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선시모음 4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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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선시모음 44편

이혜선시모음 4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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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 천지에 봄은 오는데

이혜선

꽃을 보면 눈물난다
격리병실 창 너머로 찍었다고
대구에서 그대가 손전화로 보내준 꽃

언제였던가
그대와 나란히 저 활짝 핀 벚나무 아래 걷던 날이
그저 웃고 얘기하며 우리들
함께 모여 마주 앉아 밥 먹던 꽃피는 시간 아래

함께 피어서 더 아름다운 수만 송이 수선화
소복소복 모여 피어나는 제비꽃동무들
너희들은 코로나를 모르니 마스크가 필요 없구나
죄 없이 웃고 있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불러들인 인간들의 죄와 탐욕
마스크 하나로 가려지지 않는 이기심
용서해다오 수선화야 개나리야

박쥐야 낙타야 인수공통감염병을 모르는
너희들아, 죄 없는 이 땅에 오는 새봄아
나의 죄를 용서해다오
목숨을 돌려다오, 나날의 작은 기쁨들을 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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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시연꽃

이혜선

내 몸 속 파문이 동개동개
가시 물결 위에 떠 있다

연두 빛 물 위에 연두 빛 파문
보랏빛 물 위에 보라 빛 파문

둘러보아도 모두 불타버린 가시물결 위에
그대 그리는 몸짓이 대궁이 속 씨앗으로 자라나
가시받침 뚫고 나온 진홍빛 심장이 폭죽이다

촘촘히 제 가슴 찌르는 푸른 잎의 열망
파문지어 피어나는 화살의 열망

내 맘 속 깊은 방에 홀로 타는 진홍빛 불꽃 한송이
초승달 만나러가는 오늘밤은
가시를 활짝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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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시연꽃

이혜선

내 몸 속 파문이 동개동개
가시 물결 위에 떠 있다

연두 빛 물 위에 연두 빛 파문
보랏빛 물 위에 보라 빛 파문

둘러보아도 모두 불타버린 가시물결 위에
그대 그리는 몸짓이 대궁이 속 씨앗으로 자라나
가시받침 뚫고 나온 진홍빛 심장이 폭죽이다

촘촘히 제 가슴 찌르는 푸른 잎의 열망
파문지어 피어나는 화살의 열망

내 맘 속 깊은 방에 홀로 타는 진홍빛 불꽃 한송이
초승달 만나러가는 오늘밤은
가시를 활짝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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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간장사리

이혜선

시어머니 제사 파젯날
베란다 한 구석에 잊은 듯 서 있던 간장 항아리 모셔와
작은 병에 옮겨 부었다
20년 다리 오그리고 있던 밑바닥을 주걱으로 긁어내리자
연갈색 사리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툇마루도 없는 영주땅 우수골 낮은 지붕 아래
허리 구부리고 날마다 이고 나르던
체수 작은 몸피보다 더 큰 꽃숭어리들
알알이 갈색 씨앗 영글어 환한 몸 사리로 누우셨구나

내외간 살다 보먼 궂은 날도 있것제
묵은 정을 햇볕삼아 말려가며 살아라
담 너머 연기도 더러 챙기며 사리 하나 품고 살거라

먼 길 행상 가는 짚신발 행여나 즌데를 디디올셰라
명일동 안산에 달하 노피곰 돋아서
어긔야 멀리곰 비추고 있구나*

이승 저승 가시울 넘어 맨발로 달려오신
어머니의 간장사리.
*백제 가요 ‘정읍사’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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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거미줄 법문

이혜선

다보사 큰 법당에 가부좌하고 앉으니
머리 속에 매미소리
탱탱한 줄 하나 매어놓는다

연이어 가로세로
얽히고 설킨 거미줄 소리소리
순식간에 빈 머릿속
매미허물로 가득 찬다

꿈틀대는 초침 속 결가부좌하고
꽉 끼는 옷을 벗는다
몸부림 옷 부림 친다
팔만 사천 땅 속 시침 분침이 흔들린다 조여든다

조여 오는 거미줄 속에 앉아
벗어버린 옷, 텅 빈 안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판사판
탱탱한 어둠 밧줄 한 쪽 끝을
확 놓아버리니 거미줄 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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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칩 무렵

이혜선

먼 데 산이마
아지랑이 앞세우고 다가오네

엎드린 잔등이에 잔디 풀 돋아나는 소리
잔뿌리 실 뿌리 더 깊이 발뻗어 물긷는 소리
쪼로롱 물관부 따라 새물 오르는 소리

상수리 마른 잎 이불 속에서
애벌레가 돌아눕는 기착
발가락 꼼지락대는 기척

개미굴 안방에 산개미 알 깨어나는 소리
바위굴 입구 새끼곰들 낑낑, 내다보는 까만 소리들
잔설 녹은 땅 헤치는 두더지 똥그란 눈망울

얼음 풀린 냇물 건너
그대 사는 마을, 더 가까이 보이네 들리네
그대 하마 내 앞에 다가서는 향기
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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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마당 북소리 울리면
-도라산 역에서

이혜선

그리워서 도라산
돌아오는 산

50년을 돌아서
마음
안에 철조망을 천만 번 돌아서
오늘에야 도라산 역에서
손 마주 잡으려네

고려국 부마된 경순왕이
서라벌 그리워 눈물 흘리던 곳
남녘 부모형제 그리는 마음
북녘 고향산천 그리는 마음
예나 이제나
그리워서 도라산, 돌아오는 산

삭은 철모 틈새 고개 내민 제비꽃
화석되어 박힌 가슴
철조망 지뢰밭 총알 박힌 허리띠 다 벗어버리고
철철철 흘러내리는 백두산 장백폭포
쉬지 않는 물소리, 불소리

뻗어가노라 대∼한민국
이제야 맥을 이어
중국 러시아 유럽까지
민족의 대동맥
뻗어가노라

넓고 맑은 민족의 하늘마당 펼쳐서
물소리 불소리 흘러내리면
내일은 큰 잔치
남북 한마당
우주 한마당

그 마당 북소리 울리면,

출처 : 《지구문학》 테마시 (2002.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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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날마다가 봄날

이혜선

돋아나는 새풀에게
길가에 핀 민들레에게
마냥 웃음 흘리고 다녀도
실없다 하지 않고 품어주는

귀 맑은 햇살이랑
세상에서 가장 청맑고 빛나는
웃음오리

평생 퍼낼 수 있는
종신보험통장에 저축해놓았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
날마다가 봄날

그냥 실실
그냥 빙그레
그냥 활짝 웃음이 나오는
날마다가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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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늙은 독수리 일기

이혜선

아직도 나는 돈키호테
뱃살 뒤뚱거리지만, 눈도 희미하지만

풍차거인에게 싸움 걸고
둘시네아 여신을 섬기는 멋진 기사

저 산 너머 바다 건너 그대 사는 곳이 궁금해
잎 지는 가을밤엔 낡은 신발 끈 졸라매고
아득한 얼음나라 그대 눈동자먼 하늘 별을 헤이는

‘보다 아름다운 것을 위해서라면 파괴하지 못할 규칙이란 없다.’*
힘차게 문 두드리는 귀 먹은 운명을 향하여
‘신세계’를 향하여

닿을 수 없는 별에 손을 뻗고
가질 수 없는 봉오리 위해 밤마다
가슴 깃털 스스로 뽑아내는 늙은 독수리

꽃이여
아직 피어나지 않은 그대여

끝끝내 피어날 수 없다 해도

새 부리와 발톱을 위해 기꺼이 바위에 몸을 던지는
나는 늙은 돈키호테

*베토벤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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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다랑논 식구들

이혜선

의좋은 형제들처럼
층층이 포개져 손에 손을 잡고 누워 있는 겨울 다랑논
그 옆으로 총총 어깨 겯고 앉아있는 마을의 지붕들

푸른 하늘과 바다에서 넘쳐나는
세상에 가득한 평화와 사랑의 눈발이
마을을 포옥 덮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루해가 저물었습니다
여늬때와 다르지 않은 빛과 그림자의,

기쁨에 빛나기도 하고
슬픔에 눈물 흘리기도 하는,
종종걸음치는 신발들의,
하루치의 삶을 살아내었습니다

바닷가 파도 거센 마을에 엎드려
잡은 손 놓지 않는 다랑논 같은 시간
그 다랑논에 엎드려 김매는 흰 수건의 뒷모습 안아주고 싶은
오늘 하루도 안식 속에 저물어가는,
다랑논 식구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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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

이혜선

엄마, 사랑해
나는 목청을 높여 말할 수 있지만
듣지 못하는 엄마라고
말을 할 수 없는 엄마라고,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어요

안 보이는 구석으로 엄마를 피해 나다녀서 미안해요

그러나 내게는 간절한 소원 하나 있어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가 딸이 되고 내가 엄마 되어
엄마가 내게 해준 사랑만큼 내 딸을 키우고 싶어
엄마를 부끄러워해서 마음 아프게 한 그만큼
내 마음도 아프고 싶어
언제나 내 눈 속에 가득 담긴
세상에서 오직 내 목소리만 알아듣는 엄마, 우리 엄마

엄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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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디오게네스달팽이

이혜선

지하철 계단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어깨에 걸머멘, 몸보다 큰 통가방
터진 지퍼 틈새로 삐죽이 내다보는
철 지난 얼굴

나선형 등껍질 속에 몸 오그려 넣고
더듬이 곧추세워 더듬더듬 기어가는 달팽이
맨몸 찰싹 땅에 붙여 기어가는 민달팽이

지하철 계단에 끈끈한 점액 묻혀가며
이루지 못한 꿈 부스러기 흘려가며
길 없는 길 기어오르는 디오게네스달팽이

잊고 있던 내 마음 속 그사람을 만났다

햇빛 한 줄기 찾아
천지가 내집인 달팽이
느려도 늦지 않은 달팽이*

*정목스님의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에서 차용

출처 : 《애지》(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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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마량포구 금빛 화살을 던진다

이혜선

남도의 이월은 바다로부터 온다

햇님 입술 닿을 때마다
살짝살짝 알몸 비틀며 간지러??? 타는 신호느이 바다
부드러운 젖가슴 다 열고 길게 누워
맨살로 안아주길 기다리는 다수운 뻘밭
양지 언덕 나실나실 피어나는 나싱개 향기

매생이 감태 파래미역
김발 걷어올리는 아낙네 재바른 손길
구수한 사투리로 어기여차
그물노래 뱃사나이 그을린 힘줄

공중을 나는 새의 깃털에
땅 속 깊이 잠든 뿌리에
금빛 화살을 던진다

파릇파릇
나실나실
수런수런
손 잡으로 온다

남도의 이월은 바람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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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지막 사제동행師弟同行

-단원고 희생자를 애도하며


이혜선

1.
오늘은 사제동행 산행날이야
너희들과 함께 가는 길은 언제나
내겐 기쁨의 시간이지
얘들아, 땀 흘리며 오르자
즐겁게 노래하며 호연지기를 기르자

2.
배가 기울었다 물이 들어찬다
구명조끼 입어라, 나는 필요 없다
빨리 갑판으로!
비상구로!
너희들 다 나가고 마지막에 나가마


배에 남은 아이들아, 두려워 말아라
마지막 순간이 온다해도
사제동행 산행날처럼, 함께 달리던 2인3각경기 그 운동장에서처럼
너희 손을 놓지 않으마
너희를 두고 나 혼자 살기 원치 않는다


이 순간 떨면서 꼭 잡은 손
그곳이 어디든 우리 손을 놓지 말고 함께 가자
우리는 하늘에서 새로운 꽃을 피울 꽃송이들이다
부모 형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다시 피어날 것이다
영원히 반짝이는 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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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문무왕의 후예들께
- 천안함 영웅들께 바칩니다

이혜선

차디찬 바다 속 꽉 막힌 격실 안에
숨 막히는 그대 생각
TV를 봐도 신문을 읽어도
온 국민 마음은 함께 숨이 막혀
잠자리에 누워도 그대들 애띈 무궁화,
피지 못한 꽃송이가 둥둥 따라 다녔어요

‘조국을 지키다 산화하신 님'을 부르는 아픔은
60년 전 한국전쟁 영웅들께 바친 노래로 끝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2010년 3월 26일 저녁 9시 22분
평화를 깨뜨리는 순간의 폭발

시시각각 초침소리에
심장이 오그라들고 삭아 내리는 69시간을 지나
제발 살아만 있어달라는 애끓는 애원을,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는 조국의 마지막 명령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온 그대
아니,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거룩한 조국을, 서해를, 동해와 남해를
죽어서도 떠나지 않고 지키려고
기꺼이 수중릉에 묻힌 문무왕의 후예들
영원히 조국수호 임무를 수행중인 미더운 대한의 아들!

자상한 남편이며 아버지
효성 깊은 아들이며 다정한 애인
함께 멋진 앞날을 꿈꾸던 형제며 친구
꿈도 많았던 46명의 우리 아들들

그대들은 바다사나이
문무왕이 조국통일을 완수하였듯이
그대의 숭고한 희생이 영원히 이 나라를 지켜내어
반드시 조국통일을 완수할 것입니다
남은 우리들이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어요

사랑하는 어머니여 아내여, 이제 눈물을 거두셔요
우리는 자랑스런 문무왕의 후예
평화와 자유를 위해
통일과 번영을 위해
언제나 푸른 청춘의 바다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그대 곁에, 조국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끝끝내 지켜드릴 것입니다
지켜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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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물과 시

이혜선

너를 만나러간다
꽃 한 송이 피우러
너를 만나러간다
나무 한 그루 심으러

너를 배우러간다
너의 아름다움을
너를 배우러간다
너의 다양함을

너를 만나 꽃을 피우고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싶다
너를 배워 아름다움을 알고
너를 배워 만물과 교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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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미륵사 절터

이혜선

깨져 이끼 낀 기왓장 위에 앉아
오래 놀던 적막이
바람을 깨운다
설핏 깨어난 구름
목이 긴 망초꽃 간질이며 노는 햇살 옆구리에
부처님
그림자 하나 떨구고 간다, 어제처럼

출처 : 《문학 선》 (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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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백제 고분

이혜선

제 7호분, 제 10호분
이름표 대신 번호표 달고
무리지어 누워 있다

둥근 봉분 언저리 그 발치께에
보라색 제비꽃
파랗게 입술 질려 눈짓한다

등허리엔
말라가는 쑥대풀 무등태우고
능침 쪽으로 허리 굽힌
키 큰 소나무들 읍을 받으며

언제쯤일까, 이름 찾을 그날을 기다린다

손잡아 깨워줄 발자국소리,
오늘도 기다리는 긴 하루

한가람 물결 위에 천 칠백 년 해그림자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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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불이 금줄

이혜선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에 비가 오면
우유니 소금호수에 하늘이 알몸으로 내려온다
소금호수가 하늘을 받아 안아 몸을 포갠다

소금호수 위를 걸어가는 검은 사람 흰 사람
모두 덩달아 옷을 벗고
알몸 하늘의 비밀문 안에 들어선다

본래 하늘과 땅은 하나였다
너와 나 사이 갈라놓고 소금 뿌린 금줄은
내 안에 있었다,
별이 되지 못하는 내가 어리석었다

소금사막 한가운데 잉카가와시 섬
하늘 위에 솟아올라
둥둥 속옷가지 다 벗었다
무거운 인줄을 다 버렸다,

소금호수 하늘을 받아 안아 몸을 포개는
황홀한 입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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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빈젖 요양원

이혜선

장미요양원의 꽃씨할머니
열 명이나 되는 새끼들이 아귀같이 빨아먹었다

새싹 밀어올리느라 젖먹던 힘까지 다 써버린 흰 뿌리,
쭈그러진 껍질만 우주의 절벽에 매달려 있다
누군가 손으로 누르기만 해도 바스락
그마저 무너져 내리는, 매미허물이다

시든 장미꽃잎에 비 한 줄금 지나가고
따슨 햇살 비낀 오후 한나절

절벽 가에 나란히 앉아 서로서로
지나온 허공 더듬어 보는 껍질들의 시간
말라버린 빈젖만이 앞가슴에 쭈글쭈글,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다
막 돋기 시작하는 아이들 잇바디,
깨물던 그 아픔을 기억할 때만 흐물흐물한 잇몸
드러나도록 웃어보는
빈젖동네, 빈젖요양원

소행성 B-612 어린왕자의 장미원에는
요양병원은 꿈에도 모르는 새 장미꽃만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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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사리 하나 품으려고
―불타는 崇禮門에 듣는다

이혜선

사리 하나 품어
가르쳐야 할 사람 그리도 많아
답답한 내 마음 들끓고 들끓어
화마를 불러들였다

‘崇禮門’ 현판 높이 달고 서울 한가운데 서 있어도
세상은
갈수록 예의 잃어버린 사람들만 가득차

불의 혓바닥에 육신을 내맡기고
燒身供養하는 내모습
불에 타서 쓰러지는 내모습
세상 사람들아 보아라
홍익인간의 후예들아 똑똑히 보아라

무너져 내리는 내 몸 속에, 검게 타버린 내 심장부에
무지개빛 영롱한
사리 하나 찾아 보아라

이제 이 나라에 비로소 예가 부활하리라
두 손 모아 내게 절하는,
나의 부활을 비는 애타는 아이들 마음속에
안타까운 겨레 마음속에
나는 다시 살아난다
어짊과 의리와 예의와 지혜, 믿음이 되살아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세상을 다 비추는 사리 하나 품고
다시금 세계에 우뚝 솟을,
예와 덕을 숭상하는 겨레여!
이제부터 시작이다

불타는 나의 심장을 기억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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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새싹 비빔밥을 먹다

이혜선

무우싹 냉이싹 겨자싹
고추장에 썩썩 비벼 발그레 물 오른 봄싹들
큰 숟갈 둠뿍 떠서 한 입 가득 넘긴다

내 몸 들녘 가득 푸른 새싹들 솟아난다
동그란 젖무덤에 볍씨가 싹트고
봄 오른 입술엔 파릇파릇 냉이가
등줄기엔 쭉쭉 뻗은 소나무가 자라난다

어느새 팔다리엔 자운영이 돋아나네
봐!
온몸 구석구석 살이 트기 시작했어
어느새 푸른 물결 넘실대고 있잖아

새싹비빕밥을 자꾸자꾸 먹으면
우리 사는 푸른 지구‘
맑은 물 맑은 공기 잘 썩은 흙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연분홍 봄싹 피어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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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새싹이 돋는 이유

이혜선

오늘도 나는
들판으로 나간다
맨몸 빈 마음으로
들판에 누워 그대 기다린다
그대 하늘빛
별빛으로 내려와
야윈 입술 긴 손가락
닿는 곳마다
내 알몸 구석구석 살이 트고
뼈 속 깊이 길이 열린다
새싹 돋아난다
상처 아문 붉은 꽃
꽃이 진 자리마다 새파란
새싹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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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새우젓사랑

이혜선

소금물 속에 녹아
살과 뼈 다 내주고
까만 눈만 뜨고 기다리는 새우
새우 몸을 받아 안아
제 살과 뼈 함께 녹여
흔적 없이 사라지는 소금
둘이 무르녹아 사라진 뒤에
둥근 항아리 가득 태어나는 새로운 우주

출처 : 《시와 소금》 (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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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색色을 먹고 공空을 낳다 1

이혜선

절골 자연 휴양림에
생강나무 층층나무 산딸나무 어깨 겯고 서 있다

해돋이 봄 하늘이 달려와 뻥튀기판이 되었다
햇살이 나무를 뻥튀기하더니
노란 생강나무 꽃이 피었다
층층나무 산 딸나무에 차례로 하얀 꽃이 피었다

숲 속에 해종일 하늘바라기선 나도
나무 옆에 빈 손 들고 서서
나무가 되었다

꽃의 염색채를 안고
온몸 물관부 잔가지 흔든다
뿌리를 거꾸로 허방을 쓸어본다

함박눈 내려 쌓이는 겨울이면
새벽마다 동그란 이슬방울이 내려와
하얀 허방꽃을 피운다

열매도 뿌리도 떨어진 이파리도
모두 허방꽃으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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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수탄장

이혜선

오늘은 너를 만나러 수탄장愁嘆場*에 가는 날이다
소나무 아래 늘어서 있는 너의 옷자락이 어서 오라 나부낀다

바람 불어오는 쪽을 등지고
저만큼 떨어져서 네가 서고
너를 스쳐오는 바람을 맞으며 철조망 앞에 내가 선다
나의 병균이 바람에라도 실려 네게로 갈까 염려해서다

너를 어루만지고 내게로 불어오는 향그런 내음을
크게 들이마신다, 뭉그러진 코로

내 딸아, 싸늘한 바람의 손 아니라
따스한 네 손을 잡고 싶다
네 복숭아볼에 내 볼을 부비고 싶다, 살과 살이 닿고 싶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허공을 붙잡는다, 너의 꽃잎을 안는다
내 입술이 네 뺨에 닿기 전에 뭉그러지고 비뚤어져 버린다

내 딸아, 비뚤어진 입술로 나는
네 이름을 똑똑히 부를 수 없다
진물 흐르는 이 손으로 너를 안을 수는 더더욱 없다

붙잡았던 하늘을 놓고, 꽃잎을 놓고
예쁘게 잘 자라고 있는 너를 바람에게 맡기고
빈손으로 나는
돌, 아, 선, 다,
겉보기엔 담담한 모습으로, 돌아보지 않고 잰걸음으로,
수탄장을 떠난다

*소록도 수탄장: 환자인 부모와
미감아 자녀가 한 달에 한 번 만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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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스푸마토 기법으로

이혜선

스며들고 싶다,
그대 속으로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던
스푸마토sfumato 기법으로
우리 사이 강강한 벽을 지우고
붉고 흰 바이러스 마스크를 지우고 사뿐히,
색색깔의 다리를 건너고 싶다
캄캄한 별이 빛나는 밤
아침노을 저녁안개
아다지오 향기로
오, 전생의 풀꽃 한 송이
세상의 모든 그대 속으로
☆★☆★☆★☆★☆★☆★☆★☆★☆★☆★☆★☆★
《28》
아라홍련
꿈 밖의 꿈

이혜선

찰진 아라가야 깊고 깊은 진흙 속에 내 몸을 묻고
그대 오실 날만 헤며 기다렸지요
그리 길었던가요
내 속에 그댈 품고 잠든 날들이,

꽃잎 하나에 일백 년 삼만 육천 오백 날
또 꽃잎 하나엔 일 만 시간, 일 억 시간, 잠 속에서도 행복했어요
열 두 겹 날개 열어 노란 암술 위에 살며시 닿아 깨워줄 그대
입술, 기다리던 그 시간들이,

칠백 년 쉬임없이 쇳물 피워올린 아라가야 꽃불 속에 나 비로소
눈 뜨는 오늘, 이 순간을 바라 캄캄 시린 어둠 밝히며
숨을 멈추었지요
하늘 품는 꿈 밖의 꿈을 꾸었지요

그대 앞에 바치는 찰진 진흙마음, 해를 품은 아라낭자의 사랑
천년만년 굽히지 않는 푸른 받침대, 연분홍 연연한 봉오리로
나 이제 꿈 밖에서 다시 꿈꾸어 올리오리다
그대와 나, 우리 아이들이 달려갈 영원한 아라가야 새하늘 새땅을,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안에 있는 연못에서 수습된
700년 전 고려시대 연씨가 발아하여 피운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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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아버지

이혜선

아버지
어젯밤 당신 꿈을 꾸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한 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
지게를 많이 져서 구부정한 등을 기울이고
물끄러미, 할 말 있는 듯 없는 듯 제 얼굴을
건너다보는 그 눈길 앞에서 저는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옹이 박힌 그 손에 곡괭이를 잡으시고
파고 또 파도 깊이 모를 허방 같은 삶의
밭이랑을 허비시며
우리 오남매 넉넉히 품어 안아 키워 주신 아버지

이제 홀로 고향집에 남아서
날개짓 배워 다 날아가 버린 빈 둥지 지키시며
‘그래, 바쁘지?
내 다아 안다.‘
보고 싶어도 안으로만 삼키고 먼산바라기 되시는 당신은
세상살이 상처 입은 마음 기대어 울고 싶은
고향집 울타리
땡볕도 천둥도 막아 주는 마을 앞 둥구나무

아버지
이제 저희가 그 둥구나무 될게요
시원한 그늘에 돗자리 펴고 장기 한 판 두시면서
너털웃음 크게 한 번 웃어 보세요
주름살 골골마다 그리움 배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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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천사들

이혜선

1951년 4월 13일 지구의 반대편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위기에 처한 한국을 위한 파병 출정식
약한 나라의 서러움을 아는 따뜻한 마음으로
머나 먼,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평화를 지켜주기 위한 출정식

21일간의 항해를 거쳐서 도착한 대한민국 부산 땅
253번 싸워서 253번의 승리를 거둔 용감한 용사들
적은 월급을 쪼개 모아 보화고아원 만들고
전쟁통에 어미 잃은 아이들 품어서 재워준 천사들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친 121명의 전사자를 이 땅에 묻고
겨우 목숨 건진 이들이 돌아갔을 때
그들의 조국은 혁명으로 공산국가가 되었다
공산주의와 싸웠다고 참전용사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문당하고,
숨어서 겨우 핍박받는 목숨만 이어왔다 70여년을,
부유했던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어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게 사는 강뉴부대 천사들

2016년 “따뜻한 하루”가 찾았을 때 220분,
2년 만에 이제 170분만 남아서
지금도 아리랑을, 부산의 이름을 부르는,
돌보는 이 없는 병상에서 뼈만 앙상한,
병상에서도 코리아를 걱정하는 노병들

세계평화의, 대한민국 평화의 진정한 사도,
저 혼자 잘 살게 되었다고
까맣게 잊고 있던 고마운 역사
우리가 찾아가 보살펴야 할,
자손 대대로 은혜 갚아야 할 천사, 에티오피아 강뉴부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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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연가

이혜선

가진 것 모두 그대에게 드렸네
텅 빈 나는
더 큰 자유를 얻었네
그대 울안에서 스스로 그대를 따르리
그대 그림자 되어
아름다운 꿈을 따르리

우리 서로 구슬그물이리
네 빛이 내게로 오고
내 빛이 네게로 가서
아름다운
무지개세상 낳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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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우리는 친구야
아베 고보의 ‘친구들’을 보고

이혜선

등뒤에서 날 노리고 있는 열 두 겹 톱날 올가미
눈앞에선 언제나 웃고 있는 그 얼굴
얇은 피부가면 안쪽에서 속삭인다
‘널 사랑해’

사방에서 목 조이는 검은 햇살바퀴들
눈앞에 다가올 땐 검은 미소짓는다
얇은 가면 살짝 구기며 귓가에 속삭인다
‘널 사랑하기 때문이야.’

심장 조이는 달콤한 그 한 마디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달콤한 그 향기
가까이 올 땐 언제나
‘우리는 친구야’

검은 햇살바퀴에 깔려
검은 향기에 취해 파열하는 심장
눈앞에선 언제나 미소 짓는
그 얼굴, 얼굴, 얼굴들의 올가미


* 아베 고보의 <친구들> 소설<침입자>: 가족이라고,
친구라고 하면서 침입하여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고,
앞에서는 웃는 얼굴, 돌아서면 올가미가 되는
표리부동의 현대인을 풍자해본 작품이다.

출처 : 《문학과 창작》 (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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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운문호일雲門好日1

이혜선

새해 새 아침에 떠놓은
정화수

벌겋게 달군 부젓가락으로
해의 심장을 찔렀다

물의
심장이 불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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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팝꽃 필 무렵

이혜선

6.25 전쟁 이듬해 초여름, 아직 보리가 익기 전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들다는 보릿고개
아이들은 그 고갯마루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벗겨 우려낸
멀건 송기죽으로 배를 채웠다

여기 저기 시체가 썩어 해골 되어 누어 잇는
그 산을 헤매다가 주운, 제 키보다 긴 녹슨 총 하나

장난감이 없던 시절,
동네 아이들 빙 둘러서서 좋아라 흔들어대며
여지저기 서로 만져보다 누군가 당긴 방아쇠에 뻥!
돌이의 밥통이 터졌다
길바닥에 하얀 밥알들이 쏟아져 나왔다

돌이 엄마가 절미단지에 쌀 한 술씩 모아서
생일밥 해준 그 이밥이,
길에서 죽은 귀신이라 제 집에 못 들어가고
상여집에 누었다가 산으로 간 돌이의 밥통에서,
이제는 배가 불러 이밥이 터져나는 아이들 앞에,

이팝꽃도 모르고는 아이들 앞에,
올해도 산에 들에 지천으로 이팝꽃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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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인드라 구슬그물

이혜선

충주박물관 불교전시실에서
호랑이 안고 있는 나한상을 보았다
귀가 크고 눈썹이 길게 늘어진 나한님이
아기호랑이를 무릎 위에 앉혀 포옥 안고 있었다

두 몸이 한 몸인 양 잠차지게 안고 있었다
얼굴 표정은 알 수 없도록 닮아 있는 돌덩이다
가부좌한 무릎 위에 앉아
편히 쉬는 아기 호랑이 모습도
알아볼 수 없도록 닳아 있다

마치 불어오는 바람에 뜰 앞 감나무잎이 날아내렸다
감잎 아래 흙집으로
개미들이 먹이를 가득 물고 드나들었다
먹잇감을 무거운 등에 진 개미 행렬 속에 언뜻
내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나한님의 긴 눈썹이 휘날렸다
두툼한 손으로 내 등을 쓸어주었다
잠차지게 포옥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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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저승꽃 수술하다

이혜선

둥근 능침을 둘러싼 곡장曲墻 앞에
말과 양들을 거느리고
문인석文人石으로 서 있는 그 남자

왼쪽 뺨에, 어깨에 검으스레
검버섯 피었다

아직은 저승 가면 안 되는데
영원히 저승 가면 안 되는데

영월땅 멀고 먼 지아비만 바라보는
슬픈 정순왕후님 가슴애피
지켜드려야 하는데,

레이저수술로 깨끗이
지워줘야겠다, 그남자 얼굴에 저승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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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적멸을 쪼다

이혜선

도토리 깍지 속에 숨어 있는
고요함을 주우러
오대산 적멸보궁 올랐더니

발 시린 딱따구리 한 마리
이 뭣고, 이 뭣고
마른 나무둥치만 쪼고 있었네

도토리도 다람쥐고 보이지 않고
마음 숨긴 물소리만
만져보고 돌아왔네

솔바람 소리만
만져보고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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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조선 된장 항아리

이혜선

고갱의 빈 의자에서 타히티의 여인들이
큰 젖무덤으로 걸어나와
조선의 항아리
둥근 엉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할머니와 손자들의 이야기가 소복소복 쌓이는
1월의 밤에
만삭의 항아리가 숨구멍을 크게 벌린다
오뉴월에 빨아들인 타히티의 태양 빛이
드높은 조선의 가을하늘빛이
대지의 젖가슴 속에서 마구 뒤섞인다

배불뚝이 오지항아리 속 된장 고추장이
뽀글뽀글 익어간다
새봄의 항아리 온 몸에
흑갈색 난초 한 포기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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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지구를 떠나서

이혜선

빗물에 깎여내려 동글동글한
석회석 산 모고테를 만나러 간다
모난 마음밭 갈아엎고
살바도르 달리의 늘어진 시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달팽이가 기어가고
물고기가 하늘 날아다닌다
해마와 악어가 나란히
사이좋게 놀고 있는 동굴 천정
사람은 혁명을 그려놓고 해골로 남아 있다*
(내 해골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뜨겁게 빛나는 해 아래서는
날개 짓 멈춘 독수리가 바람 타고 낮게 떠있다
접어둔 날개를 꺼내어 나도
둥근 구름을 둥글둥글 돌아본다

쿠바 비날레스 인디오 마을
느릿느릿 굴러가는 거울의 바퀴를 만나러 간다
모난 마음밭 갈아엎고
다시 돌아오는 여기, 나를 만나러 간다

지구를 떠나서

* 인디오동굴과 둥근 산의 한쪽 면에 그려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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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지구를 만들다

이혜선

미사리 한강 가에 가서 흙을 떠 왔다
아른아른 봄 햇살이 함께 따라왔다
하얀 스티로폼 상자에 햇살거름 섞어 담았다
집 하나 만들었다
매운 고추 방울토마토 상추를 심고 잘 눌러주었다
물을 훔뻑 주었다
우리 모두 묵은 신발을 벗고 새싹이 트는 봄밤
발바닥이 간질간질, 물관부가 스멀스멀 열린다
봄햇살 깃털 달고 날아오른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는 새 지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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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코이 법칙

이혜선

코이라는 비단잉어는
어항에서 키우면 8센티미터밖에 안자란다

냇물에 풀어놓으면
무한정 커진다

마치 너의 꿈나무처럼,

출처 : 《문학예술》 (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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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콩나물시루 속 심헤어

이혜선

1.
작은 콩알 속에 잠 든 씨눈이
싹터 줄기를 세우기까지
시루 속에서 몸 비틀며 밀어 올리는 연둣빛 시간

이따금씩 물 부어주면 온 몸 불리고 싹을 틔워서
마침내 까만 껍질 찢어지는 붉은 꽃송이

2.
캄캄한 콩나물시루 속 심해어
하루 서너 번 주는 물을 통째로 꿀걱 삼키고
젖은 몸 불리는 사코파린크스
통방울눈으로 위만 바라보며 선선에 들어
조금씩 줄기 밀어 올리는 바렐아이

작은 콩나물시루 속 세상을 키운다
수심 1km 아래 푸른 바다에서
연한 싹 한 줄기 끌어올린다
빛을 쏘아 올린다.

*심해어들은 깊은 바다 속 환경에 적응해가면서
수심 1km 아래서는 스스로 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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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풀치에게

이혜선

‘풀치’라고 네 눈을 마주하고 불러보면

풀잎에 내리는 아침이슬, 또르르 구르며
흔들리는 모습

가는 허리 요리조리 장난치는
깊은 바다 눈빛, 그 피리소리

오뉴월 물 오른 풀밭을 맨발로 걸어가면
발바닥 간질이며 바닷속 말을 걸어오는
새로 돋는 은빛 풀잎내음

‘풀치’라고 네 눈을 마주하고 불러보면

긴 허리, 물장구치는 지느러미
맑은 물방울 뽀글뽀글
세상 바다 다 가진 아기풀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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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호모 모빌리쿠스

이혜선

나는 마음 약한 빨간 궁둥이 원숭이
무리에서 떨어지면 가슴이 콩닥콩닥
큰 소리로 친구를 불러야 해
구름 그림자라도 손짓해야 가슴 쓸어내리지

나는 마음 약한 스마트폰 원숭이
금방 헤어진 애인이 왜 문자 보내지 않나?
하루에도 서른 번 넘게 눈 맞춰야 해
내 손안에 꼭 맞는 폰이 없으면 금방 눈앞이 노래지지

나는 빨간 눈알 굴리는 인터넷 원숭이
서핑과 쇼핑 사이
날마다 클릭클릭, 목뼈가 휘도록 그대가 그리워

오늘 우리는 커플각서에 도장 꾹 눌러
감옥 하나 만들었어
오빠의 목을 꽉 조르고, 엄지 하나로
그대 심장 속 들락날락, 악마의 앱 속에 나는
천사의 날개 달고 날아오르지

오, 지금 이 순간 목뼈가 부러져도
카르페 디엠!*

* 현재를 즐겨라: 톰 슐만 作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인용

출처 : 《시문학》 (2011.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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