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관한 시 모음> 이성부 시인의 '익는 술' 외
정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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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4
2010.03.17 01:53
<술에 관한 시 모음> 이성부 시인의 '익는 술' 외
+ 익는 술
착한 몸 하나로 너의
더운 허파에
가 닿을 수가 있었으면.
쓸데없는 욕심 걷어차버리고
더러운 마음도 발기발기 찢어놓고
너의 넉넉한 잠 속에 뛰어들어
내 죽음 파묻힐 수 있었으면.
죽어서 얻는 깨달음
남을 더욱 앞장서게 만드는 깨달음
익어가는 힘.
고요한 힘.
그냥 살거나 피흘리거나
너의 곁에서
오래오래 썩을 수만 있다면.
(이성부·시인, 1942-)
+ 술
술 없이는 나의 생을 생각 못한다.
이제 막걸리 왕대포집에서
한 잔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취하게 마셨지만
오십이 된 지금에는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다.
아내는 이 한 잔씩에도 불만이지만
마시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천상병·시인, 1930-1993)
+ 술타령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
(신천희·스님이며 시인, 전라도 어느 암자의 주지승)
+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내가 술을 마시는 건 꼭 취하고 싶어 마시는 술 아니다.
허무한 세상
땀 흘려 얻은 울분을
허기진 뱃가죽 공복에 씻어내려고 마시는 술만도 아니다.
남자의 고독을 술 한잔에 섞었다 말하지 말아라.
나 홀로 술잔 기울인다고 술꾼이라 말하지도 말아라.
내 빈 술잔에 아무도, 무엇 따르는 이 없는 걸 너희가 아느냐.
내가 말없이 술잔 비우는 건
윤회를 꿈꾸는 세월에 주먹을 치며 나를 달래는 일이다.
내 가슴 일부를 누구 스친 바 없는 시간에 미리 섞는 일이다.
허기진 공복에 잔을 씻고 씻으며
미지의 시간을 위로해주려는 그런 마음이란 말이다.
(강태민·시인, 1962-)
+ 술 마시는 남자
다치기 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술을 마시네
술 취해 목소리는 공허하게 부풀어오르고
그들은 과장되게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거나
욕을 하네
욕은 마음 빈곳에 고인 고름,
썩어가는 환부,
보이지 않는 상처 한 군데쯤 가졌을
그들 마음에 따뜻한 위안이었으면 좋겠네
취해서 누군가를 향해 맹렬히 욕을 하는 그대,
취해서 충분히 인간적인 그대,
그대는 날개 없는 天使인가
그들 마음의 갈피에 숨어 있던 죄의 씨앗들
밖으로 터져나와
마음 한없이 가볍네
그 마음 눈 온 날 신새벽 아직 발자국 찍히지 않은 풍경이네
술 깬 아침이면
벌써 후회하기 시작하네
그렇다 할지라도
욕할 수 있었던
간밤의 자유는 얼마나 행복했던 것이냐
(장석주·시인, 1954-)
+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김수영·시인, 1967-)
+ 나는 포도주
나는 포도주
햇볕과 바람과 비와 인간 속에서 저절로 익은 포도주
나를 마셔라
부드럽고 달콤새콤한 맛은 모두
고뇌의 흔적이 낳은 은총
눈물에든 웃음에든 맘껏 섞어 마셔라
태풍과 폭우와 욕망과 배덕의 식은 재 속에서도
살아남아 익은 포도주
와서 나를 마셔라
돼지에게는 돼지의 맛
소에게는 소의 맛
나귀에게는 나귀의 맛
개에게는 개의 맛
인간에게는 인간의 맛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어떤 맛과도 교제한다
와서 맛보라
저절로 익은 것들은 무엇보다도 풍성하고 따뜻하다
理想에 겁먹고 性에 굶주리고 향수에 시달린 이들이여,
서슴없이 와서 나를 맛보라
자연과 인간의 눈물이 죽도록 사랑해서 만들어놓은
十惡十善의 맛이 골고루 응축되어 있다
원하는 맛대로 나를 마셔라
저절로 익은 향기는 모두 에로스의 핏줄
상상할 수 없는 태고의 사랑이 내 속에 녹아 있다
마음껏 나를 마셔 나를 발견하고 나와 작별하라
나는 포도주
신이 인간에게 내린 커다란 축복
언제나 나는 그대들 속에
숙명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다
(김상미·시인, 1957-)
+ 막걸리
어머니의 젖줄 같은
그윽한 정이
투박하게 배어있는
진하고 걸쭉한 물
거머리 뜯기며
진흙 창 논바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허리 참 하는 그 시간
피로와 배고픔을 채워주던
마술 같은 액체
가슴은 두근두근
순이 곁에 서면
작아지던 내가
벌컥 벌컥 한잔 들이키고
"사랑한다"며
첫사랑을 고백하게 한
사랑의 미약
부질없는 삶
낙수소리 벗삼아
머리 허연 우정을 싸잡아
어우렁더우렁 잔 부딪치는
행복한 노년의 낙
(우보 임인규·시인)
+ 날 부르려거든
날 부르려거든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지 말고
'참소주를 한 잔 사겠소"라고 말해 주오
좋은 술집, 비싼 술집이 아니라도 좋소
시장 안, 꼭 시장 안이 아니라도 좋소
돼지국밥집이나 순대국밥집이면 더욱 좋소
술을 사겠다니 부담이 없어 좋지만
주머니엔 술값을 넣어 가지고 나가겠소
마시다 보면 술값은 내가 낼 수도 있고
아니면 2차를 내가 내더라도
그게 술 마시는 기분 아니겠소
한 잔이라고 했지만
한 병씩은 마십시다 그려, 그리고
기분이 동하면 한 병 더 시킵시다
혹시,
술값을 내가 내어도 나무라지는 마오
술 사려다 대접받으니 그대가 좋을 것이고
대접받으려다가 내가 대접을 했으니
내 기분도 좋을 것이라오
날 부르려거든
그냥,
"참소주를 한 잔 사겠소"라고만 하소
어제 과음했어도 나가리라
내일 과음할 일이 있어도
오늘 저녁엔 나가리라.
(김종환·시인, 1951-)
+ 선생님과 막걸리
해가 중천에 있고 겨울은 시작되었다
네모난 창에 등을 대고 언덕 내리막길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앙상한 미루나무 아래로 걸어 올라오시는 선생님
필경 우리 담임 선생님이셨다
울타리도 죄다 없어진 우리 집을 묻지도 않고 찾아오신 그 날
엄마는 신작로 중앙상회까지 내려가 오징어를 사왔다
콩콩 곤두박질 치는 심장은 곤로 속 심지보다 더 뜨거웠다
양조장집에 가서 막걸리를 두 됫박 넘게 받아오고
선생님은 오징어회를 맵지도 않은지 잘도 드셨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는 거지
나는 선생님이 떠난 후의 각오를 새롭게 했다
또 양은 주전자를 가지고 막걸리를 받아왔다
바닥에 쏟고 몇 번은 입을 대고 빨아먹었다
선생님은 두 번째 주전자마저 다 비우고서야 일어나셨다
무슨 말이 오갔을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로든 도망쳐야 하는데
그날 밤 엄마는 아무말 없었다
그리고 한달 뒤 중학교 입학원서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날 느이 담임이 와서 가지도 않고 막걸리만 마셨는데
막걸리 잔을 비울 때마다 너는 꼭 공부시켜야 한다고 하더라
지긋지긋한 술
느 아버지도 모자라 이젠 담임까지 와서 술타령이냐
나의 은인 담임 선생님
아마 그때부터 술을 가까이 하신 것일까
슬픔의 강 너머로 나의 선생님이 손짓한다
(최나혜·시인)
+ 술과의 화해
나는 요즘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는 한때
어떤 적의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크기 위해 부지런히
싸울 상대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애인조차 원수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해서 먹고 살만해지니까
원수 삼던 세상의 졸렬한 인간들이 우스워지고
더러 측은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화해했다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대신 술이라도 원수 삼기로 했었다
요컨대 애들은 싸워야 큰다니까
내가 이를 갈면서
원수의 술을 마시고 씹고 토해내는 동안
세상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었고
책들은 늘어나거나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텅 비고 시는 시시해지고
어느 볼장 다 본,
고요하고 섬세한 새벽
나는 결국 술과도 화해해야 했다
이제는 더 크고 싶지 않은 나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나는 득도한 것일까
화해, 나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변하지만
비겁한 타협이라고 굴복이라고
개량주의라고 몰아붙여도 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것이다
적이 없는 생애는 쓸쓸히 시들어간다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강연호·시인, 1962-)
+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은
나뭇잎 한 바구니나 화장품 같은 게 먹고 싶다
그리고...... 말들은 무엇 하려 했던가
유리창처럼 멈춰 서는 자책의 자객들......
한낮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누워 꽃나무들에게 사과한다
지난 저녁부터의 발소리와 입술을,
그 얕은 신분을
외로움에 성실하지 못했던,
미안해 그게 실은 내 본심인가봐
아무래도
책상 밑이나 신발장 속 같은
좀 더 깊은 데 들어가 자야겠다
그러한 동안 그대여 나를 버려다오 아무래도 그게
그나마 아름답겠으니
(김경미·시인, 1959-)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시인, 1952-)
+ 술
어젯밤 이슥하도록
동무들과 진탕 퍼마신 술
앙금으로 남은 숙취로
온몸이 돌덩이 같다
조금만 절제하면 좋았을 것을....
늘 한발 뒤늦은 후회
술과 인연을 맺은 지도
삼십 년 세월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녀석의 정체를 도통 모르겠다
한순간 참 얄밉다가도
노을이 지면 살짝 그리워지는
애증(愛憎)의 신비한 벗
술이여!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 익는 술
착한 몸 하나로 너의
더운 허파에
가 닿을 수가 있었으면.
쓸데없는 욕심 걷어차버리고
더러운 마음도 발기발기 찢어놓고
너의 넉넉한 잠 속에 뛰어들어
내 죽음 파묻힐 수 있었으면.
죽어서 얻는 깨달음
남을 더욱 앞장서게 만드는 깨달음
익어가는 힘.
고요한 힘.
그냥 살거나 피흘리거나
너의 곁에서
오래오래 썩을 수만 있다면.
(이성부·시인, 1942-)
+ 술
술 없이는 나의 생을 생각 못한다.
이제 막걸리 왕대포집에서
한 잔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취하게 마셨지만
오십이 된 지금에는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다.
아내는 이 한 잔씩에도 불만이지만
마시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천상병·시인, 1930-1993)
+ 술타령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
(신천희·스님이며 시인, 전라도 어느 암자의 주지승)
+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내가 술을 마시는 건 꼭 취하고 싶어 마시는 술 아니다.
허무한 세상
땀 흘려 얻은 울분을
허기진 뱃가죽 공복에 씻어내려고 마시는 술만도 아니다.
남자의 고독을 술 한잔에 섞었다 말하지 말아라.
나 홀로 술잔 기울인다고 술꾼이라 말하지도 말아라.
내 빈 술잔에 아무도, 무엇 따르는 이 없는 걸 너희가 아느냐.
내가 말없이 술잔 비우는 건
윤회를 꿈꾸는 세월에 주먹을 치며 나를 달래는 일이다.
내 가슴 일부를 누구 스친 바 없는 시간에 미리 섞는 일이다.
허기진 공복에 잔을 씻고 씻으며
미지의 시간을 위로해주려는 그런 마음이란 말이다.
(강태민·시인, 1962-)
+ 술 마시는 남자
다치기 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술을 마시네
술 취해 목소리는 공허하게 부풀어오르고
그들은 과장되게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거나
욕을 하네
욕은 마음 빈곳에 고인 고름,
썩어가는 환부,
보이지 않는 상처 한 군데쯤 가졌을
그들 마음에 따뜻한 위안이었으면 좋겠네
취해서 누군가를 향해 맹렬히 욕을 하는 그대,
취해서 충분히 인간적인 그대,
그대는 날개 없는 天使인가
그들 마음의 갈피에 숨어 있던 죄의 씨앗들
밖으로 터져나와
마음 한없이 가볍네
그 마음 눈 온 날 신새벽 아직 발자국 찍히지 않은 풍경이네
술 깬 아침이면
벌써 후회하기 시작하네
그렇다 할지라도
욕할 수 있었던
간밤의 자유는 얼마나 행복했던 것이냐
(장석주·시인, 1954-)
+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김수영·시인, 1967-)
+ 나는 포도주
나는 포도주
햇볕과 바람과 비와 인간 속에서 저절로 익은 포도주
나를 마셔라
부드럽고 달콤새콤한 맛은 모두
고뇌의 흔적이 낳은 은총
눈물에든 웃음에든 맘껏 섞어 마셔라
태풍과 폭우와 욕망과 배덕의 식은 재 속에서도
살아남아 익은 포도주
와서 나를 마셔라
돼지에게는 돼지의 맛
소에게는 소의 맛
나귀에게는 나귀의 맛
개에게는 개의 맛
인간에게는 인간의 맛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어떤 맛과도 교제한다
와서 맛보라
저절로 익은 것들은 무엇보다도 풍성하고 따뜻하다
理想에 겁먹고 性에 굶주리고 향수에 시달린 이들이여,
서슴없이 와서 나를 맛보라
자연과 인간의 눈물이 죽도록 사랑해서 만들어놓은
十惡十善의 맛이 골고루 응축되어 있다
원하는 맛대로 나를 마셔라
저절로 익은 향기는 모두 에로스의 핏줄
상상할 수 없는 태고의 사랑이 내 속에 녹아 있다
마음껏 나를 마셔 나를 발견하고 나와 작별하라
나는 포도주
신이 인간에게 내린 커다란 축복
언제나 나는 그대들 속에
숙명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다
(김상미·시인, 1957-)
+ 막걸리
어머니의 젖줄 같은
그윽한 정이
투박하게 배어있는
진하고 걸쭉한 물
거머리 뜯기며
진흙 창 논바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허리 참 하는 그 시간
피로와 배고픔을 채워주던
마술 같은 액체
가슴은 두근두근
순이 곁에 서면
작아지던 내가
벌컥 벌컥 한잔 들이키고
"사랑한다"며
첫사랑을 고백하게 한
사랑의 미약
부질없는 삶
낙수소리 벗삼아
머리 허연 우정을 싸잡아
어우렁더우렁 잔 부딪치는
행복한 노년의 낙
(우보 임인규·시인)
+ 날 부르려거든
날 부르려거든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지 말고
'참소주를 한 잔 사겠소"라고 말해 주오
좋은 술집, 비싼 술집이 아니라도 좋소
시장 안, 꼭 시장 안이 아니라도 좋소
돼지국밥집이나 순대국밥집이면 더욱 좋소
술을 사겠다니 부담이 없어 좋지만
주머니엔 술값을 넣어 가지고 나가겠소
마시다 보면 술값은 내가 낼 수도 있고
아니면 2차를 내가 내더라도
그게 술 마시는 기분 아니겠소
한 잔이라고 했지만
한 병씩은 마십시다 그려, 그리고
기분이 동하면 한 병 더 시킵시다
혹시,
술값을 내가 내어도 나무라지는 마오
술 사려다 대접받으니 그대가 좋을 것이고
대접받으려다가 내가 대접을 했으니
내 기분도 좋을 것이라오
날 부르려거든
그냥,
"참소주를 한 잔 사겠소"라고만 하소
어제 과음했어도 나가리라
내일 과음할 일이 있어도
오늘 저녁엔 나가리라.
(김종환·시인, 1951-)
+ 선생님과 막걸리
해가 중천에 있고 겨울은 시작되었다
네모난 창에 등을 대고 언덕 내리막길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앙상한 미루나무 아래로 걸어 올라오시는 선생님
필경 우리 담임 선생님이셨다
울타리도 죄다 없어진 우리 집을 묻지도 않고 찾아오신 그 날
엄마는 신작로 중앙상회까지 내려가 오징어를 사왔다
콩콩 곤두박질 치는 심장은 곤로 속 심지보다 더 뜨거웠다
양조장집에 가서 막걸리를 두 됫박 넘게 받아오고
선생님은 오징어회를 맵지도 않은지 잘도 드셨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는 거지
나는 선생님이 떠난 후의 각오를 새롭게 했다
또 양은 주전자를 가지고 막걸리를 받아왔다
바닥에 쏟고 몇 번은 입을 대고 빨아먹었다
선생님은 두 번째 주전자마저 다 비우고서야 일어나셨다
무슨 말이 오갔을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로든 도망쳐야 하는데
그날 밤 엄마는 아무말 없었다
그리고 한달 뒤 중학교 입학원서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날 느이 담임이 와서 가지도 않고 막걸리만 마셨는데
막걸리 잔을 비울 때마다 너는 꼭 공부시켜야 한다고 하더라
지긋지긋한 술
느 아버지도 모자라 이젠 담임까지 와서 술타령이냐
나의 은인 담임 선생님
아마 그때부터 술을 가까이 하신 것일까
슬픔의 강 너머로 나의 선생님이 손짓한다
(최나혜·시인)
+ 술과의 화해
나는 요즘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는 한때
어떤 적의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크기 위해 부지런히
싸울 상대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애인조차 원수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해서 먹고 살만해지니까
원수 삼던 세상의 졸렬한 인간들이 우스워지고
더러 측은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화해했다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대신 술이라도 원수 삼기로 했었다
요컨대 애들은 싸워야 큰다니까
내가 이를 갈면서
원수의 술을 마시고 씹고 토해내는 동안
세상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었고
책들은 늘어나거나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텅 비고 시는 시시해지고
어느 볼장 다 본,
고요하고 섬세한 새벽
나는 결국 술과도 화해해야 했다
이제는 더 크고 싶지 않은 나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나는 득도한 것일까
화해, 나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변하지만
비겁한 타협이라고 굴복이라고
개량주의라고 몰아붙여도 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것이다
적이 없는 생애는 쓸쓸히 시들어간다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강연호·시인, 1962-)
+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은
나뭇잎 한 바구니나 화장품 같은 게 먹고 싶다
그리고...... 말들은 무엇 하려 했던가
유리창처럼 멈춰 서는 자책의 자객들......
한낮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누워 꽃나무들에게 사과한다
지난 저녁부터의 발소리와 입술을,
그 얕은 신분을
외로움에 성실하지 못했던,
미안해 그게 실은 내 본심인가봐
아무래도
책상 밑이나 신발장 속 같은
좀 더 깊은 데 들어가 자야겠다
그러한 동안 그대여 나를 버려다오 아무래도 그게
그나마 아름답겠으니
(김경미·시인, 1959-)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시인, 1952-)
+ 술
어젯밤 이슥하도록
동무들과 진탕 퍼마신 술
앙금으로 남은 숙취로
온몸이 돌덩이 같다
조금만 절제하면 좋았을 것을....
늘 한발 뒤늦은 후회
술과 인연을 맺은 지도
삼십 년 세월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녀석의 정체를 도통 모르겠다
한순간 참 얄밉다가도
노을이 지면 살짝 그리워지는
애증(愛憎)의 신비한 벗
술이여!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