엾은 나를 위해 울지 않는다
정말이지 한 번도 나를 위해서는 울지 않았다
지금까지 흘린 눈물은 몇 되나 될까
남들을 핑계하며 마음 놓고 흘린 눈물
나는 괜찮지만 그가 걱정인 듯이
나는 탈이 없지만 그만 불쌍한 듯이
내가 그 때문에 자꾸 우는 것처럼
나 때문에 어디선가 우는 사람이 있을 거다
날 위해 우는 그 사람을 위해
오늘도 질펀하게 울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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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유서를 쓰던 밤

이향아

내게도 유서를 쓰던
밤이 있었지.
앞길 창창하던 젊은 시절,
어둠은 궁성같이 거룩하고
고요는 뻘밭처럼
끈끈했었지.

나는 생애의 마지막 밤을
포옹하면서,
달개비꽃 맑은
나의 별을 우러렀었지.

나의 유서는 차라리
아름다운 연서.
세상을 목숨 바쳐
사랑했었네.
온몸이 무너지는 고백이었지.

댓돌 위에 벗어 놓은
이승의 신발 위에
달빛 가득 흐느끼던
나의 첫사랑.
유서를 쓰던 밤의 위태롭던 꿈,
내 평생
가장 추운 밤이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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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잠옷을 갈아입으며

이향아

잠옷을 갈아입으며 나는
스스로 입는 수의를 생각한다

먼길 떠날 채비를 하듯
머리카락 순히 눕혀 빗질을 하고
비로소 이대로 출발할 수 있을 듯한
설레임

이제는 나를 조여 웅크리거나
부풀려 철없이 풍을 떨거나
고달피 날을 세워
싸우지 않아도 되리

설령 내일 아침 이대로
눈을 뜨지 않더라도
순종하는 자의 천진함
나는 새벽 이슬처럼 다시
순결해지리

자리를 펴고 누우며 나는
스스로 삽질하는 쾌적한 무덤을
생각한다
긴 강에 띄우는
한 척 종이배의
못 믿을 희열을 나는 누린다
☆★☆★☆★☆★☆★☆★☆★☆★☆★☆★☆★☆★
《22》
정신과 육체

이향아

나는 한때
몸뚱이는 정신의 껍데기라는 말을 믿었다,
어리석게도.
죽으면 썩어질 부끄러운 몸,
영혼만 순결하고 영원하리라,
나는 그 말을 바보처럼 우러렀다.
백 사람한테 백 번 물어봐도 좋아
그건 말도 안 돼,
뜨거운 콧김 헐떡거리면서
중병도 아닌 겨우 독감으로
한 사흘 오슬오슬 시달리는 지금
내가 깨닫는 진리, 무거운 것 하나
육체처럼 절박하고 거룩한 것 있으랴.
육체는 정신의 아름다운 궁전
아니, 육체가 없으면 내가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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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죄인을 벗고 싶다

이향아

고백하자면 그 모자를 훔친 사람은 나다
그 열쇠를 훔친 사람은 나다
그 침묵을 훔친 사람도 나다
훔친 모자를 명예처럼 쓰고서
훔친 열쇠를 비결처럼 품고서
훔친 침묵을 인격처럼 붙들고서
아무 탈없이 나는 튼튼하다
터놓고 말하자면 네 시력을 훔친 사람은 나다
네 분망을 훔친 사람은 나다
네 자유를 훔친 사람도 나다
훔친 시력으로 세상을 보고
훔친 분으로 거리를 달려
아, 훔친 자유로 휘날리는 깃발
어지럽고 두려운 도둑질의 세상이다
부탁하노니, 누가 내 모자를 다시 훔쳐가 다오
제발 날 위해 희생해 다오.
나도 그를 용서하여 죄인을 벗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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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지평선만 있데요

이향아

거기에는 지평선만 있더라
달려가다 기가 막혀 죽을지도 모르는
고꾸라질 듯 고꾸라질 듯 지평선을 베고서
아득히 하나님이 누워 있더라
거기에는 바위산만 있더라
만년설 얼음산 계곡을 타고
아찔하게 하나님이 내려오고 있더라
그러다가 거기에는 산림과 호수
가도 가도 산림과 호수밖에 없더라
나는 경건하게 모자를 벗었지
그렇게 하는밖에 도리 없었지
지구 위에 있는 나라 캐나다
캐나다는 대체로 그러하더라
이만 저만 넓어야지 잘은 모르겠더라
☆★☆★☆★☆★☆★☆★☆★☆★☆★☆★☆★☆★
《25》
안부만 묻습니다

이향아

안부만 묻습니다
나는 그냥 그렇습니다
가신 뒤엔 자주자주 안개 밀리고
풀벌레 자욱하게 잠기기도 하면서
귀먹고 눈멀어 여기 잘 있습니다.
나는 왜 목울음을 꽈리라도 불어서
풀리든지 맺히든지 말을 못하나.
흐르는 것은 그냥 흐르게 두고
나 그냥 여기 있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날짜는 가고 드릴 말씀 재처럼 삭아
모두 없어지기 전에 편지라도 씁니다.
날마다 해가 뜨고 날짜는 가고
그 날이 언젠지 만나질까요.
그때도 여전히
안녕히 계십시요
☆★☆★☆★☆★☆★☆★☆★☆★☆★☆★☆★☆★
《26》
친구랑 장날에

이향아

내 창자 속까지 안다는 친구
그 친구 불러내어 장에나 가고 싶다.
화순 장날이나 담양 장날 언젠가
하루 골라서
기웃거려 반나절은 지나가게 두고
장터 국밥 허름한 포장을 밀면
와락 달려드는 눈물 같은 훈김
삐걱대는 걸상에 아무렇게 걸터앉아
숭덩숭덩 조선 파 듬뿍 얹어야지
뚝배기 넘치게 밥을 말아야지
세상이 변했어,
인심도 변했어
우리는 입 안 가득 세월을 씹으면서
파장이야
파장이야 웨쳐도 좋아.
떨이야 떨이야 목을 놓아도 좋아
친구 하나 불러서 장에나 가고 싶다.
☆★☆★☆★☆★☆★☆★☆★☆★☆★☆★☆★☆★
《27》
허망한 기쁨

이향아

이후로는 기쁨을 말하지 않으련다.
마음을 휘몰아 격랑처럼 맥이 뛰는
차라리 그 이름을 돌아가련다
자주자주 쓸쓸하여 골방에 울지라도
부드러운 그의 손을 더듬지 않으련다

멀리 바라뵈던 별도 슬어 지치고
아득한 종소리 들리지 않아 부끄러운
열기만 솟아올라 목이 자꾸 타는
노역보다 힘겹고 허망한 기쁨
기쁨이 밤낮 없이 목마르게 쫓는,
이후로는 찾아 헤매지 않으련다
결국은 큰 산허리 한 줌 모래
자즈러질 듯 홀로 가슴 쓸어 내릴지라도
오래 묵은 기다림 하나
종신형의 약속처럼 품고 살련다.
☆★☆★☆★☆★☆★☆★☆★☆★☆★☆★☆★☆★
《28》
화려한 십자가

이향아

동네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예배당도 네 군데나 새로 문을 열었다
아파트로 솟아오른 십자가의 불빛은
밤을 지켜 새벽이면 빈혈이 깊어가도
그야 어떠랴, 아름다운 일이다
요즘 세상에서 유행하는 말로
기죽지 마, 기죽지 말라고
소리소리 저렇게 자지러지면서도
하늘에 먼저 가서 닿으려는 발돋움
그야 어떠랴, 어여쁜 일이다
다만 이것만은 걱정이다
외롭던 성자의 피에 젖던 고난이
오늘은 애드벌룬처럼 떠 있어도 되는지
유명 메이커의 상표 속에서
저토록 헤픈 눈짓으로 손을 까불어도 되는지
화려한 십자가가
죄짐보다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새벽
기죽지 마, 기죽지 마,
나는 얼토당토않게
기죽지 않을 것만 결심하였다
☆★☆★☆★☆★☆★☆★☆★☆★☆★☆★☆★☆★
《29》
그 애

이향아

청댓가지 붙잡고 몸을 떨던 그 애
네거리 모퉁이 술가겟집 딸
귀먹은 그 아비 고래고래 악을 써
청댓가지 잡으면 콧소리도 슬프던
늪처럼 잡아끄는 이상한 향내
젖가슴 일찍 벙글어 비밀도 많고
홑 잠방이 바람나게 달음질치면
눈앞 아찔하게 출렁대던 가슴
청댓가지 붙잡고 점을 치던 그 애
술가겟집 홀아비 외동딸이던
넓으나 넓은 세상
철모르던 클레멘타인
☆★☆★☆★☆★☆★☆★☆★☆★☆★☆★☆★☆★
《30》
그것이 걱정입니다

이향아

짓밟히는 것이
짓밟는 것보다 아름답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피흐르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흐르는 내 피를 허락하겠습니다
상처 속 흔들리는 가느다란 그림자
그 사람의 깃발을 사랑하겠습니다
천년 후에 그것이 꽃이 된다면
나는 하겠습니다
날마다 사는 일이 후회
날마다 사는 일이 허물
날마다 사는 일이 연습입니다

이렇게 구겨지고 벌집 쑤신 가슴으로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을는지 몰라
나는 그것이 제일 걱정입니다
☆★☆★☆★☆★☆★☆★☆★☆★☆★☆★☆★☆★
《31》
그립구나 진부한 것들

이향아

정겨운 말들은 이미 낡았다
밥이니 집이니 하는 말들이 그렇듯이
어머니의 어머니로 이어지는 산줄기
산줄기의 등성이에 깃을 치는 자식이니 고향이니
그렇고 그런 것들
물보다 진하다는 피도
다그쳐도 끝끝내 진실 하나뿐이라는 오래된 사랑도
낡을 대로 낡았다 진부하다

세상에는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는 것들
뼈대니 골수니 눈물이니 하는
최후의 쑥굴형 처럼
진신사리처럼
지긋지긋한 고집불통의 묵은 등걸 같은 것들이 있다
가치 있는 것들은 가치가 있다면서 자꾸만 되풀이하다가 쓰러진다
과속하는 세상에 살아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쓰러지지 않고 살아 있는
그립구나, 진부한 것들
진부한 말들은 대체로 진실하다
☆★☆★☆★☆★☆★☆★☆★☆★☆★☆★☆★☆★
《32》
깊은 후회

이향아

공연한 말을 했다
그런 말을 품으면 소금이 되었다가
지긋하게 쓰다듬으면 정금도 될 텐데
혼자 앓다 땀을 낼 걸 들쥐처럼 약았다
그는 긴 터널을 지나
그는 질컥이는 수렁에 잠겨
울렁대는 멀미를 삼킬 것이다
문밖에 빗방울이 실로폰처럼 떨어질 때
나도 거기 맞춰 장단이라도 칠 걸
샛바람이 은근하게 흔들리는 동안 덩달아 흔들거릴 걸
쓸개가 있는 듯이 없는 듯이 끄덕거리는
저 덩치 큰 나무들 나뭇가지들
지금은 봄도 무더기로 질주하는 길목인데
나 실없는 헛소리를 했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나 갈수록 어리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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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꽃다발을 말리면서

이향아

누가 내게
이와 같은 슬픔까지 알게 하는가
꽃이 피는 아픔도 예사가 아니거늘
저 순일한 목숨의 송이 송이
붉은 울음을 꺾어다가
하필이면 내 손에서 시들게 하는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꽃은 매달려서 절정을 모으고
영원히 사는 길을 맨발로 걸어서
이렇게 순하게 못 박히나니
다만 죽어서야
온전히 내게로 돌아오는 꽃이여
너를 안아 올리기에는
내 손이 너무 검게
너무 흉하게 여위었구나

황홀한 순간의 갈채는 지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빈혈의 꽃과
무심한 벽과
굳게 다문 우리들의 천 마디 말뿐
죽어가는 꽃을 거꾸로 매다노라면
물구나무서서 솟구치는
내 피의 열기,
내 피의 노여움,
네 피의 통곡,
꽃을 말린다 입술을 깨물고
검게 탄 내 피를 허공에 바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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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동행

이향아

강물이여
눈 먼 나를 데리고 어디로 좀 가자
서늘한 젊음, 고즈넉한 운율 위에
날 띄우고
머리칼에 와서 우짖는 햇살
가늘고 긴 눈물과
근심의 향기
데리고 함께 가자
달아나는 시간의 살침에 맞아
쇠잔한 육신의 몇 십분지 얼마
감추어 꾸려둔 잔잔한 기운으로
피어나리

강물이여 흐르자
천지에 흩어진 내 목숨 걷어
그 중 화창한 물굽이 한 곡조로
살아 남으리

진실로 가자
들녘이고 바다고
눈 먼 나를 데리고 어디로 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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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추억이라는 말에서는

이향아

추억이라는 말에서는
낙엽 마르는 냄새가 난다.
가을 청무우밭 지나서
상수리숲 바스락 소리 지나서
추억이라는 말에서는
오소소 흔들리는
억새풀 얘기가 들린다
추억이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
그래서 마냥 그립다는 말이다.
지나간 일이여,
지나가서 남은 것이 없는 일이여.
노을은 가슴속 애물처럼 타오르고
저녁 들판 낮게 깔린 밥짓는 연기.
추억이라는 말에는
열 손가락 찡한 이슬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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