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 모음 3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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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 모음 35편

문태준 시 모음 3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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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골짜기

문태준

오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외롭고 깊고 모진 골짜기를 떠나 저 푸른 골짜기로

그는 다시 골짜기에 맑은 샘처럼 생겨나겠지
백일홍을 심고 석등을 세우고 산새를 따라 골안개의 은둔 속으로 들어가겠지
작은 산이 되었다가 더 큰 산이 되겠지
언젠가 그의 산호(山戶)에 들르면
햇밤을 내놓듯
쏟아져 떨어진 별들을 하얀 쟁반 위에 내놓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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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믐이라 불리던 그녀

문태준

옻처럼 검고 얼음처럼 차디차지만
얼굴에는 개미굴이 여럿 나 있지만
다리는 사슴보다 야위었지만
그녀의 너른 속뜰로 들어가
마음이 쉬어 가는 날이 많았다
나는 그 이상한 평온을 슬픈 그믐이라 불렀다
조모를 열다섯 살 때 마지막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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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꽃 진자리에

문태준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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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꽃이 핀다

문태준

뜰이 고요하다
꽃이 피는 동안은

하루가 볕바른 마루 같다

맨살의 하늘이
해 종일
꽃 속으로 들어간다
꽃의 입 시울이 젖는다

하늘이
향기 나는 알을
꽃 속에 슬어놓는다

그리운 이 만나는 일
저처럼 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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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문태준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호두나무 잎에 어둠이 뭉쳐있을 때 그 끝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외로운 산 까치처럼 나는 살아왔다
거친 꽃을 내뱉으며 늙은 영혼의 속을 꺼내 보이는
할미꽃처럼 나는 살아 왔다
그러나,
허물을 벗어놓고 여름을 우는 매미처럼
하나의 열망으로 노래하리니
꾹꾹 허공에다 지문을 눌러 찍으며 물결쳐 가는 노래여
절절 끓는 아랫목으로 불 들어가듯 가는 노래여
더 슬픈 노래여
나는 이제 심장을 바치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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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누가 울고 간다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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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시 봄이 돌아오니

문태준

누군가 언덕에 올라 트럼펫을 길게 부네
사잇길은 달고 나른한 낮잠의 한군데로 들어갔다 나오네
멀리서 종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네
산속에서 신록이 수줍어하며 웃는 소리를 듣네
봄이 돌아오니 어디에고 산맥이 일어서네
흰 배의 제비는 처마에 날아들고
이웃의 목소리는 흥이 나고 커지네
사람들은 무엇이든 새로이 하려 하네
심지어 여러 갈래 진 나뭇가지도
양옥집 마당의 묵은 화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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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당신에게 미루어 놓은 말이 있어

문태준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 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 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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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따오기

문태준

논배미에서 산 그림자를 딛고 서서
꿈쩍도 않는
늙은 따오기
늙은 따오기의 몸에 깊은 생각이 머물다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어느날 내가 빈 못을 오도카니 바라보았듯이
쓸쓸함이 머물다 가는 모습은 저런 것일까요
산 그림자가 서서히 따오기의 발목을 흥건하게 적시는 저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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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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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문태준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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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바깥

문태준

장대비 속을 멧새 한마리가 날아간다
彈丸처럼 빠르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얀 참깨꽃 핀 한 가지에서
도무지 틈이 없는
빗속으로
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
멧새 한 마리
저 全速力의 힘
그리움의 힘으로
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
집으로?
오동잎 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
中心으로?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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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바닥

문태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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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비가 오려 할 때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 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철름 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 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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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석류

문태준

윗옷 단추를 끄르듯
웃음이
웃음의 앞자락을 헤치며

석류는 툭 터졌네
넘어진 화병처럼

언제라도
비탄이 없는
악보

속 깊은 가을의
정교한 건축

붉은 잇몸의 빛
알알이
조용한 시간의 카펫 위에
흩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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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수평(水平)

문태준

단 하나의 잠자리가 내 눈앞에 내려앉았다
염주알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투명한 두 날개를 수평으로 펼쳤다
모시 같은 날개를 연잎처럼 수평으로 펼쳤다
좌우가 미동조차 없다
물 위에 뜬 머구리밥 같다
나는 생각의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는데
가문 날 땅벌레가 봉긋이 이어놓은 땅구멍도 보고
마당을 점점 덮어오는 잡풀의 억센 손도 더듬어보는데
내 생각이 좌우로 두리번거려 흔들리는 동안에도
잠자리는 여전히 고요한 수평이다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놓은 이 수평 앞에
내가 세워놓았던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쓰러진다
하늘은 이렇게 무서운 수평을 길러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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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시월에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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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침

문태준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번 또 한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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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침 항구에서

문태준

바다가 아침에 내게 갈치 상자를 건네주었네.
해풍에 그을린 어부들의 굵은 팔뚝으로.
미로를 헤엄치는 외롭고 긴 영혼을.
빛의 날카로운 이빨을.
한번도 건너지 못한 멀고 먼 곳을.
깊은 풍랑을.
갈치 상자만한 은빛 가슴을.
푸른 바다가 검은 내게 배를 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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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언제 또 여러번

문태준

왼 손목의 맥을 짚으며 비를 보네
물통을 내려놓고 비를 보네
이 비 그치면 낙과(落果)를 줍게 되리
천둥 우는 소리는 처음엔 높고 나중엔 낮아지네
계곡물은 비옷을 입고 급하게 내려오네
오늘 칡넝쿨같이 뻗어가는 구름 아래를 지나며
언제 또 소낙비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네
쏟아짐이여,
여러번의 오후는 여름 위에
여러번의 여름은 일생(一生)위에
이처럼 쏟아진다 할밖에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질펀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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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름날의 마지막 바닷가

문태준

바닷가는 밀려와 춤추는 파도들로 흥겨워요

나는 모래밭에 당신의 이름과 나의 질문을 묻었어요
나는 모래성을 하나 더 쌓아놓고 바닷새보다 멀리서 올라올 밀물을 기다려요

모래알에는 보리처럼 뿌린 별이 가득한데
모래알에는 초승의 달빛이 일렁이는데

우린 이 바닷가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우린 이 바닷가에서 다시 알아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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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역전 이발

문태준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이 살고 있고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 넣는 한 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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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영원(永遠)

문태준

어릴 때에 죽은 새를 산에 묻어준 적이 있다
세월은 흘러 새의 무덤 위로 풀이 돋고 나무가 자랐다
그 자란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새가 울고 있다
망망(茫茫)하다
날개를 접어 고이 묻어주었던 그 새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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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오랫동안 깊이 생각함

문태준

이제는 아주 작은 바람만을 남겨둘 것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고 건너올 사람을 기다릴 것
여름 자두를 따서 돌아오다 늦게 돌아오는 새를 기다릴 것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 것
너의 가는 팔목에 꽃 팔찌의 시간을 채워줄 것
구름수레에 실려가듯 계절을 갈 것
저 풀밭의 여치에게도 눈물을 보태는 일이 없을 것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어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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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문태준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
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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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문태준

끔찍하다
조그맣게 모인 물속
배를 내 눈앞처럼 달고
올챙이가 헤엄치고 있다

아주 어둡고 덜 어두울 뿐인
둥근 배 속
다리 넷이
한테 엉겨 있다

한 통이다
한 통이 통째로 움직인다
마음가면 마음이 전부 간다

속으로 울 때
손발이 모두
너의 눈물을 받아준다

너의 몸을 보고
내 몸을 보니
사람이 더 끔찍하다

팔을 밀어 넣고
나의 다리를 밀어 넣어
저 원적(原籍)으로 돌아갔으면

둥근 배 속
아직은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이별이라는 말에 태동(胎動)이 있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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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장대비 멎은 소읍

문태준

땅이 소란스러운 때를 보냈으니 누에가 갉아먹다 버린 뽕잎 같다
장대비가 다녀가셨다
복사꽃처럼 소란한 논도 걔중에는 있었고
귓불이 도톰하고 거위 소리처럼 굵은 울대를 가진 놈도 다녀가셨다
비 내린 땅은 돌 꽃 마냥 꼿꼿이 파인 얼굴이다
팔랑팔랑 하얀 나비 새로이 나는 것으로 장대비 멋은 줄 아는 것이지만
집을 주섬주섬 나오는 촌로들은 늙고 초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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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저물어 가는 강 마을에서

문태준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눈에서 눈으로 산 그림자처럼 옮겨가는 슬픔들

오지항아리처럼 우는 새는 더 큰 항아리인 강이 가둡니다

당신과 나 사이
이곳의 어둠과 저 건너 마을의 어둠 사이에
큰 둥근 바퀴 같은 강이 흐릅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소가 웁니다
찬 강에 는개가 축축하게 젖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낮 동안 새끼를 이별했거나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거나
목이 쉬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우는 소의 희고 둥근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
《29》
정류장에서

문태준

언젠가 내가 이 자리에 두고 간 정류장
둥근 빗방울 속에 그득 괴어 있던 정류장
꽃 피고 잎 지고 이틀 사흘 여름 겨울 내려서던 정류장
먼 데 가는 구름더미와 장죽(長竹)을 물고 선 정류장
홀어머니 머리에 이고 있던 정류장
막버스가 통째로 싣고 간 정류장
☆★☆★☆★☆★☆★☆★☆★☆★☆★☆★☆★☆★
《30》
짧은 낮잠

문태준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 많은 노루 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 가는 낮 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낮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 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
《31》
한 호흡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한 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 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
《32》


문태준

잠자다 깬 새벽에
아픈 어머니 생각이
절박하다

내 어릴 적
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
찬물로 입을 헹궈
내 눈동자를
내 혼을
가장 부드러운 살로
혀로
핥아주시던

붉은 아궁이 앞에서
조속조속 졸 때에도
구들에서 굴뚝까지
당신의 눈에
불이 지나가고

칠석이면
두 손으로 곱게 빌던
그 돌부처가
이제는 당신의 눈동자로
들어앉아서

어느 생애에
내가 당신에게
목숨을 받지 않아서
무정한 참빗이라도 될까

어느 생애에야
내 혀가
그 돌 같은
눈동자를 다 쓸어낼까

목을 빼고 천천히
울고, 울어서
젖은 아침
☆★☆★☆★☆★☆★☆★☆★☆★☆★☆★☆★☆★
《33》
호두나무와의 사랑

문태준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철 지난 매미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불에 구운 흙처럼 내 마음이 뒤틀리는
걸 보니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겠다
☆★☆★☆★☆★☆★☆★☆★☆★☆★☆★☆★☆★
《34》
호수

문태준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위에서 어루만진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
《35》
회고적인

문태준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은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에서 텅 빈 마당으로 밀물지는 쇠죽 연기.
그러나 不歸, 不歸! 시간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 것.
족제비가 낯선 자를 경계하는 빈, 빈집에 들어서면
녹슨 작두에 무언가 올리고 싶은, 도시 회고적인 저 소 좀 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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