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 모음 3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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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 모음 33편

손택수 시 모음 3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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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슴에 묻은 김치 국물

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 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 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 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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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의 페달을 밟으며

손택수

자전거 이름을 오디오라 지은 뒤부터다
체인의 어느 마디에서 북북쪽으로 옮겨가는
기러기 떼의 울음소리가 난다
가을 이맘때면 바큇살에서 억새 서걱이는 소리
서해 갑문을 통과한 게들이 강변 억세 위에서 딱, 딱
등딱지 부딪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질주에 도취한 나의 오디오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초들 자갈들 다 밀어낸 전용도로
속도감에 취한 쾌감이 어찌 착잡하지 않았을까
강물의 사라진 허리선을 기억하기 위하여
볼륨을 잃어버린 강의 노래를 받아 적기 위하여
심장 박동 소리 쿵쾅거리도록 페달을 밟는 그때
나의 혈관은 오디오로 이어진 케이블, 가고 있는 이 순간이
땅과 하늘에 플러그를 꽂은 저 풀과 나무들이 찌릿찌릿
전기를 통하게 한다면, 모순이여.
질주하는 동안 나는 처음이자 끝이다
당도하지 않은 채로 너의 가장 중심에 닿아있다
풀숲 꿩처럼 튀는 돌멩이들 강물에 끼워주는 물 바퀴를 굴리며
바퀴 페달을 오르간 페달처럼 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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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미줄

손택수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은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미터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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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손택수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 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히며
걸을 때마다 챙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 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 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 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 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가는 동안
들려오지 않으면 이제는 왠지 허전해진다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럇
뒷굽을 치며 갈기를 휘갈기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무거운 몸에 리듬을 실어주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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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름의 실감

손택수

수국을 보면 나는 좀 은밀해진다
누가 보나 안 보나, 다치지 않게, 꽃둘레를 가만히 안아보고 싶어진다

그때 내 손은 영락없는 브레지어 컵, 애인의 선물을 사러 갔다가
사이즈를 묻는 매장 직원에게 나도 몰래 두 손을 벌려 안아보던 허공의 컵

수국을 품고 있으면, 꽃뭉치 더 처지지 않게 받쳐 들고 있으면, 컵 너머로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구름이 있다 손가락을 넘치는 꽃 범벅

등 뒤로 돌아가며 브래지어 호크라도 채워주듯이
수국이 피면, 수국을 따라 그대로 굳어져도 좋을 것 같은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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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길이 나를 들어올린다

손택수

구두 뒤축이 들렸다 닳을 대로 닳아서
뒤축과 땅 사이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공간이 생겼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구두코를 닦으며
걸어오는 동안, 길이
이 지긋지긋한 길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나 보다
닳는 만큼, 발등이 부어오르는 만큼 뒤꿈치를 뽈끈
들어 올려주고 있었나 보다
가끔씩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기운다는 건
내 뒤축이 허공을 딛고 있다는 얘기
허공을 디디며 걷고 있다는 얘기
이제 내가 딛는 것의 반은 땅이고
반은 허공이다 그 사이에
내 낡은 구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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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꽃 벼랑

손택수

벼랑을 쥐고 꽃이 피네
실은 벼랑이 품을 내어준 거라네

저 위에서 오늘도 누가 밥을 짓고 있나
칭얼대는 어린 것을 업고
옥상 위에 깃발처럼 빨래를 내다 말리고 있나

구겨진 옷 주름을 몇 번 더 구기면서,
착지 못한 나머지 발을 올려놓으려
틈을 노리는 출근버스 창밖

찡그리면서도 꽃은 피네
실은 찡그림마저도 피어나 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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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꽃 단추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 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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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다람쥐야 쳇바퀴를 돌려라

손택수

다람쥐의 건망증은 참으로 위대하다
다람쥐가 땅속에 묻어놓고 잊어버린
도토리들이 자라서 상수리나무가 되었다면
상수리나무가 이룬 숲과
숲이 불러들인 새 울음소리.
모두가 다 다람쥐의 건망증 덕분이 아닌가
한겨울 눈이라도 내리면
파묻어 논 양식을 도무지 찾지 못해
부르튼 두 손을 부비며 떨고 있었을 다람쥐
그 차디찬 시장기에 가슴 한 쪽이 찌르르 아파오긴 하지만
다람쥐의 건망증 때문에 세상은
그나마 간신히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양 볼이 뽈통하게 튀어나오도록 양식을 거두고
언젠가 고 작은 손이 부르트도록
땅속 깊이 심어놓은 한 톨 위에 올라가 무심히
뛰어 놀고 있는 다람쥐,
제가 본 세상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어
자신의 기억 한쪽을 애써 지워버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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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단풍나무 빤스

손택수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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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목련 전차

손택수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 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나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 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 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른지 모른다
지난밤 내리치던 천둥번개도 찌릿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동력을 얻지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저 꽃 전차를 따라가면, 어머니 아버지
신혼 첫 밤을 보내신 동래온천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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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손택수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 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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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버려진 집 속에 거울이 있다

손택수

집을 버리면서, 거울을
두고 오는 건 차마 못할 짓이다

버려진 제 모습을 쳐다볼 수 없어
먼지를 풀썩이며 조용히 미쳐가는
집의 거울을 보라

집은 제 얼굴에 화장을 하는 대신
거울에 화장을 한다
거울에 파우더 분가루 같은
먼지를 덕지덕지 처발라
망가져 가는 제 얼굴을 흐릿하게 뭉개어본다

그렇게 남은 날을 견뎌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형벌이다

폐가는 금이 가거나, 깨어진
거울조각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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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봄은 자꾸 와도 새봄

손택수

사랑은 지루하지 않죠. 지루한 건 사랑이 아니예요
아무리 지루한 풍경이라도 사랑 속에 있을 땐
가슴이 두근거리거든요

사랑은 그러니까
습관이 되어도 좋아요. 중독이 되어도 괜찮죠
파도는 지치지 않잖아요

봄은 자꾸 와도 자꾸 반복되어도
여전히 새봄이잖아요
꽃은 자꾸 펴도, 자꾸 졌다 피길 버릇해도
물릴 일이 없잖아요

절망이 습관이면 곤란하죠. 반성도 버릇이면 곤란하죠
사람이 절망과 반성의 기계가 된다면
그처럼 속상한 일이 어딨겠어요

사랑 속엔 결고 버릇이 될 수 없는 절망과 반성이 있거든요
그러니 사랑에만 중독이 되기로 해요 우리
자꾸 와도 새봄인 봄처럼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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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빛의 감옥

손택수

가로등 어디에 틈이 있어
날벌레들이 그 속을 파고드는 모양이다
입구를 잃어버린 날벌레 한 마리가
램프를 감싼 유리등을 두드리고 있다
유리벽에 머리를 짓찧고 있다
저 환한 무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파닥거리며 왔던가
무덤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을 쳤던가
비명으로 꽉 찬 유리 속에 간신히
둥지를 튼다
쿵, 이삿짐을 풀고 내다보는 거리
가로등이 거리를 밝히는 대신 감추고 있는,
유리알 속에 아침마다 눈곱이 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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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살가죽 구두

손택수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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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소가죽 북

손택수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어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흐느끼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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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소가죽북

손택수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어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질기디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닿는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 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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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소금쟁이의 연애

손택수

바람 한 점 없는데 못물 위에 파문이 번지는 건
소금쟁이 때문이다
소금쟁이의 순전한 연애 때문이다
가만 보면 암컷인지 수컷인지 바람기 농한 소금쟁이 한 마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짝에게 무슨 신호를 보낸다
제 미미한 몸을 상하 좌우로 흔들어 고요한 수면을 깨우더니
보일 듯 말 듯 한 파문이 스르르 번져가서
좀체로 곁을 두려 하지 않는 짝의 발바닥을 간지른다
간지름을 참지 못하고 푸르르 떠는 건너편의 소금쟁이
가장 미세한 떨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하게 가늘어진 다리, 파문에 감전된
다리의 떨림도 답신처럼 넌지시, 보기에 따라서는 수줍게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연못을 건너간다

소금쟁이 한 쌍의 은근한 수작 때문에
잠시도 잠들지 못하고 술렁이는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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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골버스

손택수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고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러대는 시골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폴폴 날리며 투덜투덜 한참을 지나쳤다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올린 포플러나무와 내가
어쩌면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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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시집의 쓸모

손택수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십년도 더 전에 선물한 내 첫 시집,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냐며
시종 미안한 얼굴이다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 질을 하다가
(아마도 복수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보단
시집도 시도 시인도 다 버리고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
균형을 잡고 있는,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 전에 절판된 시집
이제는 표지 색도 다 닳아 지워져 가는 그것이
안주인 된장국 마냥 뜨끈하게 상한 속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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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내의 이름은 천리향

손택수

세상에 천리향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곳에 천리나 먼
거리가 있다는 거지
한 지붕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아내와 나 사이에도
천리는 있어,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의
고단한 숨소리를 듣는 밤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아
네가 서러운 것은
진하디진한 향기만큼
아득한 거리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지
얼마나 아득했으면
이토록 진한 향기를 가졌겠는가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것은
살을 부비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거리가
어디나 있다는 거지
허나 네가 갸륵한 것은
연애 적부터 궁지에 몰리면 하던 버릇
내 숱한 거짓말에 짐짓 손가락을 걸며
겨울을 건너가는 아내 때문이지
등을 맞댄 천리 너머
꽃망울 터지는 소리를 엿듣는 밤
너 서럽고 갸륵한 천리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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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 속에 준비해 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24》
앙큼한 꽃

손택수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
《25》
어부림

손택수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에 드리우고
그물을 끌어당기듯,
바다로 휜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 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 내린다
꽃 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 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 내린다
목 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낚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꿰어 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철썩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든다.
☆★☆★☆★☆★☆★☆★☆★☆★☆★☆★☆★☆★
《26》
얼음 탁본

손택수

얼어붙은 연못 위에 낙엽이 누워 있다
얼음에 전신을 음각하는 이파리,
파고 들어간 자리가
움푹하다
끌도 정도 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비문이 있다면
비문도 나의 살점이 아니겠는가
말을 안으로 감추어버린 백비
속에서 말을 꺼내듯
빙판을 어루만지는 손,
마음에 탁본이라도 떠볼까
덜 아문 딱지라도 뜯듯
이파리를 걷어내자
얼음 속으로 실핏줄이 이어진다
따끔따끔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잎맥이 돋아난다
☆★☆★☆★☆★☆★☆★☆★☆★☆★☆★☆★☆★
《27》
연꽃 에밀레

손택수

연꽃잎 위에 비가 내려 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
《28》
일획

손택수

들판에 비가
비문을 읽는다

읽는 일은
지우는 일

속으로 삼키고 삼켜서
모래알로 출가시키는 일

탁본을 떠도 뜻을 알 수 없는,
한 이백 년쯤 묵은 글자가
달싹거린다

흙먼지를 품은 글자 속에서
돋아난 싹

지워지고 지워져서 푸른
삐침

획 끝에
꽃이 벙근다
☆★☆★☆★☆★☆★☆★☆★☆★☆★☆★☆★☆★
《29》
지축을 지나다

손택수

지축은 십 년 넘게 폐허였다
나는 폐허를 지나야만 서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북한산 아랫마을
삼호선 지하철 창문으로
사라진 골목과 목욕탕과 전봇대가
아침저녁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세면을 할 때마다 섬찟, 더듬어보는 뼈 같았다
세면을 할 때마다 잊는 해골 같았다

폐병쟁이 퀭한 얼굴 같은 살풍경이나마
재건축이 시작되면서 마을의 기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폐허가 너와 나를 잇는 경계였던 시절도 가고
빗돌처럼 아파트가 올라온다
그만 외면하고 싶은 얼굴 외면하지 못하도록
출퇴근 때마다 마주 보던 지축

폐허를 잃어버린 폐허의 얼굴이 창유리 속에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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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차심

손택수

차심이라는 말이 있지
찻잔을 닦지 않아 물이끼가 끼었나 했더니
차심으로 찻잔을 길들이는 거라 했지
가마 속에서 흙과 유약이 다툴 때 그릇에 잔금이 생겨요
뜨거운 찻물이 금 속을 파고들어가
그릇색이 점점 바뀌는 겁니다
차심 박힌 그릇의 금은 병균도 막아주고
그릇을 더 단단하게 조여준다고……
불가마 속의 고통을 다스리는 차심,
그게 차의 마음이라는 말처럼 들렸지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은 잔에선
차심만 우려도 차맛이 난다는데
갈라진 너와 나 사이에도 그런 빛깔을 우릴 수 있다면
아픈 금 속으로 찻물을 내리면서
금마저 몸의 일부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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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손택수

가시 끝에 탱글탱글 빗방울이 열렸다
나무는 빗방울 속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햇살과 구름,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새 울음 소리까지를
고동 속처럼 알뜰히 빼어 먹는다

가시 끝에 맺힌 빗방울들,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다

살 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다는 것, 그건
욱신거린는 상처를 머금고 사는 일이다
입술을 윽 깨물고 상처 속으로 들어가
한 몸이 되는 일이다

열매들은 모두 빗방울을 닮아 둥그래질 것이다
빗방울의 아픔을 궁글려 탱탱한 탱자 알이 될 것이다

바람이 불자, 내 어둔 이마 위로
빗방울 하나가 고동껍질처럼 떼구루루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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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홍어

손택수

어느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김희수씨네 마당 한가운데선
김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
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
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
나는 고기가 한 점 먹고 싶고
김치 한 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줄 것만 같았다
죄스런 마음에 몇 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
어머니 뱃속에 있던 열 달이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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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화살나무

손택수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 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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