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옥시모음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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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옥시모음 15편

이순옥시모음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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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 난설헌과의 만남

이순옥

비를 뚫고 안개 강 건너
당신 앞에 섰습니다
흘러간 세월의 무게보다
당신이 짊어진 인고의 무게가
더 가볍진 않았겠지요

아둔하고 오만하여 뜻대로만 상황을 재단한
시대의 아류자지만
허공으로 방울방울 흩어지는 액체들은
당신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 겪어 온
온갖 감정의 집합체입니다

당신의 행보 하나, 하나에 의미를 가졌고
그것들이 모두 연결되어 지금의 내가
작게 숨을 쉬는 거라고
내가 걷는 그 걸음 끝에
당신처럼 굳건한 이름매긴 설자리가 있을 거라고,

폭우를 뚫고 화답하는 매미 소리가
힘찹니다 그건 1초를 영원처럼 사는
당신의 세계에 들어 선
마법의 시간을 세상의 시계로
돌아가기 위한 소리

그저 도태된 채로 시간의 흐름을 방관하던
어제와 다른 시각
나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 갈
내 인생의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시작 된 날이었어요

2020년 8월 15일
난설헌 생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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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기 일식

이순옥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짧기만 하네
죽음의 그림자는 짙기만 하여
나 그대에게 나를 주려 하네
나 그대를 가지려 하네

서로의 몸에 서로를 각인하는 그
시간은 고작
반각의 짧은 시간이지만
생의 전부를 담고 있는 절절한 열정.

한사코 운명을 피하려 하나
그 모든 몸짓이 다 정해진바
숙명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음을

손끝에도 음률이 흐르는
생의 끝자락
끝내 지울 수 없는 서운함
많은 날의 기다림을 문신처럼 새겨 넣네

*일각 15분
개기 일식 지속시간 최대 8분
실제 관측시간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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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슴도치 딜레마

이순옥

서로에게
감각의 끝을 세우다
격정으로 내닫는 감정의 골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무게
잠시 담았던 설렘은 흔적을 감추고
감정의 파고를 달랬지만
걱정이 일구어지며
나직하게 떨어지는 음절의 심장 박동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일이
고조되며
가지런한 배열을 깨고
어긋난 톱니바퀴처럼

불거져 솟구칠 때마다
완벽한 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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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계의 종착지

이순옥

지루한 공방전이 끝나고
모두가 희망에 부푼 날
혼자만 겨울이었다
낮의 길이도 점차 짧아지는
미틈 달 어디쯤

인정할 수 없습니다
얼음처럼 쌍클한 한 마디
밀린 자의 말은 목적지를 잃었고
기껏 결심한 마음은
정사각형 윤리 틀을 넘어섰다

머릿속에서 일정하게 움직이던
툭 져버린 시계의 세계
시곗 바늘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물처럼 고였던 시간이
이내 반대로 돌기 시작한다

이성은 도도한데
감정은 너무나 얄팍하고
팔랑거리다 무너져 내리는 탑
후회에 단맛은 없다 남은 건
차가운 정적과 불편한 침묵뿐.

미틈달 11월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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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꽃 무릇 추억을 부르는

이순옥

사소함이 행복이었음은
그 사소함이 추억이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닫고
그리움은 종종 그 추억에서
고개를 내밀곤 한다

옆에 핀 꽃 한 송이
옆에 머무는 이의 따스한 온기
손끝에 희미하게 남은 너의 향기처럼
추억 속에서 아련한

꽃 무릇이 피었다오
10여 년을 함께 일한 나의 벗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받고
깊고 진한 추억에 빠지다
익숙한 향기, 스며드는 물기
세월만큼 쌓인 그리움보다
10여 분 동안 쌓인 그리움이 더욱
클 것 같은

홀로 추억을 보는 건 때로 외로운 일
손끝에서 부서질 듯 건조하던 공기가
과하게 축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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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눈물 버튼

이순옥

홀로일 때는 말이 필요 없다
그저 존재하면 될 뿐
타인과 감정의 온도를 맞추는 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다 토해내지 못한 울음이 가득한 곳
지워지지 않은 아픔이고
깊게 할퀴고 간 그리움이며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 흉터였다

되돌린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선
시험해보고 싶다
어느 쪽으로 기울까

처마 끝에 새벽이 걸렸다
바람 소리 한 점 스치지 않았다
시린 바람에 하얗게 흩날려
흐르면 흐를수록 더 차가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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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민들레의 이름으로

이순옥

가장 낮은 모습으로
입맞추며
마지막 힘을 모아
한 올 깃대를 세우고
행여나 하는 그리움은
노란 등불로 켠다.

갈증 같은 사랑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
다시
희망 하나 들고
네게로 가는 길
설렘은 바람에 실어
긴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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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밤에 쓰는 시
운명, 그 헛되고도 족쇄 같은

이순옥

생각한다.
반복되는 시간의 굴레 속에
홀로 갇힌 자의 쓸쓸함에 대하여

눈 속에는 억겁의 시간이 있다
겹겹이 쌓인
시간의 미로가 너의 눈 속에 있었다
빈 공간에 쌓이는 먹먹한 침묵

시간의 바깥에 있던 나는
너로 인해
시간의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입에서 노니는 한치 단어들이 모여
진실처럼 무겁고
열정처럼 뜨거운 낙인이 되어

빛. 생의 빛과 같은 눈을 바라보며 고백한다
오직 너만이 내게 존재하기를
머릿속에서 맴도는 말은 그저 생각일 뿐이지만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말은
약속이 되고 맹세가 된다

운명이란 늘 뛰어넘어야만 하는
벽이자 부숴야 하는 장애물
긴 삶과 짧은 생, 그 한가운데
작은 섬처럼 고인
이 순간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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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밥 한 끼 먹자

이순옥

마주 끼고 앉은 밥상엔
따뜻한 온기 한줄기 없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을 품은
윤기 흐르는 고갈비에도
파삭파삭 부서질 듯 표고버섯 튀김에도
갈 길 잃은 젓가락 허공을 휘젓는다

밥 한 끼 먹읍시다
단어의 중의성이 빚어낸
쓸데없는 착각
결과에 따라 마음은 재정립된다

답은 알고 있었으나 분명
다른 길도 있었을 적절한 순간은 왜
이리도 갑작스럽고 무계획적으로
찾아오는가

영혼 없는 말
평화로운 시간을 잘게 조각 낸다
차마 매듭짓지 못한 말끝에 기어이
미련을 끊어내고

우리 밥 한 끼 먹자
강 된장에 보리밥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고
고추장 한 숟가락에 아직 푸르른 우리 영혼

쓱쓱 비벼, 그래
우리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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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사화 1

이순옥

애절한 것은
저토록
검게 바스러지는가
생각의 그물은 멈추지 않고
마음속에 숨긴 글자
세상 밖으로 꺼내
발끝으로 떨어뜨린다
눈동자 가득 잘게 떨리는 빛
깊이를 알 수 없는 맑고 투명한 눈 속에
붉은 바다가 담겨있다
태양이 잠자고
삼라만상이
작은 우주가
타오르는 불꽃으로 수없이 담금질하여
마침내 형체를 갖춘
불의 차가움을 품은
봄 연못 위에 그려진 푸른 달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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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수학 선생은 책을 읽지 않는다

이순옥

오랜 세월의 반목,
메울 수 없는 불신
말끝에 마음이 걸려
부표처럼 떠돌 때

부재가 만들어내는 적막함이
나를 추동할 때
초점을 비켜나간 동공이
허공을 더듬이질을 시작할 때
설움의 일몰이 몰려들며
없어진 발가락에 눈물이 흐를 때
사흘 밤낮 그리운 이로 베갯잇 적실 때도

창가로 스며드는 파란 달빛
바람이 연주하는 풍경 소리
낮게 가라앉는 적막
무채색의 시간만 절정을 향해 치닫다

오래 알아 왔다고
전부를 안다는 건 오만
공간을 베어버리는 경고
잘 넘어가지 않던
책장의 한 귀퉁이가 접히고,
드디어 넘어가는 시간의 걸음

외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벼랑 끝에서
다음 발을 내디딘 사람뿐
단 한 구간도 이해가 되지 않는
논리적인 이유를 덧붙이지도 못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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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시절 인연

이순옥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버리기 위해선 가져야만 하듯
입안을 가득 메운
씁쓸함에 심안에 구김이 지고
과거의 데이터로
아등바등 현재를 만들어 내야 한다

너무 울지 마라
눈물에 눈을 내주다 보면
행복도 씻겨버릴 수 있으니

끝이 없는 관성에
꿈이 떠밀릴 수 있음이니
담배를 문자의 뜨거운 회한이
연기처럼 공중에 분해되는 순간처럼

이성이 사라지고 언어가 가라앉는 공간
사람은 기억에서 태어나고
평생 그 기억 속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임을 증명해 가는 존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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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인연 플래그

이순옥

세월이 흐르면 감정도 변하는 걸
가슴이 욱씬,
불에 덴 듯 뜨겁게 고통스러워도
눈 속 잠시 피어나 향기만을 뿌리고
속절없이 진 매화꽃을 생각한다

왜 너만 나의 예외가 되는 걸까
정말 모르든, 모르는 척하든

눈동자 위를 그림자로 덮은 이
누구인가
인연은 기억에서 태어나
아롱아롱 삶에 수를 놓듯이 성장한 것이니

이별은 혼자 하는 게 아닌걸
아직 저녁노을조차 거두어지지 않은 시각
설명 못 할 감정이 속을 헤집어 놓은 줄도 모르고
겨울밤을 닮은 눈을 하고선
아직 오지 않은 봄의 말을 한다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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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연의 무게

이순옥

생의 정점에서 환했던 시간도
두꺼운 백과사전 책갈피에서 떨어진
빛 바랜 나뭇잎 한 장
그 격리의 기억처럼
질리게 아득한 것인가

운명을 거역한 죄
종이꽃처럼 짓밟힌 영혼
어쩌면 인연은
배에 부딪히는 저 물살과도 같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출렁이지만
결국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

마지막 기차역에 내려
이제 갈 곳을 아는 것처럼
무거워진 나뭇잎을 하늘하늘 날려
그렇게 한 시절
빛나는 삶을 마감하는 나뭇잎처럼

스쳐 지나간 인연엔
오늘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치 않을 약속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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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주 사적인 영역

이순옥

잠포록한 날씨
날비가 오던 그날 맞닿은 시선을 타고
말로 다 하지 못한 진심이 오갔다
침묵은 생각보다 길고 버거웠다
하얀 안개에 휩싸여
어둠에 가려진 세상

홀로 남은 진심이 텅 빈 집을 채우고
궁금증과 질투심 억지로 끌어내린 자리
그만큼의 욕망이 자리했다
미움도 원망도 퇴색되어
어느새 짙은 후회로 남은 관계
이제 우리가 써 내려갈 내일은
얼마나 깊고 아득할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달콤함과 잔인함 사이
그리움에 갈빗대 아래가 쑤셔와도
모든 인간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어
소멸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
그 기간이 지난 관계는 폐기된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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