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윤시모음 4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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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시모음 41편

서정윤시모음 4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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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0의 중반에

서정윤

그냥 그렇게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고
나뭇잎 없는 가지가 하늘에 적는다
채석장 바위 깨어지는 아픔이
자르르르 겨드랑이에서 번지는 오후
뿌연 겨울 먼지들이 창가에 부딪는다

내 마음속 깊은 얼굴에
입을 맞추고
또 품어도
자꾸만 아쉬움이 솟는다

새털구름 위로 날아오르는 상념
아직은 얼마든지 만질 수 있기에, 그대
사념 머무르는 자리를 찾는다

겨울 철새 떼 이동이 아름다워도
날개에 주어지는 무게는 지치고
사랑은 결국
많은 힘겨움을 함께하는 삶의

한 부분임을 깨달으며
지나가 버리는 시간 속에 잠시
함께하는 네 영혼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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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군가 나에게

서정윤

누군가 나에게
붉은 장미 두 송이만 보내 준다면
어느날 문득
혼자라는 생각에
못견디게 될 때
그 꽃과 함께하리
누군가 나에게
노란 장미 두송이만 보내준다면
먼저 떠나간 이가 그리워
밤을 촛불로 태울때
그 장미는 나를 지켜 줄텐데
나도 장미를 보낼 수 있는
그 어느
미지의 인물이 있다면
내마음의 수석자리에서 지고 있는
흰 장미 두송이를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을
누구나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장미가 필요하다
두송이의 장미라면
내 마음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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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끔은

서정윤

가끔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대 속에 빠져
그대를 잃어버렸을 때
나는 그대를 찾기에 지쳐 있다.

하나는 이미 둘을 포함하고
둘이 되면 비로소
열림과 닫힘이 생긴다.
내가 그대 속에서 움직이면
서로를 느낄 수는 있어도
그대가 어디에서 나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해 허둥댄다.

이제 나는 그대를 벗어나
저만큼 서서 보고 있다.
가끔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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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을 저녁에

서정윤

누군가 슬픈 얼굴로 흔들리고 있다.
조금만 더 슬픈 얘기를 하면
눈물이 되어 구를
노을의 눈빛을 본다.

미처 지쳐 있는
별빛 먼 여행으로
오늘은 어제의 다시 한번일 수 없고
그리움의 전설은 언제나
나의 옆에 처연히 쓰러지는
퇴색한 얼굴로 떠오른다

이름이 떠나는 저녁
누구에게나 건강한 노을,
다정하나 단호한 표정을 기다리며
슬픔은 잠시 잊어두자.

사람 사는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닐지라도 가슴 아픔은 늘상
비 오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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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을에

서정윤

꽃은 눈물,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태음력이 되어
나의 정원을 거닐고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아픔을
풀어줄 언어를 찾지 못할 때
외로움은 비처럼 젖는다
지나간 자신의 주검을 디디고 선
키 작은 꽃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이 낯선 계절에 젖으며
목적 없는 발길의 힘없음,
인도주의, 박애주의조차,
에고이즘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
낙원의 꿈을 위하여
정원을 일구어 가지만
가을 꽃은 말이 없다
바람이 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말없이 꽃이 지고
또 그렇게 이 가을은 가는 거지만, 문득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낄 때
무거운 어깨를 가눌 수 없을 때, 우리는
이듬해의 꽃을 위해 썩어가는 나뭇잎.
그 속에 썩어가는 자신의
빛나는 눈빛을 발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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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겨울 바람

서정윤

들어가고 싶어, 너에게
너의 깊숙한 틈 사이로
혼자 바쁜 심장, 속 영혼이 있는 곳까지
들어가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바늘구멍 문풍지를 흔들며
황소 때를 몰고 들어 오듯이
붉은 단풍 색깔이 물관을 타고 올라와
잎맥 구석구석 퍼져 나오듯
너의 온몸 은밀한 곳까지
나의 표식을 칠하고 싶어

남기고 싶어
물길 떨어지는 자리의 바위보다 더
너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나의 체취를 남기고 싶어
그래서
너의 전신으로 행복해 지는 소리를
나의 속에 가두어 오래오래
가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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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겨울 해변에서

서정윤

소리치고 있다
바다는 그 겨울의 바람으로
소리지르고 있었다.
부서진 찾집의 흩어진 음악만큼
바람으로 불리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했다.
아니, 물보라로 날리길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겨울의 바다
오히려 나의 기억 한 장을 지우고 있다
파도처럼 소리지르며 떠나고 있다.

내가 바닷물로 일렁이면
물거품이 생명으로 일어나
나를 가두어두던 나의 창살에서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 바닷가에서 나의 모든 소리는
바위처럼 딱딱하게 얼어 버렸다
옆의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그 겨울의 바람이
나의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았다.
소리쳐 달리는 하얀 물살꽃엔
갈매기도 몸을 피하고
바위조차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무너진 그 겨울의 기억을 아파하며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내 속의 시간
오히려 파도가 되어 소리치는데
바다엔 낯선 얼굴만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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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겨울의 노래

서정윤

겨울입니다
내 의식의 차가운 겨울
언제라도 따스한 바람은 비켜 지나가고
얼음은 자꾸만 두터운 옷을 껴입고
한번 지나간 별빛은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지는 곳은
너무 깊은 계곡입니다
바람이 긴 머리를 날리며 손을 흔듭니다
다시는 시작할 수 없는
남루한 의식의 겨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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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대를 사랑하는

서정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빛나는 눈만이 아니었습니다.

내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따스한 가슴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지와 잎, 뿌리까지 모여서
살아 있는 `나무'라는 말이 생깁니다.

그대 뒤에 서 있는 우울한 그림자,
쓸쓸한 고통까지 모두 보았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전부로 와 닿았습니다.
나는 그대의 아름다움만을 사랑하진 않습니다.

그대가 완벽하게 베풀기만 했다면
나는 그대를 좋은 친구로 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대가 나에게
즐겨 할 수 있는 부분을 남겨 두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무엇이 될 수 있겠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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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대에게

서정윤

무엇을 원하는 것으로
소유하려는 것조차
나의 욕심이라고 깨닫고
시인하며

가슴을 털며 돌아서면
사랑은 조건이 없는, 아니
진정한 사랑의 조건은

진실,
그 하나만으로 족한 것.
가면의 사랑으로 우리는

자기마저 속이려는 숱한
가여운 영혼을 본다

사랑 없는 삶은
죽음보다 무의미한 것이기에

우선은 내 마음의 진실을 찾아
아픈 추억들 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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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리움 하나

서정윤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은
푸른 꿈을 꾸는 날,
온통 내 안으로 밀고 들어와
오랜 익숙함으로 자리잡은 날개
깃털 무늬에 망설이는 흔적이 남아
하찮아 했던 것들에 눈 돌릴 여유로
정지된 풍경의 장면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묶인 매듭을 풀며, 억지로
내 가진 치유력을 믿어 보지만
슬픔의 숫자를 다 헤아리지 못했다.
바람 속에서 바람이 만들어지고
바람 속에서 날개가 생겨난다.
그 바람 속으로 나를 던져버린다.
어쩌다가 지나는 생각 조각들을
그냥 쳐다보며 시간으로 산을 쌓는다.

풍선으로 날려버린 기억의 파편들
꽃을 피우는 그 어떤 힘을 찾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맑은 눈빛을 느낀다.
사무치는 그리움 하나
가슴에 품고 노래하는 새
노래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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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기도의 편지

서정윤

하느님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합니다.

하늘 가득 먹구름으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건 당신의 일이지만
그 빗방울에 젖는 어린 화분을
처마 밑으로 옮기는 것은 나의 일,

하늘에 그려지는 천둥과 번개로
당신은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만
그 아래 떨고 있는 어린 아이를
안고 보듬으며 나는
아빠가 있다는 것으로
달랩니다.

당신의 일은 모두가 옳습니다만
우선 눈에 보이는
인간적인 쓸쓸함으로 외로워하는
아직 어린 영혼을 위해
나는 쓰여지고 싶어요.
어쩌면, 나는 우표처럼 살고 싶어요
꼭 필요한 눈빛을 위해
누군가의 마음 위에 붙지만
도착하면 쓸모 다하고 버려지는 우표처럼
나도 누군가의 영혼을
당신께로 보내는 작은 표시가
되고 싶음은
아직도 욕심이 많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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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길에 서서

서정윤

전혀 가보지 않은 길을 달려
여기까지 왔다
남들 다 쉽게 지나간 길을
너만 더 어렵게 왔다

나보다 빨리 지나간 사람들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까지 가서 쉬나
쉼없이 달리다가
이 길의 끝에 닿으면 어떡하나

이만큼의 길도
나는 이미 지쳤는데
그들은 왜 그다지 빨리 가야하나

그들은, 쉬는 밤을
별과 함께 보낼 수 있을까
별빛이 달려온 거리를
생각하며 반가이 맞을까

이러다가 나는
이 길의 끝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마치지나 않을까
그저 남들 따라가는 나는
얼마나 불쌍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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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꽃 씨

서정윤

눈물보다 아름다운 시를 써야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대 한 사람만을 위해
내 생명 하나의 유리이슬이 되어야지.

은해사 솔바람 목에 두르고
내 가슴의 서쪽으로 떨어지는 노을도 들고
그대 앞에 서면
그대는 깊이 숨겨 둔 눈물로
내 눈 속 들꽃의 의미를 찾아내겠지.

사랑은 자기를 버릴 때 별이 되고
눈물은 모두 보여주며
비로소 고귀해진다.
목숨을 걸고 시를 써도
나는 아직
그대의 노을을 보지 못했다.

눈물보다 아름다운 시를 위해
나는 그대 창 앞에 꽃씨를 뿌린다.
오직 그대 한 사람만을 위해
내 생명의 꽃씨를 묻는다.
맑은 영혼으로 그대 앞에 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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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나의 9월은

서정윤

나무들의 하늘이, 하늘로
하늘로만 뻗어가고
반백의 노을을 보며
나의 9월은
하늘 가슴 깊숙이
젊은 사랑을 갈무리한다

서두르지 않는 한결같은 걸음으로
아직 지쳐
쓰러지지 못하는 9월
이제는
잊으며 살아야 할 때
자신의 뒷모습을 정리하며
오랜 바람
알알이 영글어
뒤돌아보아도, 보기 좋은 계절까지.

내 영혼은 어떤 모습으로 영그나?
순간 변하는
조화롭지 못한 얼굴이지만
하늘 열매를 달고
보듬으며,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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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의 꽃에게
-생일에

서정윤

너를 사랑하는 건
밤하늘 수많은 별들 중
단 하나와 눈을 맞추는 일이다
검은 어둠을 흐르는 영혼 태어나
빛나는 꽃이 되었다

진흙에 숨길 불어넣는 그리움
나의 손가락 끝에 연결되는 너
숱한 바람들 속에서
그래도 태어나줘서 고마운 별

너무 짧은 꽃잎의 시간
내 가진 모든 빛깔로 만난다
마술처럼 신비한 삶은 이어지고
너의 태어남으로 인해 나의 삶은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빛나기 시작했다

너를 사랑하는 건 단 하나의 별과
눈을 맞추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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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눈 오는 날엔

서정윤

눈 오는 날엔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로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밟히고 있다
날리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 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 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보리라만
누군가의 머리 속에 남는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한갓 인간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알게 되리라

어디 다른 길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표정을 고집함은
그리 오래지 않을 나의 삶을
보다 나답게 살고 싶음이고
마지막에 한 번쯤 돌아보고 싶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그 누구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나에게 나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것만큼
그도 나를 아쉬워할 것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으며 살아야 하고
분노하여야 할 곳에서는
눈물로 흥분하여야겠지만
나조차 용서할 수 없는 알량한
양면성이 더욱 비참해진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나조차
허상일 수 있고
눈물로 녹아 없어질 수 있는
진실일 수 있다

누구나 쓰고 있는 자신의 탈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 갈 즈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뿐이다
하늘 가득 흩어지는 얼굴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마지막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용기와
웃으며 이길 수 있는 가슴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들
만날 수 있으리라, 눈 오는 날엔
헤어짐도 만남처럼 가상이라면
내 속의 그 누구라도 불러보고 싶다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눈이 그치면
눈이 그치면 만나보리라
☆★☆★☆★☆★☆★☆★☆★☆★☆★☆★☆★☆★
《18》
눈물

서정윤

아직도 가슴에 거짓을
숨기고 있습니다.

늘상 진실을 생각하는 척하며
바로 사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나만은 그 거짓을 알고 있습니다.

나조차 싫어지는 나의 얼굴
아니 어쩌면 싫어하는 척하며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인간적,
인간적이라는 말로써

인간적이지 못한 것까지 용납하려는
알량한 <나>가 보입니다.

자신도 속이지 못하고
얼굴 붉히며 들키는 바보가,

꽃을, 나무를,
하늘을 속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나를 보며 웃습니다.

비웃음이 아닌 그냥 웃음이기에
더욱 아픕니다.

언제쯤이면 나도
가슴 다 보여 주며 웃을 수 있을지요.

눈물나는 것이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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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다시 홀로 서며

서정윤

1.
마른 들풀 서걱이는
바람 소리만 홀로 허허로운
추억의 강가에 서서
잠시 쉬어가는 철새 떼들의
모래 속에 묻어야 할 기억들
이젠 떠나야 하리, 홀로서기 위해
쓰러져도 다시 서 있는 미류나무.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할 수 없다는 걸,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고
마음 속으로 끝난다는 걸
이제는 깨달아야 한다.

2
가야 한다면 가고
아직 고통스럽다면
오래 방황해야 한다.
그저 바람 지나는 들풀처럼
온 몸으로 맞으며 흔들리고
흔들리면서도,
그 들판의 삶을 사랑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지.

사랑한다는 말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없다.

3.
이젠 떠나자.
전생의 끈으로
이루어오던 사랑도
다 나무 밑을 지나는 바람인 것을
가슴 속에 살아있는
어느 유목민의 사랑 흔적조차
별빛 아래에서 빛나는 먼 전설이다.

그냥 기다림으로 계속되는
사랑을 찾아 헤메다
깨어진 자신의 삶을
그래도 살아야 하고

이제 사랑은
내 속에서 찾아야 한다.
내 삶에서 진실을 보여야 하고
그리고 사랑하여야 한다.
먼 훗날
또하나의 전설을 위해.

4
하늘 푸른 들녘에
그대 홀로 서서
나에게 손을 내민다.
쓰러진 내 모습이
가련해서라면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없다.
그대 아직도
나를 위한 촛불을
꺼뜨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의 손을 잡고
기꺼이 그대의 밤을 밝히는
촛불이 되어 타리다.

5
사랑의 상처를
또다른 사랑으로
치유해선 안된다.
고통은
밤 하늘 개울음처럼
자꾸만 서로를 불러내올 뿐
아픔은 결국
내 속에서 고쳐야 한다.

절망하며
사랑으로 난 문을 닫아도
가슴속 깊은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6
먼 훗날
사랑으로 하여
내 몸이 깨어질지라도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두를
나는 바칠 수 있다.
아침은 언제나
춥고 긴 어둠 뒤에
오는 것.
사랑을 위해
바칠 수 있는 목숨이 있는 한
나는 아직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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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들꽃에게

서정윤

어디에서 피어
언제 지든지
너는 들꽃이다

내가 너에게 보내는 그리움은
오히려 너를 시들게 할 뿐,
너는 그저 논두렁 길가에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인간이 살아, 살면서 맺는
숱한 인연의 매듭들을
이제는 풀면서 살아야겠다.
들꽃처럼 소리 소문 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한 하늘 아래
너와 나는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아직은 살 수 있고
나에게 허여된 시간을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냥 피었다 지면
그만일 들꽃이지만
홑씨들 날릴 강한 바람을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
《21》
따옴표 속에

서정윤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 말,
어디에고 표시하고 싶었다
눈부신 봄 병아리 노란 솜털에 적어
연초록 꿈이 돋는 앞마당에 내어놓는다
또르르르 몰려다니는 발자국 흔적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새겨지고……

소리치는 낙엽들 바스락거리며
손잡아달라고 덜컹이는 들 창문 틈새 지나는
바람의 목소리 되어
겨울 언덕 밭이랑 달리며 외친다

당신의 따옴표 속에 있을 수 있다면
지친 들판 혼자 우쭐대는 허수아비도
투명한 겨울 단풍의 마지막 아름다움도
눈발 타고 떠나는
북풍의 새털구름도 부럽지 않다

많이 사랑한다는 그 말
이제는 내 입술에 그려져 있다
별보다 까만 눈 속에 숨겨져 있다
단 하나만을 사랑할 마음, 샘물로 솟아나
지워지지 않는 표식이 되어
나를 적시며 흐르고 있다
당신의 따옴표 속에……
☆★☆★☆★☆★☆★☆★☆★☆★☆★☆★☆★☆★
《22》
마음 억지를 부리는

서정윤

잠깐의 이별도 충분히 슬프다

바람 노을 지우는 길가에서
곧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돌아서면서도
마음속 골수 한 움큼 '써억' 빠져나가는,
견고한 성벽 밑을 지탱하던 바위가
갑자기 사라진,
그냥 떨어지는, 눈 속의 하늘에 놀란다

그대의 그리움 속에 내가 있어도
한겨울의 칼바람보다
꽃샘바람에 더 진저리 치듯
떨어짐은 충분히 슬프다

그리운 계절, 뒷모습 나부끼는 시간
오직 그대만 생각하며
고목이 지켜온 들판 한켠에서
한 번의 꽃피는 흔들림만이라도
함께하고픈 욕심
억지를 부리는 마음을 달랜다.
☆★☆★☆★☆★☆★☆★☆★☆★☆★☆★☆★☆★
《23》
바람이고 싶어라

서정윤

바람이고 싶어라
그저 지나가 버리는,
이름을 정하지도 않고
슬픈 뒷모습도 없이
휙 하니 지나가 버리는 바람.

아무나 만나면
그냥 손잡아 반갑고
잠시 같은 길을 가다가도
갈림길에서 눈짓으로 헤어질 수 있는
바람처럼 살고 싶어라.

목숨 돌려줄 어느 날
내 가진 어떤 것도 나의 것이 아니고
육체마저 벗어두고 떠날 때
허허로운 내 슬픈 의식의 끝에서
두 손 다 펴 보이며 지나갈 수 있는
바람으로 살고 싶어라.

너와 나의 삶이 향한 곳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슬픈 추억들 가슴에서 지우며
누구에게도 흔적 남기지 않는
그냥 지나는 바람이어라
바람이어라.
☆★☆★☆★☆★☆★☆★☆★☆★☆★☆★☆★☆★
《24》
봄비

서정윤

준비되어 있다는 눈빛으로
젖어 있다, 그대는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히고
가끔은 깊숙이서 올라오는
즐거움에 온 가지가 떨린다

내 사랑의 수액을 물관마다 채우며
이미 젖어 있는 추억에서 벗어나
남은 생명을 위해 기도를 한다

뭔가 바라는 것이 없는 기도의 대화
그날 그날의 삶이 참 고맙다
잠시 만난 그대 뽀얀 미소
내 온몸이 그대 사랑에 젖어
한 순(旬)은 너끈히 견딜 수 있다.
☆★☆★☆★☆★☆★☆★☆★☆★☆★☆★☆★☆★
《25》
사랑의 길

서정윤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러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 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 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 밀리어 넘쳐
다가갈 수 없는 큰물 너머로
영영 갈라져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방울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 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
《26》
사랑한다는 것으로

서정윤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꺽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
《27》
사랑한다는 말로도

서정윤

사랑한다는 말로도
다 전할수 없는
내 마음을
이렇게 노을에다 그립니다.

사랑의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결국 사랑할 수 밖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삶이기에
내 몸과 마음을 태워
이 저녁 밝혀드립니다.

다시 하나가 되는 게
그다지 두려울지라도
목숨 붙어 있는 지금은
그대에게 내 사랑
전하고 싶어요.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에
익숙하지 못하기에
붉은 노을 한 편 적어
그대의 창에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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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사랑한다는 말은

서정윤

사랑한다는 말은
기다린다는 말인 줄 알았다.
가장 절망적일 때 떠오른 얼굴
그 기다림으로 하여
살아갈 용기를 얻었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줄 알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있어도
마음은 늘 그대 곁에 있는데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살았다.
그대도 세월을 살아가는 한 방황자인 걸
내 슬픔 속에서 알았다.
스스로 와 부딪치는 삶의 무게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한 줄도 모른 채
나는 그대를 무지개로 그려 두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하고
떠나갈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나로 인한 그대 고통들이 아프다.
더 이상 깨어질 아무것도 없을 때, 나는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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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산 벚나무

서정윤

그냥 단순히 받으려고만 하지 않는
그대 미소 방울방울, 나는 즐겁다

야산 비탈 산 벚나무 한 그루
하늘 향해 손 내밀고는
연분홍 꽃봉오리 터뜨려
아침 햇살에 젖어 있다. 늘상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은 물방울 찾아 투명한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물관 차고 올라오는 그리움 흔들고 있는
작은 마음 씀씀이가
태양을 기쁘게 한다

온몸 자지러지게 떨면서
나는 당신의 것이라고, 맘대로
가지라고
가진 가지들 모두 하늘로 쳐들고서
나만을 위해 열리고 있다

내 힘들어 지쳐도 그대 위하여
다시 바람개비를 돌린다
그냥 시간에 쌓이는 늙은 지층의 침묵보다도
가슴에 품은 여린 깃털 꽃잎을 화석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너를 맞는다
너를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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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소망의 시.1

서정윤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
햇살같이 가벼운 몸으로
맑은 하늘을 거닐며
바람처럼 살고 싶다 언제 어디서나
흔적 없이 사라 질 수 있는
바람의 뒷모습이고 싶다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그리고 살고 싶다
길 위에 떠 있는 하늘 어디엔가
그리고 얼굴이 숨어 있다
깃털처럼 가볍게 만나는
신의 모습이
인간의 소리들로 지쳐 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앞세우고
알타이산맥을 넘어
약속의 땅에 동굴을 파던 때부터
끈질기게 이어져 오던 사랑의 땅
눈물의 땅에서는 이제는
바다처럼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고 싶다
맑은 눈으로 이 땅을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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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수채화로 그린 절망

서정윤

내가 묻기도 전에 해는 서산에 진다.
시간의 질문들이 줄지어 따라간다.

결국 그대는 흑백사진의 한 장면으로
기억의 한쪽 면을 차지할 것이다.

영혼을 학대하기 위해 육신을
팽개쳐 버린 모습으로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그대의 고통을 읽기에 앞서
가슴 아리는 절망으로 빠져들었다.

내 짊어져야 할 그 짐들을
그대에게만 맡겨두고, 나는
잘도 잠을 잤구나. 그대 지친 몸으로
잠 이루지 못해 뒤척일 때도
나는 어줌잖은 낱말이나 맞추며,
싸구려 추억에 잠겨 잔을 들었구나.

내 앞에서 말없이 흐르는 그 흔적들과
함께 추락하며
여기쯤에서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억겁 윤회로 인해 나 여기 서 있다면
앞 생의 어떤 인연의 끈으로 나는 그대에게
이만큼의 고통을 안겨 주었나.

시간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고
이미 예약된 다음 생을 느끼면서도
구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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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아빠의 기도

서정윤

신이여, 나의 아이들을 지켜주소서.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들을
그의 몫으로 남겨두지 마시고
당신이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주소서.

그가 홀로 쓸쓸해하며
들판의 돌과 바람을 벗하며
놀고 있을 때, 신이여
당신의 바쁜 일이 많을지라도
그의 외로움을 돌아보시고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걸
믿게 해주소서.
먼 옛날
내가 길을 가다 넘어졌을 때
당신이 손 내밀어 일으켜 주신 것처럼.

내 흙장난에 지치고 졸음에 겨워
엄마를 기다릴 때, 당신은
나를 업고 달래며 재워 주셨지요.

어쩌면 나의 아이들이
당신을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향해 등돌리지 마시고
그들의 투정마저도 나의 어린 시절처럼
안아 주소서
당신이 아니면 내 아이들은
언제나 한쪽 담 모퉁이에서 울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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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에

서정윤

사랑한다는 말로도
다 전할수 없는
내 마음을
이렇게 노을에다 그립니다.
사랑의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결국 사랑할 수 밖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삶이기에
내 몸과 마음을 태워
이 저녁 밝혀드립니다.

다시 하나가 되는 게
그다지 두려울지라도
목숨 붙어 있는 지금은
그대에게 내 사랑
전하고 싶어요..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에
익숙하지 못하기에
붉은 노을 한 편 적어
그대의 창에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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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아침의 기도

서정윤

빛 속을 걸었다 영혼의 울림만
종소리처럼 번져 나갈 그 날을 맞으면
시간의 축은 사라지리라 그래,
이제 더욱 가까워졌어.
약속의 그날을 기다리면서도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었지.
자꾸만 나타나는 징후들이 두려워지는
나는 그들과 함께 흙이 되어 누워있을 나 자신을 본다

자신을 태운 불길로
주변의 생명을 밝히는 나무
새들의 순수와 사랑의 손길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어.

신이여 나는 두렵습니다.
나무에서 막 떨어진 낙엽처럼 길거리를 뒹굴며
어디에선가 한줌 부식토가 되어
풀뿌리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신이여,
내 흩어지는 영혼을 잡아주소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기름의 등잔으로 그 날을 맞이하는
초라함을 가려 주소서. 먼저 손 내밀지 못했던
자존심과 망설이던 주저함을 진작
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해 주소서

해 떠오르는 아침이
오늘 다르게 느껴지는 건
약속의 그 날이 더욱 가까워졌기 때문이라고
다시 새로운 하늘이 열리어
기쁨과 슬픔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을
나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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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여름 사랑은

서정윤

엄청 뜨거운 태양이
줄 쳐진 횡단보다를 건넌다
이미 아스팔트는 긴 홈이 파여
끈적이는 피부 스치는 바람이
짜증의 눈짓을 보낸다

이만큼 뜨거운 사랑은
황홀한 질식을 준다
어쩌다 한 걸음 멀어진 그대
마음 구석진 언덕,
무거움으로 자리 잡는다

햇볕의 손을 잡고 건너는 길
아무런 방해도 없이
내 사랑의 뜨거움이 그대로
전달되어질 때가 좋다

여름날의 사랑은 시원하다
내 가슴의 뜨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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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저녁 연기

서정윤

저녁 연기는 어디로 가는가
그대 저문 들녘
굴뚝을 떠난 이후, 언제나
떠돌던 그림자
흐린 하늘에 비친 저녁 얼굴
그릴 수 없는 자신의 불꽃
연기로만 오를 뿐
미처 다 타버리지 못한 아쉬움조차
안타깝다.
이것은 나의 얼굴이 아닌 채
말하지 못하는 비겁함.
모두를 해결해 줄 시간은
너무 천천하다.

연기는 언제나 흩어진다.
갈 곳을 알고
너무 바삐 가버리는 그들
기다리는 허무, 끝없이
갈 곳이 있는 그들이 신기하다.
슬픈 하늘의 노래가 울리고
울려 흔들리는 내 그림자
무심히 지나가 버리는 그들 뒤에서
가슴 깊이 기침하는 그림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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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첫눈

서정윤

보고싶은 마음보다 먼저
먼저 눈발이 날린다.

낙엽 모이던 금호강변 어디
지금쯤 그대는
내 속에 앉는다.

키 큰 미루나무 빈 가지에
올해 깬 까치가
자꾸만 설레이고
맨발로 달려오는 소식들
내 마음
먼저 반갑다.

그리운 마음 그 어디서
눈발 날려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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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축복

서정윤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마지막이 있다는 것.

문득 그 끝에 선
흰 수염의 인자한 얼굴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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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측백나무 무늬

서정윤

나무의 무늬를 아시나요?
깊숙이 감추어둔 측백나무의 불꽃을,
목수는 그 마음 찾으려고 대패질하지만
세월의 무게만큼 견고함
여름철 몰아치는 비바람의 두려움과
눈보라 휘달리는 풍경화의 한 부분
나무의 내부, 사랑무늬를 본 적 있나요?

그대 나의 마음을 읽으셔요
아무렇게나 돌아가는 전기톱으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속 무늬
겉모습만으로 섣부른 결정 주지말고
나무들 나이만큼의 고난을 읽으며
나의 눈짓, 손짓, 머리카락 날리는
삶의 흔들림을 느껴보셔요

나무를 베지 않고도 읽을 수 있는
속마음의 무늬
그대에게만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대 만나기 위한 힘겨움의 시간을,
그대 함께 하는 황홀한 발자국을
아직 미완성의 불꽃무늬를
내 목숨을 걸고 보여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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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파도의 끝 어디쯤

서정윤

깨어 있으라, 그대의
낯선 얼굴 눈물자국이, 아득한 기억의 동화로
살아나는 밤을,
지키고 있으라 서성이며
오랜 찾음 어디엔가
울음 우는 영혼이 쓰러지고
쓰러지며 그리운 그리움이여.

모든 쓰러짐의 어디쯤
고통의 투명한 꽃들 사이에서 아픔은
잊었던 사랑을 일으켜 세우며
소리지르는, 소리지르며 떠나지 못하는
뭉크의 한 장 달력이 넘겨지고
언제나 누워 두드려보는 하늘의 창
아직 닫혀 <떠나야지> 못하는

끊임없이 울어 부서지는 파도의 끝
울음 속에 자라는 울음의 희열
파도의 끝 어디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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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핑 도는 그리움

서정윤

온종일 걸었다, 땀 흘리며
그래도 그리운 건 남아 있다
그대 생각을 않으려고
지나가는 바람들 남김없이 읽었다

스치는 그 얼굴들 속에
남아 있는 그대 눈빛이 힘겹다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억지 미소를 지어봐도

돌아서면 그대 그림자,
내 마음에 드리우고
핑 도는 그리움
아직도 나는 그대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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