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리 시 모음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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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시 모음 20편

이규리 시 모음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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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족

이규리

함께, 라고 말하면서 어떤 사람은 이름이 없었다
실수가 아니었다

평생 노르웨이의 산골 울빅에서 살았던 시인
그도 한 때 이름이 없었다

피요르드의 얼음벽에 새가 앉는다는 건 환상
한 사람이 꽃나무 안에 선다는 것도 환상

새 이름은 말해지지 않았다
이름은 마음이 발음하는 소리였다

어떤 사람은 최선을 다해 불행하였고
그들은 불행을 텔레비전 프로처럼 구경하였고

이건 피차가 지는 놀음이지
슬퍼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가족을 해요?

이쪽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저쪽은
마음이란 게, 그놈의 마음이란 게 없는 줄도 몰라서
알아도 아프지 않아서

도무지 듣지 않는 저 바깥의 빗소리는
비에게
무슨 빚을 그렇게나 진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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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중무덤

이규리

부석사 오르는 길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둘레가
광배 두른 듯 환하다
비현실적이다
우리 사는 동네 그리 어두웠는지
사람들 되새 떼처럼 우르르
나무 아래 노랗게 꽂힌다

불 켠 나무 아래 들어간 일행들
둥그렇게 서거나 앉게 하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천마총 내부 같은
한 컷
한 순간이 공중에서 순장되었다

그 무덤처럼
잠시 높이 날아간 웃음들, 왁자한 몸짓들
가방이나 선그라스 그리고 챙 모자가
그대로 한 덩이 차거운 돌처럼
부석처럼
무량수전이 된

너무 환해서 그 내부는 고열,
너무 환해서 그 뒤는 적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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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비린내

이규리

먹다 만 고등어 다시 데울 때
지독하게 비린내가 난다
두 번의 화형을 불만하는 고등어의 언어다
이렇듯 한 번 다녀갈 땐 몰랐던 속내를
반복하면서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간 생선 먹는 일같이
마음 떠난 사람과의 입맞춤이 그렇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 없지 않지만
커피잔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립스틱 자국처럼
낯선 틈이 하나 끼어든다

아깝다고 먹었던 건 결국 비린내였나
등푸른 환상이었나
재워줄 뜻이 없으면
어디서 자느냐고 묻지 말라 했다
갑남을녀들
서로 속는 척, 속아주는 척

먹다 만 고등어,
먹다 만 너,
사향 냄새는 생리주기도 당긴다는데
벼리면서 단단해진다는데
그런데, 두 번씩 달구어 비리디비린
마음아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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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늘 값

이규리

해운대 비치파라솔 한 채 오천 원
멀리서 보면
멜라민 비빔밥 그릇들 엎어놓은 것 같지만
어쨌든 그늘값이다
오천 원 안으로 달짝지근한 몸뚱이들
슬슬 비벼지기도 하는,


그늘을 샀다지만 거기 무슨 경계가 있나
변덕스런 월세방 주인처럼
자꾸 자릴 옮겨 앉는 감질나는 그늘
깐죽거리는 햇살 따라가 보면
그늘은 파라솔 밖에 있거나 없거나
이 참에 달아오른 몸들도 물 속에 있거나 없거나

그늘은 그늘 아닌 데다가 그늘을 만든다
만질 수도 없는데 밀고 당기는 힘들.
마음 그늘엔 누가 자릴 차지하고 있나

접었다 폈다 하는 파라솔이 아니면
그늘은 원래 없었던 것
마음이란 것도 원래 없었던 것

그늘이 제 이름을 버리는 밤과 새벽이 있듯이
마음이나 그늘이나 오천 원이나
자기도 모르게
접힌 바짓단에 숨어든 모래처럼
그렇게 들고 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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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색

이규리

꽃은 그렇게 해마다 오지만
그들이 웃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일로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이 있었는데
자꾸 웃으라 했네
거듭, 웃으라 주문을 했네
울고 싶었네
아니라 아니라는데 내 말을 나만 듣고 있었네

뜰의 능수매화가 2년째 체면 유지하듯 몇 송이 피었다
너도 마지못해 웃은 거니

간유리 안의 그림자처럼, 누가 심중을 다 보겠는가마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미소 친절' 띠를 두른 관공서 직원처럼
뭐 이렇게까지
미소를 꺼내려하시는지

여긴 아직 내색에 무심하다
그러니 꽃이여, 그저 네 마음으로 오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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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뒷모습

이규리

어떤 스님이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목살 두어 근 사들고
비닐봉지 흔들며 간다
스님의 뒷목이 발그럼하다
바지 바깥으로 생리혈 비친 때처럼
무안해진 건 나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분홍색 몸을 가진 것
어쩌면 우리가 서로 만났을까
속세라는 석쇠 위에서 몇 차례 돌아누울
붉은 살들
누구에겐가
한 끼 허벅진 식사라도 된다면
기름 냄새 피울 저 물컹한 부위는
나에게도 있다
뒷모습은 남의 것이라지만,
너무 참혹할까 봐 뒤에 두었겠지만,
누군가 내 뒷모습 본다면
역시 분홍색으로 읽을 것이다
해답은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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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득 노랗다

이규리

꽃집 앞에서 문득 그가,
참 질기게도 있다
갓 핀 수선 하나 들고 왔다
그를 들고 온 거지

이건 꽃에 대한 경의인가
혹은 결의인가
노란 수선에 마지막 장면이 들어있다

꽃집 앞에서 문득 그가,
봉우리까지는 꽃집여자가 피웠다
그러니 꽃이 스스로 피었을 뿐
구근은 나의 결과가 아니다

둥근 뿌리에 쟁여 놓은 고백들
발설하는 게 아니었다
부추긴다고 다 피우지 마라
두근거림이 먼저라
혼자서 둥글게 부풀리는 연애도 마라

내년에도 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여자는 말했지만
내게 와서 꽃은 다 죽었다
그는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몇 번째 죽음인가
노란,
자살 같은 색깔 옆에서 묻는다
묻는다
꽃집 앞에서 문득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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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물 이야기

이규리

잘못 쏟아버린 물이
상가 앞 인도에 흥건하다
기다린 듯 맹추위가
재빨리 물을 살얼음으로 바꾼다
이 길로 학원 가는 아이들 미끄러질까
더 얼기 전 비로 쓸어내니
움푹한 데로 얼음물 고인다
때 맞춰 어디서 왔는지 꽁지 긴 새 한 마리,
겁도 없이 그 물 찍어 먹는다
오래 가물었구나
저 속이 갈급해 두려움조차 잊었으니
천천히 먹도록 멀리서 망을 봐 주었다
잘못 쏟은 물이 아니었다
새 한 마리를 씻어준
새 한 마리가 나를 씻어 준
환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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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불안도 꽃인 것을

이규리

누가 알기나 했을까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것을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죽고 싶다 할 때마다 조마조마 꽃이 피었던 걸

불안으로 한 아이를 낳고
불안으로 젖을 먹이고 몸을 씻기는 동안
불안 속에서 꽃이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속에 오래 있으면
기막히게 불안에도 쾌감이 있다는 걸
아이가 젖꼭지를 깨물었을 때라 할까
아니면 불륜, 불법, 불신, 불가능의 한 때라 할까

불안으로 시험을 치고 낙방을 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고
그때마다 불안의 꽃이 피었던 걸
그 다음 시절이 일러주었네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말해도 될까
초경 때처럼 깜빡 죽고 싶었던 걸 말해도 될까
눈부신 구름 꽃바람 꽃
비가 되었던 물의 꽃

꽃은 불안을 알지 못하지만 불안은 꽃을 알아보더군
천 날 만날 내일이 불안하고 휴일이 불안하고
지나온 길
그 불안으로 꽃을 피웠으니
여기 이 꽃 무덤들, 이 불안의 무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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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이규리

여섯 살 때 내 남자친구, 소꿉놀이 하다가
쭈르르 달려가 함석판 위로
기세 좋게 갈기던 오줌발에서
예쁜 타악기 소리가 났다

셈여림이 있고 박자가 있고 늘임표까지 있던,
그 소리가 좋아, 그 소릴 내고 싶어
그 아이 것 빤히 들여다보며 흉내냈지만
어떤 방법, 어떤 자세로도 불가능했던 나의
서서 오줌 누기는
목내의를 다섯 번 적시고 난 뒤
축축하고 허망하게 끝났다

도구나 장애를 한번 거쳐야 가능한
앉아서 오줌 누기는 몸에 난 길이
서로 다른 때문이라 해도
젖은 사타구니처럼 녹녹한 열등 스며있었을까

그 아득한 날의 타악기 소리는 지금도 간혹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듣지만
비는 오줌보다 따습지 않다

서서 오줌 누는 사람들 뒷모습 구부정하고 텅 비어있지만,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선득한 한 방울까지 탈탈 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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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수평선

이규리

세상에서 가장
긴 자가 수평선을 그었으리라
허리나 목을 백만 번 감아도
탱 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푸른 현.

내 눈에도 수평선이 그어졌다
바다를 떠나와서도 자꾸 세상을 이등분하는,
저 높낮이와 명암들

수평선 건져내어 옥상에 걸면
오래 젖어온 생각도 말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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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애인들

이규리

생일이었나.
무슨 기념일이었나
꽃다발 일여덟 개를 받은 적 있다
일 여덟 개의 애인들
눈빛이나 향이 조금 다르지만 비슷해 보이는 그것들을
한 아름에 다 안을 수 없어
부득불 몇은 내려놓아야 했고
내려놓은 몇이 안쓰러워서 다시 교대로
기념촬영도 해야 했으며
종내 누가 누군지 잊어먹게 되었으며,
모든 애인들은 꽃다발이었다가
꽃다발 속 발목 없는 꽃이었다가
코끝에 대어야만 맡을 수 있는 향이었다가
버릴 때는 수고인 꽃의 배후였다가,
또한 그렇기도 하지, 애인이란
고속도로 빗길이나 졸음 길 달릴 때
반짝 나타나는 갓길같은 건데
설핏 몸과 마음 내려놓고 한껏 기지개 펴 보지만
곧, 떠나야 한다
그 잠시 꽃이자 향인 것
갓길에 먼지 쓰고 흔들리는 키 큰 망초 보인다
속눈썹 뺑 돌린 개망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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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앤디워홀의 생각

이규리

내가 빌렸던 입술, 내가 빌렸던 꽃잎,
내가 빌렸던 손,
내가 빌렸던 여자
한데 쏟아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농심라면이다
퉁퉁 불어터진 면발과
식은 국물로
허기를 채우던 밤은 이제 가라
빼곡한 세상의 진열대
복제된 사랑 안에서 오늘 누가 울고 있나
추억도 나날이 소비되는 것
신제품에 밀려 구석진 곳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저 느렸던 날들의 행복에 대해선
이제 말하지 말자
나는 나를 믿을 수 없다
굳기름 둥둥 떠다니는 치사한 연애는
이제 내다버려라
쇼핑백 속 훌쩍거리는 비애덩어리들
지상이 화면을 빠져나가면
대량 생산된 사랑 코카콜라처럼 마셨던
여름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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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출구

이규리

전철 안에서 툭, 핸드백이 떨어지자
기다린 듯
빗장 풀린 일가족이 두두두 뛰쳐나갔다

의자 밑으로 하이힐 뒤로
구르다가 가까스로 멈추었는데, 엄만 멀리
출구 쪽으로 굴러가 있었다

출구는 엄마를 이해했을까
방 한 칸에 함께 웅크리고 잘 때도
엄마 자리는 문 쪽이었다

생각해 봐
엄만들 왜 바깥을 몰랐겠어
문 쪽을 서성인 건 꼭 나가려는 뜻이 아니겠지만,

흩어진 식솔들이 가 자리 잡은 곳
스물여덟에 죽은 언니 함께
게나 곰이나 전갈이 되어 짐승처럼 웅크려 이은
자리

핸드백이 쏟아졌는데
우린 뿔뿔이 흩어졌는데
전철 바닥에 생긴 저 난처한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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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코스모스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이규리

몸이 가느다란 것은 어디에 마음을 숨기나
실핏줄 같은 이파리로
아무리 작게 웃어도 다 들키고 만다
오장육부가 꽃이라,
기척만 내도 온 체중이 흔들리는
저 가문의 내력은 허약하지만
잘 보라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도
똑같은 동작은 한 번도 되풀이 않는다
코스모스의 중심은 흔들림이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중심,
중심이 없었으면 그 역시 몰랐을 흔들림,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마른 체형이
저보다 더 무거운 걸 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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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특별한 일

이규리

도망가면서도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한동안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도리어
포식자의 시선을 제게로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예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 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이 있지요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그 아래쪽에선
제 시간들을 지키려
외로움을 방식으로 갖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졸참 가지에 버린 꼬리들이 팔랑거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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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폐허라는 것

이규리

허물어진 마음도 저리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도 너의 폐허가 되고 싶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겐가 한때
폐허였다는 것, 또는
폐허가 날 먹여 살렸다는 것,

어떤 기막힌 생이 분탕질한 폐허에 와서
한판 놀고 가는 바람처럼
내 놀이는
지나간 흔적들 빠꼼히 들여다보는
쌈박한 도취 같은 것

콜로세움은 폐허가 아니었고
상처가 아니었고
먼 훗날 아들의 아들, 손자의 손자가
할애비의 놀이터를 구경하라고
날 무딘 칼로 뚜껑을 썰어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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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풍경이 흔들린다

이규리

어금니 하나를 빼고 나서
그 낯선 자리 때문에
여러 번 혀를 깨물곤 했다
외줄 타는 이가 부채 하나로
허공을 세우는 건
공기를 미세하게 나누기 때문,
균형을 깨지기 위해 있는 거라지만
그건 농담일 게다
한쪽 무릎을 꺾으면 온몸이 무너지는 건
짐승만의 일이 아니다

다친 무릎 끌며 가서 보았다
인각사 대웅전 기둥이
균형을 위해 견디고 있는 것을,
기우뚱해 있는 저 버팀목까지도
서로 다른 쪽을 위해 놓지 않고 있는 믿음을,
그 처마 끝에서
풍경은 그저 흔들리는 게 아니라
공기를 조절하며 처마를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소리내어 기둥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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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허공은 가지를

이규리

종일 바람 부는 날, 밖을 보면
누가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을 위해 허공은 가지를 빌려주었을까
그 바람, 밖에서 부는데 왜 늘 안이 흔들리는지

종일 바람을 보면
간간히 말 건너 말을 한다

밖으로 나와, 어서 나와
안이 더 위험한 곳이야

하염없이
때때로 덧없이
떠나보내는 일도 익숙한
그것이 바람만의 일일까

나무가 나무를 밀고
바람이 바람을 다 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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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흰모습

이규리

눈송이 뭉쳐 가만히 들여다보면
설핏 무슨 기미가 어른거린다
너무 흰 것엔 그늘이 있지
보호막 같은 그늘

흰 밥, 흰 고무신, 흰 상복, 흰 목련
모든 빛을 다 반사하므로 얻는다는
흰색은 사실 비어 있는 색
누군가 떠난 그늘의 색

눈 뭉쳐 등허리에 쑥 집어넣을 때
소스라치던 냉기는
눈의 그늘이었을까
눈물 그렁한 사람이 볼 수 있는
어쩌면 없는 짜안한 모습

서둘러 떠나는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하듯
눈은 오래 머물지 않아서 그립고
그리움은 만질 수 없어서 멀다
만지면 없어지는 사람을
누가 미워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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