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시모음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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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시모음 25편

박형준시모음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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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구의 힘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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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을밤

박형준

소금을
음식에 살짝 뿌려놓은 듯
밤 별들이 내려오는데
깊은 밤
깊은 밤으로
날아간 새는
소리만 들려오누나
뜰에
만조를 이뤄
더 이상 꽉 찰 데 없는
외기러가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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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을이 올 때

박형준

뜰에 찬서리가 내려 국화가 지기 전에
아버지는 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셨다
그런 날, 뜰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일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 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와 함께 바르시곤 문을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놓으셨다
바람과 그늘이 잘 드나들어야 혀
잘 마른 창호지 문을 새로 단
방에서 잠을 자는 첫 밤에는
달 그림자가 길어져서
대처에서 일하는 누이와 형이 몹시 그리웠다
바람이 찾아와서
문풍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밤이면
국화꽃이 창호지 안에서 그늘째 피어나는 듯했다
꽃과 그늘과 바람이 숨을 쉬는
우리 집 방문에서
가을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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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겨울 호수를 걷는다

박형준

눈 내린 호수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거룻배까지 이어져 있다

먼동이 보고 싶다는 당신과 아침에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겨울 호수를 걷는다

당신은 호수 한가운데에 이르자
우리 지금 그냥 걷다가 서로 모르게
다리가 굳어버렸으면 좋겠어,
하고 말한다
이런 아침엔 밤새 얼지 않으려고
갈퀴를 젓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쳐버린
오리도 있지 않을까,
강물에 발목이 얼어붙은 줄도 모르고
날개를 퍼덕이다 졸음에 빠져
끊임없이 꿈만 꾸는 오리,
그런 오리가 나였으면 좋겠어
하고 말한다

호수 건너편 쪽엔
거룻배가 빛에 휩싸여 있다
발자국이 이어진
그 길에
점점 사라지는 먼동을 간직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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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밤 빗소리

박형준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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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비는 밤을 어떻게 지새나

박형준

외로움에도 색채가 있다면
나무에 달라붙어 밤을 견딘 나비의 외로움은
아침에 어떤 색깔이 되었을까

동트는 새벽이 무작정 희망이 되지 못하고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아침 이슬 한 방울에도
쉬이 상처를 입는 나비

나비 날개에 찍힌 점들은
밤 공기의 흔적들일까 불꽃들일까

밤마다 처음으로 다가오는 대지와
폭풍의 소용돌이,

한 무리의 구름을 인식하며
숲 속에서 별들의 흐름을 조용히
날개에 잉크처럼 떨구어 가는 나비

사람들도 모두 저마다의 외로움의 색채가
다르가 나타난다는데
내 외로움의 색채는
누구의 숨겨진 빛에서 오는지

아침 햇살 속에서 접었다 폈다 하는
나비의 날개가
공중에 씌어지지 않은 편지처럼
분가루를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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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눈망울

박형준

자전거도로 한복판 중앙선에
참새 한 마리 앉아 있다
바퀴에 날개 한쪽이 잘려서
날지도 못한 채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노란 중앙선엔
자전거도 넘나들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지
몸을 떨며 앉아 있다
지나가는 소년 하나가
속도에만 관심 있는 자전거와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로
손을 들고 나와 산책로의 속도를 잠시 늦춘다
중앙선으로 다가가 참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길가로 돌아와 풀숲에 내려놓는다
손바닥에 앉아
소년을 올려다보던 참새의 눈망울
손바닥의 참새를 내려다보던 소년의 눈망울
그 짧고 느린 시간 동안
산책로의 무표정한 속도들 사이로
섬 소리가 들리며 흘러가고 있다

출처 : 《애지》(2020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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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단풍

박형준

바람과 서리에 속을 다 내주고
물들 대로 물들어 있다

무덤을 지키고 선 나무 한 그루,
저녁 햇살에 빛나며
단풍잎을 떨어뜨린다

자식도 덮어주지 못한 이불을,
속에 것 다 비워 덮어준다

무덤 아래 밭이 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데
종아리에 불끈 일어선 정맥처럼
혼자 자라 시퍼렇게 빛나는
무 잎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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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박형준

들일을 하고 식구들 저녁밥을 해주느라
어머니의 여름밤은 늘 땀에 젖어 있었다
한밤중 나를 깨워
어린 내 손을 몰래 붙잡고
등목을 청하던 어머니,
물을 한 바가지 끼얹을 때마다
개미들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 같은
까맣게 탄 등에
달빛이 흩어지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펌프질을 하며
어머니의 등에 기어다니는
반짝이는 개미들을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물로 씻어내던 한여름 밤
식구들에게 한번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던
어머니는 달빛이 참 좋구나
막내 손이 약손이구나 하며
시원하게,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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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달콤한 눈

박형준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는
손이 닿지 않는 먼데
찬장 위에 올려져 있던 설탕 종지들이 있다
그을은 부엌 벽을 기어오르는 개미떼들만 맛을 본

시골집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에서
사라져버린 개미들이
등에 눈을 한 점씩 입고
줄을 타고 내려온다

찬장 위의 종지에서
반짝이는 설탕을 등에 지고 내려오는
눈의 푸근한 줄

오늘은
저 줄을 잡고
가시는 이도
눈발의 달콤함에
천천히 올라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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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명경(明鏡)

박형준

강나루 가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소매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여인들이 버드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여인들은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를 꺾었다
배에 올라탄 남정네들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둥글게 구부려 정표로 주었다
배가 떠날 시간이었다
내려서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야 했다
책갈피에 버드나무 잎이 끼여 있었다

저녁 무렵 잠깐 잠이 든 사이였다
꿈속에서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꿈속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그 책은 이승에서 내가 평생 써야 할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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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빗소리

박형준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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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빛의 소묘

박형준

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
물 위에
가볍게 뜬
소금쟁이가
만드는
파문 같은

누가
하늘과 거의 뒤섞인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
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누가
고통의 미묘한
발자국 속에서
울다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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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빛이 비스듬히 내리는데

박형준

새끼 고양이들이
대추나무에 올라가 장난을 치네
아파트에 혼자 사는 노인이
대추를 따려고
바지랑대를 들고 서 있네
쪼글쪼글해진 붉은 햇살이
새끼고양이 앞발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네
나무 사이로
바지랑대를 올리면
새끼고양이들이 발로 밀어내고
빨래를 걷듯이 노인은
바지랑대로 하늘만 재고 서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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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랑

박형준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 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 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있다.
산 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 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히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른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 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번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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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랑은 꽃병을 만드는 일

박형준

오솔길에서 나는 기막힌 사랑을 보았지
막 퍼붓던 비가 어느덧 이슬비로 변하고
오솔길은 산책하기 알맞게 젖어 있었지
풀숲에서 거미가 이슬 다리를 놓고 있었지
내 발 밑으로 이슬 속 싹 틔운 행성이 구르고
또 구을르고, 그와 함께 무지갯빛 사색은
끝도 없이 둥둥 떠오르고 있었지
그러나 곧 오솔길의 飛翔은 죽음으로 바뀌었다네
내가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푸드덕대는 소리가 들려왔지
산비둘기가 공중으로 솟구치려는 순간
뱀이 비둘기의 목을 덮쳐버렸다네
끓어오르는 독액을 주체하지 못해
비둘기와 함께 날아오르며
일순간 공중에 똬리를 틀고 있었네
독이 퍼지는 몸은 나른한 듯,
허공에 무지개를 긋고 있었네
혀는 사랑의 말이 되지 못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차갑게 갈라지고
점점 옥죄는 꽃병처럼
그 안에 꽂힌 힘센 날개를
이슬비 내리는 허공에 쳐받들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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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엽서

박형준

공중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이라는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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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우리가 아직 물방울 속에서 살던 때

박형준

이슬방울 속에
집 짓는 달

당신이 불며
웃는 모습 좋았죠

먼발치에서
꽃 피는 날 오거든

이슬방울 집
작은 방 불빛

당신의 입김에
흔들리며

아직
켜 있는 줄 아세요

출처 :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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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 봄의 평안함

박형준

강이나 바다가 모두 바닥이 일정하다면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깊이가 같을 것이다
그러면 나무의 뿌리가 땅 밑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허공을 물들이는 잎사귀의 춤 또한 일정할 것이다
저기 나무 속에서 사람이 걸어나오도록 인도하는 것이
봄이라면
마음 속에서만 살고 있는 말들을 꺼내주는
따뜻한 손이 또한 봄일 것이다
봄꽃들은 허공에서 우리를 기쁨에 넘쳐 부르는 손짓이며
누군가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면
우리 또한 그처럼 잊혀진 누군가를 향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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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저곳

박형준

공중空中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空中이라는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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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지붕

박형준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지붕이 비슷비슷한 골목을 걷다가
흰 비닐에 덮여 있는
둥근 지붕 한채를 보았습니다.

새가 떨고 있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날개를 접고 추락한 작은 새가
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흰 비닐을 움켜쥔 채
조약돌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네모난 옥상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웅크린
우는 발로 견디는
둥근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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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철새 같은 이름으로 지나가는 가을

박형준

새들의 이름을 몰라 바라보기만 한다

그런 적이 있었지
무심히 앞을 보고 가는 내 곁을 지나가며
누군가도 이름이 생각날 듯 말 듯하여
손만 들었다 뒷모습에 인사했겠지

새들은 저마다 강물 속 돌 위에 서서
햇빛에 취해 움직임이 없다
아침 새들을 나처럼 바라보는 옆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
이름을 물어보니, 새들의 이름은 철새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선(禪)을 하듯 새들은 일렬종대로 서서
낮잠에 빠져 있다
강물 속에선 오후의 가을 햇살이
자전거 바퀴를 굴리듯이 반짝이는 물살을 튕겨 낸다

이름을 부르지 못해
나도 뒷모습만 바라보다 떠나보낸 고향 사람 같은
이들이 있었지
철새 같은 이름으로
내 곁을 지나간 그런 가을이 있었지

출처 : 계간 《창작과 비평》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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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초저녁 달

박형준

내게도 매달릴 수 있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에는 이슬로
저녁에는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처럼

그러나 때로는
나무가 있어서 빛나고 싶다

석양 속을 날아온 고추잠자리 한 쌍이
허공에서 교미를 하다가 나무에 내려앉듯이

불 속에 서 있는 듯하면서도 타지 않는
화로가의 농담(濃淡)으로 식어간다

내게도 그런 뜨겁지만
한적한 저녁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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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테두리

박형준

테두리에서 빛이 나는 사람
꽃에서도 테두리를 보고
달에서도 테두리를 보는 사람

자신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모든 테두리는 슬프겠지

슬퍼하는 상처가 있어야
위로의 노래도 사람에게로 내려올
통로를 알겠지

물건을 사러 잠시 집 밖으로 나왔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 사이로
안고 있던 여인의 테두리를 보는 것
걸음을 멈추고 흔적을 훔쳐보듯 바라볼 때
여인의 숨내도 함께 흩어져간다

오늘과 같은 밤에는
황금빛 줄무늬를 가진
내 짐승들이
고독을 앓겠지

출처 :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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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해당화

박형준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무덤 같은
밥그릇을 아랫목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내 어린 발은
따뜻한 무덤을 향해
자꾸만 뻗어나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배고픔보다 간절한 것이
기다림이라는 듯이
달그락달그락 하는 밥그릇을
더 아랫목 깊숙이 파묻었습니다

밥그릇은 내 발이 자라나는 만큼
아랫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내 발이 아랫목까지 닿자
나는 밥그릇이 내 차지가 될 줄 알았습니다
쫓길 데가 없어진 밥그릇은
그런데 어느날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봄이 되자 나는 밥그릇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습니다
설령 밥그릇이 있다 해도
발이 닿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밥그릇의 따뜻한 온기보다 더한
여름이 내 앞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시골 소년에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사나운 잠에 떠밀리다
문지방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어
방문을 여니,
해당화꽃 그늘이었습니다
뿌리에서부터 막 밀고 나온 듯,
묵은 만큼 화사해진다는
처음 꽃 핀,
삼년생 해당화 붉은 꽃이었습니다

거기에 어느새 늙은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저녁 바람에 달그락거리는 밥그릇처럼
해당화꽃 그늘 속에 서 계신
어머니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꼭 가슴에서 무언가를 꺼내느라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라졌던 밥그릇은 어머니의 가슴속에
묻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늙은 어머니의 손에서 떠난 그 작은 무덤들이
붉디붉은 꽃으로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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