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 듯한 더위의 어느 날

홈 > 게시판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시론, 수필, 감상평 등과 일상적 이야기, 유머, 질문, 답변, 제안 등 형식이나 주제, 성격에 관계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는 금지하며 무단 게재할 경우 동의없이 삭제하며 향후 이용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의 어느 날

강위덕 0 1230
찌는 듯한 더위의 어느 날,
애리조나 피닉스의 온도계는 화씨 118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햇빛이 핵폭풍처럼 쏟아진다.
그러나 교회의 실내 온도는 75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원하다기 보다 약간 싸늘한 느낌이다.
우리 교우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성경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새 하늘에 대한 매력적인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마음을 설렘으로 몰아붙인다.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만남에서든,
교회 생활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의 색깔을 얼마만큼 알게 되었고,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내적 아름다움을 가꿀 줄 아는 지혜를 조용히 가꾸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인 아름다움은 곧 새 하늘의 요소들과 조용히 동화되고 있었다.
현실과 미래 사이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내적인 아름다움, 이 기호를 신앙인들은 믿음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은 상징적인 기호의 표현에 있다.
왜냐하면 상징적 언어만이 궁극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술은 현대 철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징적 의미와 기능에 대한 다방면적 연구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자들은 그것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설명하기 위하여
모형론적 논리(the typological)로 귀착시킨다.
물론 상징과 모형에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상징이 과거 현재 미래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모형은 미래의 원형이 올 때까지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물이나 사건의 모형적 의미에서 또 다른 영적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배격되어야한다.
상징들은 한 가지 특성에서 기호(signs)들과 공통된다.
길거리에 붉은 신호등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차량들의 진행과 정지하는 것을 관할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신호등과 차량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상징적 의미와 관습적으로 협약이 주어질 때 그들은 비로소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붉다는 기호와 거기에 상징이라는 의미부여 사이에서 일어나는 혼돈은
인류를 매우 불행한 처지에 이끌기도 한다. 
오늘 날 많은 종파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호는 편의상 다른 것으로 대치 할 수 있지만 상징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의 그림과 하나의 시는 과학적으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실재의 요소들을 열어보여 준다.
창조적인 예술품에서 우리는 그러한 작품 없이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차원안의 실체와 만난다.
접근할 수 없을 뻔 한 실재에 상응하는 요소들이 영혼의 심연에서 그 결실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음악에 있어서의 멜로디와 리듬처럼
상징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차원으로 연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상징은 의도적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적인 또는 집단적인 무의식에서 자라나며
또 우리의 존재의 무의식적 차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고서는 작용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상징으로 이끄는 물리적 요소까지도 계시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접근한다.
그러므로 상징으로 이끄는 모형론은 계시의 패턴이다.
모형과 원형 사이에서 추구되는 상징적 의미는 절대자에 의해서 인간들에게 그 계시를 열어 보이시는 것이다.
 "모형"이란 말은 헬라어의 “튀포스”에서 유래하였다.
“튀포스”는 신약 성서에서 16번 나오는데 못자국, 형상, 표상, 모형, 식, 본, 거울 등으로 번역되었다.
(요 20::25, 행 7:43, 롬 5:14, 히 8:5, 행 7:44, 홈 6:17, 빌 3:17, 살전 1:7, 살후 3:9, 딤전 4:12, 딛 2:7, 벳전 5:3, 고전 10:6)
‘못’ 하면 집을 짓는 목수를 연상 할 수 있듯이
‘못 자국’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손바닥을 연상케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식으로 구약은 신약의 모형이며 거울, 본, 표상, 형상 등 여러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0 Comments
제목